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부사관 글/해병하사 권동일

베트남 정글전 실록 - 스콜(Squall) 9 - 호지맹의 고향 바탄강

머린코341(mc341) 2015. 6. 1. 05:56

베트남 정글전 실록 - 스콜(Squall) 9 - 호지맹의 고향 바탄강

 

 

바탄강 일대의 개활지와 밀림을 헤치며 V.C를 찾아 작전에 임한 지 17일째. 작렬하는 직사광선이 계속 내려 쬐더니 스콜(소낙비)이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와-'하면서 중대원들이 손을 벌이고 하늘을 쳐다보며 비를 맞기 불과 5분, 하늘은 다시  작렬하는 태양 빛으로 변하면서 비가 멎었다. 하늘을 쳐다보면서 대원들은 제각기 욕을 퍼부어 댔다. 10분만이라도 내려 주었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비 맞은 몸은 더욱 끈적거렸다. 얼룩무늬 작업복은 땀과 때에 찌든 채 가시에 걸려 찢어지고 세수와 양치질은 고사하고 잠 잘 때는 마음놓고 군화 한 번 벗고 잠을 자 보지를 못했다. 부르튼 발에 군화를 신은 채 모기와 싸우면서 새우잠을 자야하는 작전지역. 언제 상황이 있을지 모르니 군화를 신은 채 잠을 잘 수밖에...


휴식 없이 계속되는 작전 속에 발은 부르트고 얼굴은 검둥이로 변하고 그나마 내리던 소낙비는 5분도 안되어 멈추고...


쨍쨍 내리 쬐던 하늘을 보며 원망하고 있는데 내리 쬐는 햇볕 속에서 스콜(소낙비)이 다시 내리기 시작하였고 햇볕 속에 내리는 소낙비는 우리가 있는 바탄강 변두리에 쏟아지고 있었으며 물 한 방울 찾아보기 힘든 지역에서 쏟아지는 소낙비는 생명수였다. 내리는 비를 입을 벌려 마음껏 마시며 수통에다 받았고 스콜은 대원들에게 목욕탕과 세탁장을 만들어 주었다. 비에 흠뻑 젖은 얼룩무늬 작업복에 비누칠을 하고 비를 맞으면 깨끗이 세탁이 되었고 어떤 해병은 완전히 벗은 채 비를 맞으면서 몸에 비누칠을 했다.


옷 입은 채로의 세탁이 끝나면 상의를 벗고 흙구덩이 속에서 지 낸 몸뚱이를 씻었다. 30여분이나 내리던 소낙비는 다시 찌는 듯 한 태양 빛으로 변했고 작업복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나면서 수 분 만에 깨끗이 말려졌다.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햇볕은 따갑게 내려 쬐고 땀은 다시 줄줄 흘러내렸다.

 

무자비한 V.C들에게 주민들과 가축들이 몰살되다시피 곳곳에 죽어 있다


정글로 둘러싸인 CH AV THVAN 마을을 완전 탐색하고 38고지 하단부를 거쳐 TAND UC 마을로 진출했다. 밀림과 가시 정글을 헤치면서 38고지 하단부를 돌아서 'B.S 770,840'에 위치한 마을 입구에 왔을 때 썩는 냄새가 마을 전채를 뒤덮고 있었다.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이 구역질을 억제하느라 호흡을 되도록 줄이며 마을 입구를 지나 마을 중앙 깊숙이 들어갔다. 마을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십 마리의 소, 돼지들이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죽어 썩어 가고 있었다. 썩는 냄새를 계속 맡고 있으니 코는 어느새 마비가 되어 냄새가 나는지 조차 모를 지경이 되어 버렸다.


V.C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마을은 가축들은 물론 어린아이, 노인 아녀자 할 것 없이 죽은 채 뒤엉켜 썩어가고있었다.

 

군데군데 잿더미가 되어 있는 집하며 마을은 전쟁의 상처로 지옥이었다.


대대 본부로부터 'B.S770, 840'에 위치한 마을이 V.C들의 습격으로 파괴되었을지 모른다는 정보를 듣고 이곳에 왔지만 너무나 비참한 현실과 이곳의 참상을 볼 때 이렇게 어린아이와 죄없는 민간인, 심지어 가축까지 무자비하게 죽여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보를 미리 듣고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이렇게 비참한 현실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을 집들은 불에 타고 검게 타다 남은 기둥들만 이곳 저곳에 서 있었다.


하늘을 덮은 밀림과 야자수도 시들어 가고 있었다. 중대는 이 마을에서 재 보급을 헬리콥터 편으로 받았다.


중대 항도병이 편지를 갖다주었다. 겉봉을 보니 '울산시 양정동573 최귀희'라고 쓰여 있었다.

봉투를 찢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오빠께


안녕하세요.
소식 없어 궁금 하시다구요. 미안해요.

 
이제부터 매일 보내드리겠어요.
그렇지만 공짜는 아니어요.
우표값 나중에 오빠께 희얀 긁어냅니다.
요샌 엄마께 빌리거든요.
제가 나중에 오빠께 받으라고 했습니다.


방학 동안에 재미있었던 일 이야기 하랬지만 뭐 있나요? 나중에 해 들이겠습니다.


근데 오빠, 전 요새 고생이 많아요.
왜 그러냐고요. 차가 복잡해서 랍니다.


추석이 다가오니 매일 복잡하여 태워주지 않아 지각생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랍니다.
오빠 비가 많이 오나요? 여기도 조금 온답니다.


이젠 벼가 고개를 숙이려고 합니다.
작년에 제 생일날은 햅쌀을 먹었는데 올해는 못 먹는 걸요. 때가 올해는 꽤 늦어요.


생일이 언제냐구요
(양)9월27일 수요일이랍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때거든요


오빠 전 날 때부터 아빠를 보지 못했어요.
제가 태어나기 5개월전 아빤 일본으로 가셨어요.
12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전 아버질 몰랐어요.


국민학교 5학년 때 보았죠.
전 한달 동안 고국에 계시던 아버질 한번도 아버지라고 불러보지 못했어요.


오빠 전 부러워요. 남들처럼 아빠, 언니, 동생은 없고 오빠는 계시고요.
(오빠)누구냐고요? 오빠예요.
그럼 제 이야기만 너무해 미안해요.


소식 빨리 주세요. 오빠 이야기 많이많이 전해 주세요.
난팔 용서... 안녕히....


         69년 9월 11일 일요일 아침 희야 올림

 

12년만에 만난 아버지를 왜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을까? 직접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어도 학교에서나 들에서 산에서 목이 쉬도록 울면서 아버지를 부르고 또 불렀으리라. 귀희의 마음을 누가 알 것인가. 어머님과 꿋꿋이 살아가는 귀희와 오빠를 맺고 보니 왠지 어깨가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외롭게 자란 귀희의 고운 얼굴에 언제나 밝고 명랑한 웃음이 지워지지 않는 숙녀가 되게끔 인도하는 것이 오빠 된 도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귀희의 편지를 받고 귀희의 주소를 받아든 날을 되새겨 보았다.


월남에 오기 위해 기동차에 몸을 싣고 울산역에 도착했을 때 울산 여고생들이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우리 장병들을 환송했었다. 장병들은 저마다 울산 여고생들의 주소를 적느라고정신이 없었다. 여고생들이 저마다 주소를 적어 주느라고 분주하게 바쁜데 유난히 내 눈에 띄는 학생이 있었다. '플랫트 홈'전봇대에 기대선 채 물끄러미 기동 차를 바라보고 있는 여학생을 보았을 때 저 학생의 주소를 적어가야되겠구나 하고 학생을 부른 다음 주소를 받아 들었다.


월남에 와서 편지를 주고받기는 오늘로 8번째, 편지를 받고 보니 왠지 남과 같이 느껴지지 않고 오랫동안 사귀어 오던 친구의 동생처럼 귀엽고 예뻤다. 귀국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면 어머니와 둘이서 외롭게 살아온 생각도 잊혀지고 우연하게 맺어진 오빠이지만 친오빠처럼 의지하고 명랑하고 굳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귀희 편지를 받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출발'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첨병 소대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C-레이션'과 실탄을 배낭에 넣은 뒤 편지도 함께 넣고 M16소총을 쥐고 경계에 임한 채 숙영지를 향해 기동했다.

 

 

출처 : 청룡부대 1대대 3중대 작전하사 권동일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스콜(Squall)"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