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7) - 역사는 되풀이된다.
- 해병대 부활에 대한 노력
『혁명의 해부』(1947)에서 크레인 브린튼 교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역사, 혁명(개혁) 분석에서 얻은 결론은 변화되면 될수록 처음과 같아진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반복된다."
손원일·신현준, 해군·해병대 양 원로들의 비원
해병대 재창설의 씨앗은 1979년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창군원로 이응준 장군의 90세 생신 축하잔치를 청와대에서 베풀어 주었다. 이 장군은 초대 육군참모총장으로 국군 창설의 기초를 다진 사람이었다. 축하연에는 전직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도 초청되어 나도 참석하였다.
축하연이 끝날 무렵,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이 박 대통령에게 "해병대가 해군에 통합된 지 몇 년 지난 지금 해군과 해병대 양측에서 해병대가 부활되었으면 하는 의견이 많다." 라며 건의했다. 이 말을 받아 신현준 초대 사령관도 해병대 부활의 필요성을 부연했는데 이때 분위기가 매우 숙연했다.
뜻밖의 건의에 박 대통령은 멈칫하더니, 해병대 해체에 대해 일말의 자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 "육군의 군단에도 포병사령부가 있는데..."라면서 배석한 합참의장에게 해병대 부활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일어난 박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그 뒤의 요동치는 정치상황으로 해병대 부활 이야기는 말도 꺼내 볼 수 없게 되어 또 8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1973년 10월 10일 해체된 해병대가 1987년11월 1일부로 부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해병대 현역과 예비역들 모두의 피눈물나는 몸부림이 가져온 산물이다.
유신정권이 10·26사태로 무너졌지만 신군부 시대는 길게 느껴졌다. 해병대 창설 기념식은 커녕 서울수복 행사조차 치르지 못한 암울했던 그 시절 나는 김성은 전 사령관을 모시고 매년 조선호텔 대 연회실에서 해병대 현역과 원로들의 모임을 주관했다. 그 자리에서 누가 나서서 소리를 높이진 않았지만, 이심전심으로 해병대 부활의 싹을 키워 가려는 염원을 이어갔다. 이처럼 해병대 부활은 해병대원 모두의 한결같은 꿈이 결집되어 이루어진 눈물 어린 결실이다.
신군부 정권의 정책 변화
해병대 부활은 부마사태와 5·17비상계엄을 겪으면서 신군부 정권이 정치적 위기 때에 해병대의 전략적 중요성을 재인식하게 된 측면이 있다. 부마사태 와중에 박 대통령이 시해되고 총리였던 최규하 대통령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12·12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 주체들이 정치적 야망을 펼친 것은 우리 민주 현대사에 얼룩으로 남은 것으로 오늘날 평가된다.
1980년 5·17비상계엄은 정치군인들의 쿠데타였다. 비상계엄 선포 내용을 담은 대국민 담화 발표에 앞서 그날 0시 이미 계엄군이 각지에 배치되었다.
계엄군으로 부산·대구·울산·마산·창원 등지에 그 앞 해에 벌어졌던 부마사태에 이어 또 다시 배치된 해병 제1상륙사단(사단장 최기덕 소장)은 사태를 슬기롭게 대처했다. 광주에 배치됐던 계엄군과는 달랐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원인이 되어 신군부는 국가전략부대인 해병대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게 되었다. 여기서 비롯된 해병대의 부활은 정치적 이해 득실(得失)을 이미 고려했다는 의미다.
성병문 제2차장의 문제 제기
나는 5·18사태 이후 어느 날 주영복 국방부장관에게서 해병대에 관해 믿을 만한 귀뜸을 받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김포 해병여단이 사단으로 증강되는 것과 함께 해병대 부활이 검토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뒷날 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졸속(拙速)으로 해병대가 재창설된 것이 그 같은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해병대 부활은 제7대 해군 제2참모차장 성병문 중장의 문제제기에서 수면위로 부상했다. 그는 해군 속에 해병대로 지휘권이 없어 전력(戰力) 관리가 힘든 가운데 해군과 해병대의 전문성이라는 현격한 차이 때문에 파생되는 문제점 등 개선사항 7가지를 극비(極秘)로 정리했다.
이 비밀 브리핑 자료를 가지고 그는 국군보안사령관과 합참의장, 국방부장관 등을 찾아가 해병대 부활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설득했다. 그 노력은 균형 있는 3군 발전과 해병대의 중요성을 절감해 온 이기백(李基百) 합참의장의 동의를 얻는데 성공했고 아웅산사태 후 이기백 국방부장관이 취임하자 성병문 2차장은 한남동 공관에서 그와 접촉하여 해병대의 국가전략기동부대 역할론을 강조했다.
그런 노력 끝에 1986년 8월 그는 이 장관으로 부터 "전두환 대통령이 해병대 재창설을 내락(內諾)했다." 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박구일 제2차장의 계속적 추진
대통령의 내락으로 국방부와 합참에서는 해병대 부활 작업에 착수했다. 박구일 중장이 해군 본부 제2참모차장으로 부임한 직후인 1986년 11월 해군 본부는 해병대 재창설에 관한 해군 안을 해병대 안과 함께 합참에 제출했다. 그후 합참 전략회의에서 해병대 안이 채택되어 국방부에 상신되었다.
이 안건은 해병대에 관심이 많았던 16대 해군참모총장 김종호(金悰鎬) 대장이 취임한 뒤 의결되었고 김 총장이 용기 있는 결단으로 1987년 11월 1일에야 확정되었다.
이날은 해병대의 중요성과 80만 예비역 해병들의 표를 의식한 듯 제13대 대통령 선거일(1987. 12. 16)을 45일 앞둔 시점으로 정호용 국방장관이 취임한 직후였다.
해병대 재창설안이 그토록 시간을 끈 것은 명칭 때문이었다. 당시 해군 본부는 (1) 해군 상륙군 사령부 (2) 해군 해병사령부 (3) 해군 해병 상륙군사령부 등 3가지 안을 올렸다. 합참 전략회의에서 박구일 중장은 '해병대'로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 주장이 합참의 공감을 얻어 '해군 해병대사령부'로 되었다.
신임 정호용 국방부장관은 해병대의 전통과 장병들의 사기를 고려해 과거 명칭대로 해군을 빼고 '해병대사령부'로 결정하여 대통령 재가를 상신함으로써 해병대의 오랜 염원이 이루어졌다. 나는 지금도 '해병대'라는 명칭을 되찾아 준 정호용 국방장관과 김종호 해군참모총장에게 매우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다.
또 신군부 중에서도 해병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해병대 부활에 적극적인 도움을 준 이기백 국방장관과 육본 작전참모부장인 정만길 소장 등은 해병대 부활에 중요한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해병대의 부활. 서울 동작구 대방동(구 해군 본부)
해병대가 부활된 날짜는 1987년 11월 1일이었다. 해병대 치욕(恥辱)의 날인 1973년 10월 10일로부터 꼭 14년 22일 만에 해병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해병대' 와 '해병대사령부'라는 이름을 소리 높여 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함성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당시 졸속으로 처리됐기 때문에 우리 해병대에게는 법적위상 회복 들 숱한 난제가 남아 있었다. 또한 재창설이 신군부 정권의 두 분의 국방장관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것은 당시 군부 정권이 해병대가 전략기동부대라는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
'★해병대 사령관 글 > 6대사령관 공정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9) - 해병대의 두 큰 별 지다 (0) | 2015.03.08 |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8) - 박정희 대통령과 해병대 (0) | 2015.03.04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6) - 해병대 창설이념, '국민사랑' (0) | 2015.03.01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5) - 역사의 심판은 반드시 교훈으로 남겨야 한다. (0) | 2015.02.28 |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74) - 혈맹의 전우 한·미 해병대' (0) | 2015.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