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1968 내가 만난 미 해병대 전우들(1)

머린코341(mc341) 2015. 11. 10. 18:38

1968 내가 만난 미 해병대 전우들(1)


1. 나와 미 해병대원과의 첫 만남.


내가 개인적으로 미 해병대 장사병들과 처음 만났던 일들과 서로 교분이나 의기투합을 했던 일들을 상기해 보면 나의 경우 꽤 여러 미 해병들과 접촉을 했던 것으로 기억 된다.


사실 나는 월남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각 보병중대에 두 명의 미 해병대 앵그리코맨이 파견 되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1968년 1월 28일 우리가 월남의 다낭 항에 도착 했을 때는 우리 청룡부대가 추라이지역에서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 대대와 중대가 아직 완강한 진지를 구축하지도 못했던 때였고 청룡부대 본부도 해변 가에서 임시 천막으로 이사 짐을 정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다 벌써 호이안 지역에서의 여러 중대들이 적과의 조우가 잦아 전운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처음 월남에 오는 장병들을 위한 1 주일간에 걸친 적응 교육은 받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고 또 1월 30일부터는 적의 구정 공세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결국 모두가 M-16 소총을 손에 한 번 쥐어보지도 못한 채 급히 각 부대로 배치가 되는 일로 하여 미 해병대 앵그리코 맨이 각 중대에 파견이 되어 있는지 그리고 미 해병대 LVT(수륙 양용차)가 지원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전연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1968년 1월 31일로 기억 된다. 내가 맨 처음 만난 미 해병대 대원은 두 대의 LVT 대원들이었다.


나는 이미 청룡부대 인사 장교로부터 5대대 27중대 1소대장으로 임명한다는 전언 통신문을 받았고 오후 4시경 두 대의 미 해병대 LVT가 내가 대기하고 있는 근무중대(보급 중대)에 도착할 예정이니 5대대 26중대와 27중대에 보급할 C-레이션을 실은 후 먼저 26중대에 보급을 한 다음 나머지 C-레이션과 함께 27중대로 가서 소대장으로 부임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26 중대와 27중대의 현재 위치는 좌표로 받았고 지도는 근무 중대로부터 한 장을 빌려 확인을 해 보았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전까지 소속이 없었음으로 비무장이라 그곳 보급 장교에게 사정을 얘기하고는 권총을 한 정 빌려 허리에다 찼던 것이 고작이었다.


LVT는 예정 시간보다 오히려 10분쯤 빨리 근무 중대에 도착했다. 물론 한 대의 LVT 마다 27중대 대원이 두 명씩 타고는 있었지마는 우선 나는 LVT 운전병 한 사람을 만나 내가 앞으로 27중대까지 지휘를 할 장교며 27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할 장교라는 것을 말했다.


그러나 워낙 LVT 소리가 커서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리더인듯한 LVT 대원이 시동을 껐다. 또 바로 옆에 위치한 포병대대에서 쏘는 105미리 포 소리가 굉음을 울리긴 했으나 간간히 쏘는 포 소리는 우리의 대화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물론 27중대에서 온 LVT였기 때문에 앞으로 27중대를 찾아가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 같기도 했지만 사실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호이안 외곽 경비행장에 야영을 하는 26중대에 일단 C-레이션을 내리린 후 가까운 길을 택해 이번에는 다른 길로 27 중대의 야영지까지 가야했음으로 지도를 보고 새 길로 찾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


호이안 시는 낮에 우리 해병대와 적군들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있었다. 적들에게 거의 점령을 당했던 호이안 시가 그래도 거의 아군의 손에 재탈환이 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LVT가 근무 중대까지 오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고 LVT에 탑승한 27중대 대원들이 말했다.


결국 마음을 조려가며 호이안 외곽 경비행장에 우선 대기하고 있는 26중대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지도를 보고 새로운 지름길을 택해 26중대에서 27중대까지 가야하는 일이 남아 있는데다 26중대에서 C-레이션을 모두 내리고 나니 벌써 어둠이 깔리기 시작해 잠시 매우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지도상으로는 숲을 가로질러 간다면 26중대의 야영지에서 27중대의 야영지까지 3키로도 채 안 되는 거리였지만 호이안 시가전에서 쫓긴 많은 적들이 그 숲속으로 후퇴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었기 때문에 두 대의 LVT가 이동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LVT의 미 해병대 대원들은 이미 자기들의 일이 끝난 것으로 알고 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다 나와 대학 동창생인 26중대의 부중대장도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을 해 지금 내가 부임을 하지 않으면 소대장과 분대장들을 잃은 대원들을 누가 지휘를 하겠느냐는 말을 남기고는 LVT 대원들이 쉬고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먼저 누가 지휘자인가를 물었다. 상의 유니폼을 벗고 런닝 셔쓰만 입고 있던 한 대원이 자기라고 나섰다. 나는 알다시피 27중대의 여러 지휘자들이 부상을 당하고 메드 백으로 후송이 된 것을 알지 않느냐고 반문 하면서 지금 내가 가지 않으면 지휘할 사람도 없고 또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알지 않느냐고 사정쪼로 얘기를 했다.


그리고 비록 밤이지만 두 대의 LVT가 튠업을 해가며 강한 라이트를 비추고 앞으로 돌진하면 적들이 쉽게 덤비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도 했다. 또 이에 덧붙여 레이션을 실었지마는 LVT는 원래 병력을 싣기 때문에 적들을 오히려 제압하면서 갈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도 했고 만약 기습을 당하더라도 계속 목적지로 달려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내 말을 들은 지휘자는 옆에서 역시 듣고 있던 대원들을 힐끗 쳐다보며 서로 뜻이 통했는지 가자는 제스처를 쓰고는 먼저 지도부터 찬찬히 살폈다.


나는 우리 해병대원 네 명에게 역시 여기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각자 두 대에 두 사람씩 나누어 타되 나는 역시 이곳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선두 LVT에서 지휘를 하겠노라는 말을 하고는 LVT의 상갑판 위에 난짝 엎드린 자세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결국 사지를 향해 돌진하는 LVT 2대의 위용은 대단했다.물론 장애물이 너무 많은 숲속이라 엔진의 튠업 소리며 멀리까지 비추는 밝은 라이트는 무슨 대 부대의 작전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거의 30분 정도나 지났을까? 멀리 보이는 나무 사이에 우리 해병대의 위장복이 얼른 눈에 뜨이는 것 같아 이제는 살았구나 싶은 마음으로 안도의 숨과 함께 한 편으로는 적들을 속인 것에 대한 승리감에 젖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당시의 그 미 LVT 해병대원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날이 샐 무렵에는 하필이면 내가 새로 인계를 맡은 27중대의 1소대 정면으로부터 적들의 총알이 수도 없이 날아들었다. 잠시 정면의 내 소대 1개 분대만 응사를 하고는 모두 총알을 아꼈다. 그것은 이미 월남의 젖줄인 1번 도로가 적들의 본격적인 공세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기 때문에 다낭으로부터 들어 와야 할 포탄이나 총탄 그리고 식량까지도 원활하게 지원이 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적들의 사격은 계속 되지 않았다.


내가 속한 27중대는 어제 호이안 시의 시가전에 들어가던 중 잠시 정지해 적정을 살피다 적들로부터 박격포의 공격을 받아 내가 지휘자가 된 1소대의 소대장을 비롯 분대장들까지 모두 다섯 명이 부상을 당해 메드 백 헬리콥터로 후송이 되었던 것이다. 나는 아침이 되자 우리가 공동묘지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참호를 파고는 웅크리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C-레이션으로 아침을 먹은 우리 중대는 잠시 대대로부터의 명령을 받기 위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어제 부상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메드백이 오지 않아 대기하고 있는 대원들이 서너 명 있었다.


앵그리코 맨은 계속 메드백을 무전기를 통해 부르고 있었으나 워낙 미 해병대도 전황이 좋지 않은데다 부상자들이 많아 그런지 아예 올 생각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두 앵그리코맨 중 무전기를 잡고 애를 쓰던 대원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키가 자그마하고 안경을 쓴 대원이었으나 눈빛만은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나는 내가 어제 밤에 도착한 1소대장이라는 말만 간단히 얘기했고 그는 영어가 통하니 자주 얘기를 나누자고 했다. 바로 이것이 내가 처음 만나게 된 미 해병대의 첫 앵그리코맨이었다.



출처 : 서울대동문카페, 구문굉 선배님  http://cafe.daum.net/snua10/6ITb/5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