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군 글/해사24기 정도영

해병대독립/ 원상회복 추진 역사와 관련하여(10)

머린코341(mc341) 2015. 11. 5. 00:15

해병대독립/ 원상회복 추진 역사와 관련하여(10) 



해병대출신들의 자각과 의지로

 
○ 해병대독립운동의 태동


1982, 12, 28 이후 해병대사령부의 원상회복을 갈망이 시작되다.


해병대독립역사의 시작은 제6대 해군제2참모차장(제15대사령관에 해당)으로 부임한 박희재장군은 해병대에서 별난 성격으로 소문난 장군으로서 누구보다 해병대를 사랑하시는 분이었으나 모든 권한을 제거당한 현실에 너무너무 화가 나서 재임기간동안 해군본부 장군식당엔 아예 가지 않고 본인 사무실에서 중식을 해결하였다는 일하가 있다. 이처럼 참으로 안쓰러운 해병대 수장의 모습을 본 해병대 소속 장병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때부터 해병대를 다시 찾아야 한다는 해병대원상회복 추진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박희재장군의 권한도 책임도 다 제거된 식물인간 같은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다 후임으로 제7대 해군제2참모차장에 부임한 성병문장군은 해군 속에서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을 깊이 고려하여 극비로 해병참모부 기획처장(김기홍 대령)에게 해병대사령부 통폐합 후에 해병대에 발생한 문제점을 연구 분석하게하고, 그 결과를 성병문장군 본인이 직접 당시 이기백 국방장관과 안필준 기무사령관을 만나서 해병대의 현재의 실상을 설명하고 설득하는 끈질긴 노력으로 해병대문제점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직보되게 되었고, 사령부를 되돌려주겠다는 전두환대통령의 뜻을 측근으로부터 구두통보를 받게 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임기가 다되어 빛을 보지 못하고 예편하였다고 한다.

○ 해병대 법적위상확립


1988, 8, 1 국군조직법에 1973년 이전처럼 “... ...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로 개정됨에 따라서 해병대의 법적위상이 회복되었다(818계획과 연계)



제18대 최갑진 사령관 재직기간에 합참이 대폭 증편되는 합참818계획이 진행되었고, 이와 연계하여 해병대는 사령부가 통폐합된 1973년 이후 해병대 건설 및 운영에 대한 제반 문제점을 분석하여 공식적으로 상급기간에 보고할 수 있었으며, 검토 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818계획이 법적으로 승인되는 1990년 8월 1일 국회통과 법안에는 국군조직법 제2조(국군의 조직): 국군은 육군, 해군 및 공군으로 조직하며,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라고 해병대 존재에 대한 법적위상만 회복하게 되었다.


해병대의 위상은 오히려 제13조(합동참모회의)에 9개 작전부대 중 1개 작전부대로 명시되어 해군작전사령부와 동급수준의 부대로 전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80만 해병대예비역들이 그토록 염원한 해병대의 독립은 좌절되고 만 것이다. 이때 해병대독립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예비역을 포함해서 당시 정치인 등 관계 여로에 도움을 많이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당시 아시아시멘트 사장을 역임하시던 제9대 이병문 사령관만은 대단히 미온적이었던 모습을 보여주셨다는데, 당시 해병대독립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현역 실무자의 마음으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 해병대 지휘체제 개선


1996, 7 이후 제1차 해병대원상회복추진운동이 전개되었다(1973년 이전의 모습으로)
해병대 지휘관리 체제가 개선되었다. 사령관 서열 국군3성장군중 선두로 승격
국군묘지 해병대출신 순국자 비석문구가 해군000병장 → 해병대000병장으로 정정됨

 

제18대 최갑진 사령관 시절 참모장을 수행하며, 해병대 독립을 추진했다가 좌절을 맞보았던 제22대 전도봉 사령관(1996년 6월 30일 부임)은 해병대문제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부임 후 두 달도 최 안 된 1996년 8월 중순부터 현역사령관이 중심이 되어 공식적으로 「1973년 이전의 해병대로」의 해병대원상회복추진 운동을 시작하였다. 현역사령관이 앞장섬에 따라서 국내 해병대예비역은 물론하고 외국에 살고 있는 예비역들 까지 동참, 국내, 외 현역과 예비역이 함께 참여하는 해병원상회복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당시 해병대전우회총재직을 맡고 있던 제9대 이병문 사령관 중심의 해병대독립 반대 세력이 등장함에 따라서, 지난 세월 그토록 자랑해왔던 해병대특유의 단결력이 크게 흔들리고 깨어지는 불운하고 안타까운 상황도 병행되었다. 당시 전개된 해병대원상회복운동은 목적이 다소 수정되어 해병대의 모든 문제가 「해병대지휘체계개선」으로 집약되어 다시 국방부에 보고되었고, 국방부에서 심도 있게 분석하고 검토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해병대 사령관의 위상은 국군 3성 장군 중에서 서열1위의 자리가 부여되는 성과를 얻었고, 정부가 바뀌면서 전도봉 사령관은 2개월 먼저 해병대를 떠남으로 전반적인 문제해결의 결말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후보로서 해병대표가 절실히 필요했던 김대중 후보는 유세기간 중에 해병대전우회 경기도연합회 이천지회를 방문하여 해병대문제를 해결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대통령이 된 후 1999년 1월 21일 국군조직법 중 개정 법률을 공포함으로서 해병대지휘관리가 개선되었다.


특히 국군 3성 장군 중 해병대 사령관의 서열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과를 전도봉 사령관이 현역으로 근무할 때 획득하였다. 또한 동작동국군묘지 해병대전사자들의 묘비에 해병대000으로 바뀌었다.
 


제22대 전도봉 사령관 증언에 의하면, 현역사령관으로 제1차 해병대원상회복운동을 추진하는 것은 임명권자에 대한 도전으로 평가되어 청와대에 몇 번 불려가 위협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1990, 9, 29 공포된 해병대사령부 직제령에 명시한 해병대사령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불합리한 현실을 설명한 후에야 1973, 10, 10 해병대사령부 통 폐합이후 살아온 해병대의 안타까운 현실을 이해하고 해병대사령관의 행위의 타당함을 인정하게 되어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사령관직위를 걸고 해병대원상회복을 외치고 있는 제22대 전도봉 사령관을 조기에 해임하라고 3분의 전임 해병대사령관들이 세 번씩이나 국방부장관을 찾아가 간청하였다니 도대체 그분들은 어느 군대출신이며 사령관을 역임하기까지 닦아온 철학은 무엇이었을까? 궁금함을 금할 수 없다.
 
전도봉 사령관은 전역한 후에 김영삼 전임대통령과 대화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 재임시 왜 해병대원상회복을 반대하셨는지 현재까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더니, 김영삼 전 대통령 대답은 “해병대는 반란군이다. 반란군이 살아있는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 본인도 해병대를 없애려 했으나, 네놈이 있기 때문이고, 단결된 해병대예비역들이 있어서 손을 안 되었다. 대신 하나회를 없앤 것이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해병대 예비역 준장  정  도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