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1966 백령도) (57)/ 특 명
함안 이동 중 체력 단련
(8) 특 명
나는 부대장에게 이미 한 번 찍힌 몸이 되었다.
백령 중대가 막 진촌에서 공군부대 옆으로 이동을 한 후였는데 내 소대의 한 대원이 외출을 나갔다가 오후 늦게 귀대를 하기 위해 진촌에서 공군 스리쿼터를 얻어 타려다 그만 공군 하사관과 사소한 시비가 벌어졌다.
마치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되듯 주위에 있던 군인들이 간여를 하던 끝에 해병대 헌병 하사관이 그만 공군 준위의 다리를 권총으로 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그 당시에도 만약 이것이 육지에서 일어 난 사건이라고 했다면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 수 있는 뉴스였으나 다행히 조그마한 섬에다 통제가 용이해서인지 무사히 양군간의 합의로 덮어 버릴 수가 있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우리 소대원이 먼저 사고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로 그 일이 있은 후로부터는 절대로 부대장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우 애를 쓰고 있었는데 가을이 매우 깊었던 어느 날, 뜻 밖에도 나는 부대장의 부르심을 받고 말았다.
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먼저 인사 장교에게 왜 부르시는지부터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화를 했더니 인사 장교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저 특명이 있을 것이라는 말만하고 그 내용은 자기도 모른다고 시치미를 땠다.
부대장실로 찾아 간 나는 뜻 밖에도 월남전에 투입 될 대원 185명을 인솔해 포항까지 가 무사히 인계를 하고 오라는 명령이었다.
부대장실을 나온 나는 사실상 자신 반 걱정 반의 입장에 서 있었다.
당시 도서부대 대원들 중에는 매우 거칠거나 기합이 빠진 대원들이 많았다. 특히 위험한 전쟁터로 예기치 않게 자신이 차출 된다고 가정을 해 본다면 그 반응이 예사롭지가 않을 것으로 추측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가 소속된 백령 중대 대원들이라면 모두가 내 자신이 가끔씩 예측 불가능한 성격을 가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지만 항 포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중화기 중대 대원들이나 특히 멀리 떨어진 연평도 대원들이야 말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가 특히 의문이었다.
중대에 함께 소대장을 하고 있던 동기생들은
“이봐, 또 혹시 포항에 가서 총원 185명 현재원 무! 하고 보고 하는 거 아니야?”라는 말을 해 놓고는 모두가 깔깔대고 웃는가 하면
“야, 부대장이 도서부대에서 최고 악질 소대장이 누구냐고 인사장교한테 물었데.”하고는 또 깔깔대곤 했다.
백령도를 떠나는 당일 부대장에게 보고를 마친 후 우리는 해군에서 준비한 LSM 수송선을 타기 위해 부두로 이동을 했다.
먼저 조그마한 BU를 타고 나가 LSM에 오르게 되었는데 항해를 하면서 먹을 김밥과 계속 이동을 하면서 먹을 식량 가마니들을 BU에 옮겨야 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어떤 녀석은 김밥을 넣은 상자를 발로 걷어 차버리고 지나가기도 했다.
밤새 어떤 환송 파티를 했는지 대원들 거의는 심한 술 냄새를 풍기고 있었고 나는 화가나 내심 김밥이나 식량을 싣지 않으면 모두 굶길 참이었다.
싣고 가야할 짐은 마침 중대 본부에서 나온 대원들이 대신 옮겨다 주는 덕택으로 간신히 LSM에 실을 수가 있었으나 나는 출발부터가 이러니 앞으로의 일이 더욱 난감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운이 좋아서 그런지 마침 LSM에는 정보 장교인 유 중위가 포항으로 출장을 가는 중이었고 과거 백령도에서 근무를 했던 조 준위도 백령도에 잠시 들렀다 다시 포항으로 되돌아가는 길이라 185명 중에 낀 고참 하사관 한명과 더불어 네 사람이 모두 힘을 합칠 수가 있었다.
일단 배에 오르면 인원에 문제가 생길 수는 없는 것이었으나 밤중에 인천에 내려 하루 밤을 파견대에서 자면서부터가 제일 문제였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파견대에서 동인천역까지의 트럭 이동 다음은 동인천역에서 용산역까지의 열차이동 다음은 용산역에서 30분간 지체를 한 후 포항역까지의 열차 이동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항역에서부터 제1상륙 사단까지의 트럭 이동이 끝나야 비로소 내 임무가 모두 끝이나 구간 구간이 모두 살얼음 같이 느껴졌다.
나는 배에 오른 후로는 대원들에 대해 아무 간섭이나 심지어는 인원 점검도 하지 않았다.
다만 연평도에 도착해서는 하선망 그물을 내려 대원들을 태웠고 또 일단은 대원들의 수가 보고 받은 인원수와 맞는지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잠시 인원 파악을 했을 뿐이었다.
연평 중대 대원들은 같은 도서부대 소속이지만 백령도에 있는 백령 중대나 중화기 중대 대원들에게 촌놈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라도 먼저 기선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배에 오르자마자 부산하게 목소리를 높여가며 이곳저곳으로 배 안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 동안 간밤에 먹었던 술로 쓰린 속을 안고 몇 시간 동안이나 배를 타고 온데다 먹을 것이라고는 굳어있는 김밥 밖에는 없어 우선은 그저 추운 한기를 없애느라 배 안의 더운 열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파이프가 있는 곳이면 몸을 웅크리고 쳐 박혀 있다 시피 한 백령도 대원들의 모습을 본 연평도 대원들은 얼마 후에는 그만 제 풀에 꺾여 조용해지고 말았다.
우리는 무려 열세시간만에 인천항이 보이는 곳까지 다가 갈 수가 있었고 나는 지금부터가 문제라고 생각을 하고 모두 집합을 시켰다.
그러나 집합은 그렇게 용이 하지 않았다. 아까 말한 것처럼 배 안의 모든 구석이라고 생각 되는 곳에는 마치 구겨 놓은 박스처럼 모두가 몸을 처박히다 시피하고는 눈을 감고 자거나 꼼짝을 않고 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해군 장교로부터 곤봉을 하나 빌려 집합이라고 큰 소리를 내면서 눈에 보이는 대원마다 정신없이 쑤셔대며 배 안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배의 갑판을 가로지르며 걸쳐져 있는 브리지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나는 아래를 내려 다 보며 우선은 가슴을 펴고 바로 서서 열을 바로 맞출 수 있도록 계속 일어섰다 앉았다 헤쳤다 모여라를 반복시키면서 육체적으로 열기를 느끼게 하는 한편 정신을 바로 차리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는 그러잖아도 큰 목소리에 나는 목청을 돋우어 가며 매우 엄한 모습을 보이면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모두 해병대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는 일장 훈시를 했다.
일단 무사히 인천 파견대의 막사까지 도착을 시킨 나는 잠시 헤어져 내일 아침 용산역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유 중위와 조 준위 그리고 외출을 했다 역시 용산역으로 가겠다는 고참 하사관을 잃고는 매우 쓸쓸함을 느끼며 하사관 한 명을 뺀 184명과의 대결에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게 한 후 나는 대원들을 모두 집합 시켜 양팔 간격으로 벌리게 했다.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에 대원들이 운집을 하면 단결 할 때는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지금 형편으로는 거리를 많이 두게 하여 오히려 각자의 책임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합이 번쩍 들어있는 해병대 소대장답게 악을 쓰는 목소리로 먼저 외출 금지와 음주 금지의 선포를 한 후 만약 명령을 어길 시에는 추호의 용서가 없을 것이라는 말을 매우 크게 강조를 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각 내무반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매우 거칠었다.
많은 대원들이 담을 넘어 바깥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이미 술이 거나하게 된 대원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10시가 가까워지자 너무 시끄럽게 난장판이 된 듯 한 내무 실을 골라 불시에 문을 열었다.
한 대원이 이미 눈치를 알아 차렸는지 얼굴은 나를 향하지 않고 뒤돌아 선채 한 쪽 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한쪽 손은 주먹을 쥔 채 한가운데 서서 마치 내가 들으라는 듯
“야, 내가 이래도 부산 초량에서 놀았다면 놀았던 놈인데 어떤 놈이 나를 건드려? 응?” 하고는 들고 있던 소주병을 어디에다 집어 던지려는 동작을 막 하려다 아무 말 없이 자기 뒤로 다가가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내가 아무래도 궁금했는지 아니면 그래 놓고도 내가 반응이 없자 멋쩍었는지 힐끗 나를 뒤 돌아다보았다.
조용히 있던 나는 그를 무시한 채 인상을 잔득 찌푸리고 고함을 쳤다.
“집합! 모두 3분내 연병장에 집합!”하고는 호루라기를 계속 불어대며 모두가 움직이도록 하는 한편 계속해 여러 내무실의 문을 열어 재껴가며 돌아다녔다.
이미 배가 인천항에 바로 입항하기 전 선상에서 기선을 제압했던 터라 동작이 매우 빨라져 있었다.
“양팔 간격으로 좌우로 나란히!”
“줄이 왜 틀려? 바로! 다시 좌우로 나란히! 바로! 번호!”
개중에는 지금 막 담을 뛰어넘어 급히 들어오는 대원들도 있었다.
인원점검을 해보니 그래도 다섯 명이나 비었다.
말을 하자면 때려 부수거나 대원끼리 서로 싸움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술을 마시고 지휘자에게 엉기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도망을 가는 경우가 생기면 문제가 크게 되는 것이었다.
실은 1년 전에도 월남전에 참전 할 지원 병력이 모자라 도서부대로부터 적은 인원이었지만 차출을 해 갔는데 그 당시 백령 중대에서는 어떤 대원이 술을 마시고 실탄을 장진해 소대장에게 왜 내가 가야 하느냐고 대 들었던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 대원으로부터 잠시 들었던 적이 있어 나는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몰라 결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담을 넘어간 대원들이 열두시 이전에는 돌아오리라 기대를 하며 우선은 군기를 잡아야 앞으로도 통솔하기가 쉽고 또 마음의 해이로 인한 도망자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미리 얘기한다. 술을 먹은 사람은 자진해서 나와! 만약 나중에 발각 되는 사람이 있을 때는 그냥 두지 않겠다!”
스무 명 정도의 자진 신고자가 나왔다.
나는 막사에서 미리 가지고 나온 야구 빳다로 엉덩이를 몇 대씩을 때리고 모두 제자리로 들어가게 한 후 다시
“기회를 한 번만 더 준다. 이것이 마지막이다. 술을 먹은 사람은 자진해서 앞으로 나와!”
안되겠다 싶었는지 또 다시 다섯 명의 대원들이 나와 빳다를 맞고 들어갔다.
“이제부터는 검사를 한다.”
나는 대원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는 곳에 정면으로 다가가 한명 한명씩 입김을 불도록 했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술 냄새가 풍기는데도 숨기고 있었던 대원들이 적발 되어 다섯 명 정도의 대원이 이번에는 내게 주먹으로 맞았다.
나는 밤공기도 어슬한데다 밤이 깊어지고 있어 대원들이 피곤할수록 앞으로의 이동에도 차질이 더 생기지 않을 것으로 믿고 밤 10시쯤 시작했던 특별 훈련을 새벽 1시 반쯤에야 끝을 냈다.
그러나 아직도 세 명의 대원은 돌아오지를 않았고 새벽이 되어서도 그리고 우리가 동인천역에서 열차를 타는 순간에도 보이지 않아 매우 애가 탔다.
용산역에 도착한 우리는 열차가 출발하기 전 30분이라는 여유를 가졌다.
그리고 어제 저녁 헤어졌던 유 중위도 조 준위도 고참 하사도 제 시간에 나와 줘 나와 함께 다시 모이게 되었고 혹시나 했던 어제 밤 무단이탈자들도 세 명중 두 명이 돌아 와 매우 기뻤다.
이제는 나머지 한 명만 더 돌아오면 만사가 일단은 끝이 나게 되므로 한결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한편 돌아오지 않은 나머지 한 대원에 대해서는 신상을 수소문 해 보았다.
집이 서울에서 고아원을 하고 있고 평소 매우 착실한 대원이라는 내용을 알고 나는 설마 부모들이 도망병이 되라고는 하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실낱같은 기대지만 결코 버리지를 않았다.
기차가 출발하기 5분전쯤 이제는 포기를 해야 하나 하고 자포자기를 하고 있었을 때 그 마지막의 한 대원이 헐레벌떡 열차를 타러 서둘러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숨을 몰아쉬면서 그 대원을 반겼다.
“그래 와야지” 안경을 끼고 키가 작아 보이는 그 대원은 겁을 먹은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고맙기까지 했다.
185명 전원을 무사히 포항에 도착 시킨 나는 통신대에 들어가 전화를 빌렸다. 당시 백령도는 케이블이 아니고 무선으로 한 구간을 통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에도 말이 잘 안 들리는 수가 많았지만 더구나 기상이 나쁘면 영 들리지 않는 수도 있었다.
“부대장님, 무사히 185명 전원 사단에 인계 했습니다”
처음에는 전화가 윙 윙 거려 잘 못 알아듣고 있었으나 반복해 내가 하는 얘기를 나중에 사 알아 들은 부대장은 매우 기뻐했다.
“응, 수고 했어! 15일간 휴가를 줄 테니까 잘 쉬다와”
나는 생각지도 못 했던 특별 휴가를 받았던 터라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내가 더욱 기뻤던 것은 우리가 가지고 갔던 식량인 쌀과 보리쌀이 많이 남아 사단 근무대대(보급 대대)에 인계를 하게 되었는데 조 준위가 친절하게도 그 곳까지 나를 안내를 하고 근무 대대 상사들에게도 남은 식량을 돈으로 쳐서 수고를 많이 한 나에게 주라고 압력을 넣어 나는 기대도 안 했던 휴가비까지 챙겼던 것이다.
그러나 후일 나는 185명에 대한 생사를 확인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으나 듣기로는 그때 도서부대 대원들 중에는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는 얘기가 있어 무척 가슴 아파했다.
특히 내가 소대원으로 데리고 있었던 나주가 고향인 나 해병이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는 아직도 그것이 잘못된 소식이었으면 하는 생각은 물론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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