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1966 백령도) (53)/ 고립의 고통과 또다른 감회
백령중대 장교들의 소풍(맨 왼편부터: 고려대 출신의 이중위. 구중위(본인). 임소위(대령 예편). 중대장 김대위(월남 귀국후 사망). 해병대 팬인 미인 . 전령. 연세대 출신 김소위)
(3) 고립의 고통
그 당시 대한민국의 산하가 대부분 그랬듯이 백령도도 나무가 별로 없는 산들로 섬을 이루고 있었다.
민간인들은 물론 우리 해병대 가족들은 식수와 땔감이 귀해 항상 어려운 살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그래도 식수는 해병대에서 마을마다 파 준 우물이 있어 부족하나마 세탁과 함께 그럭저럭 해결이 되었지만 겨울철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공군은 원래 미군들이 쓰던 시설물을 물려받았던 터에다 인원이 우리보다는 훨씬 작았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가족들에 대한 별도의 운영지침이 있었겠지마는 제일 인원수가 많은 해병대 가족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별도의 목욕날을 정해 놓고 마치 부대 이동을 시키듯 매주 목요일 오전마다 트럭이 마을을 돌며 부대 본부의 대형 목욕탕으로 실어 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장사병들이 부대 본부로 이동을 해 목욕을 하는 날과는 달랐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겨울철의 목욕날은 해병가족 모두에게 매우 뜻 깊은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목욕은 그렇다 치고 남은 한가지의 문제는 역시 민간인들이나 우리 가족들의 땔감 문제였는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구공탄은 인천에서 이미 찍어 놓은 것을 배로 실어다 공급을 했기 때문에 돈 있는 사람이나 영업을 하는 집 말고는 모두가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난 메밀대를 말려 그 것을 바로 아껴서 때던지 아니면 말린 메밀대에 시중에 흘러나온 군용 연료기름을 묻혀 때고는 한 겨울을 나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들이었다.
그리고 내가 있는 동안 기상이 너무 나빠 모든 교통이 두절 되어 두 번이나 고립이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럴 때 제일 먼저 떨어지는 것이 민간인일 경우는 연탄이었고 군인일 경우는 담배였다.
골초 장교들은 군수부서에 사정을 해 얻은 비축분 화랑 담배마저 떨어지고 나면 은근히 미군부대를 넘겨다보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마침 미군부대 대원들과 친한 선배 장교가 있어 한 번은 다행히 가까운 사람끼리만 조금씩 나누어 피운 적이 있었지만 이럴 때도 사실상의 큰 문제는 담배가 아니라 실은 1만 명이 훨씬 넘는 민간인들의 연탄 파동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와중의 고통을 겪은 후, 우리들의 입을 벌어지게 했던 것은 경리장교가 배를 못 타 오래 동안 봉급을 받지 못하다가 나중에 사 두 달치 봉급을 한꺼번에 받았을 때였다.
(계속)
(4) 또 다른 감회
내가 맨 처음 백령도로 갔던 것은 1966년 가을, 은하호를 타고 보병 소대장으로 부임을 했었던 때였다.
지도상으로 육지의 휴전선을 계속 서쪽 방향으로 일 직선으로 그어 보면 백령도의 위치가 육지의 휴전선보다 훨씬 북쪽으로 치우쳐 있어 처음에는 약간 의아스럽기도 했다.
나중에 왕고참인 어떤 선배의 말을 들으니 진짠지 아닌지는 확인 할 수가 없었으나 휴전 직전 우리 해병대가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는 물론 그보다 더 육지 가까운 남쪽의 초도와 석도도 사투를 벌려가며 점령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휴전 당시 초도와 석도를 북한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지금의 백령도와 이에 따른 섬들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6.25 때의 특수유격대로 황해도 구월산을 주름 잡았던 켈로 부대와 당키 부대의 전초 기지도 백령도에 위치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사실 인천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상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땅은 늘 상 우리를 감회에 젖게 했고 백령도에 근무하고 있던 중에는 두무진은 물론, 자주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임당수를 보거나 나중에 타고 나온 연꽃이 바위가 되었다는 연봉을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산곶의 뾰족한 끝자락과 그보다는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한 월래도를 보고 있을 때는 또 다른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백령도가 항상 적들로부터 매우 심한 감시를 받고 있다는 것도 야간에 산을 올라가면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밤 육지에서 백령도를 향해 비추는 적의 서치라이트가 어떻게나 강한지 불빛이 우리를 “획”하고 지나칠 때면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어 얼른 자세를 낮추곤 했다.
백령도와 육지 사이에 끼다 시피 있는 조그마한 섬 월래도는 적 1개 중대가 배치되어 있다고는 했는데 아무도 병사들이 바깥에 나와 있는 광경을 본 사람은 없었고 나의 경우 딱 한번 무엇을 태우는지 연기만 크게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가끔은 멀리 지나가는 북한 군함을 신기한 마음으로 볼 수가 있었는데 우리 군함과 외관상으로 다른 것은 그 색상이 우리 군함보다 어둡게 보여 칙칙한 느낌과 함께 음흉스러움을 감춘 것 같이 여겨졌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매년 5월쯤이면 작사(조기잡이)철이 되어 북쪽의 어선들이 지도 선을 따라 연평도로 야간 이동을 했는데 단체로 4~5백 척의 배가 불을 켜고 남쪽으로 한꺼번에 야간 이동을 하는 그 불빛은 매우 장관을 이루었다.
내가 여러 차례 부대 본부에 있는 장교 숙소에서 노닥거리다 밤 12시나 되어 우리 중대로 돌아오곤 했던 적이 있었다.
일찌감치 차편은 없어진데다 걸어서 30분 정도면 우리 중대까지 갈 수가 있었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는 별로 문제가 되니 않았으나 한 밤중의 나 홀로 귀대가 썩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다.
백령도 역시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곳이라 밀물이 되면 아예 진촌으로 향하는 사격장 쪽의 큰 도로 일부가 물에 잠기는 것은 물론, 산 아래 바위들이 깔린 곳까지 물이 바싹 들어 왔었기 때문에 나는 권총에다 실탄을 장진한 채 손전등을 가끔씩 비춰가며 바위 사이사이를 긴장 된 마음으로 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코앞의 월래도에서 고무보트라도 타고 살그머니 적들이 상륙을 해 들어온다면 나는 꼼짝 없이 당하는 꼴이었지만 내 생각으로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먼저 일망타진을 해야지! 하는 영웅심을 앞세워 항상 눈을 크게 부릅뜨며 지나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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