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의 단상(斷想)
1965년 "월남의 달밤"이라는 유행가는 공전의 대 힛트를 쳤다.
그런데 이 노래의 원래 가사에는 월남이 "먼 남쪽 섬의 나라"로 묘사되어 얼마후 수정을 해야만 했던 헤프닝이 벌어졌었다.
한국군의 월남전 파병이 세계인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고 온 국민들의 기우와 열망을 함께 했을 때의 일인데도 월남이 섬인지 아닌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바깥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대변 해 주었다고나할까?
우리가 대학을 다녔을 때는 대학교수며 여행가셨던 김찬삼씨가 한국인으로써는 처음 세계 무전여행을한 뒤 책을 쓰기도하고 우리 대학의 강단에서 체험담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을 일단 벗어나면 세계 여행의 절반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말과 에스키모가 여름에는 투피커 그리고 겨울에는 이글루에서만 생활을 했던 것은 이미 수 십여년 전의 먼 옛날 얘기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당시의 우리 국력이나 외국에 대한 무지를 대변해 주는 말로써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었고 지금도 그 말이 한 시대의 우리 정황과 여건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있다.
1968년 1월 그 해따라 한국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포항의 상륙사단에 위치한 파월 특수교육대에서의 훈련은 무더운 환경에서의 예비경험이 아니고 엄동설한에서의 훈련이었다.
마침내 한달 가량의 교육훈련을 마친 우리들은 병력을 실은 수송선이 차츰 적도를 향해 순항을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뜨거운 전쟁터로 향하고 있는 것을 차츰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도착하자말자 들이닥친 적들의 휴전기간 중 구정공세는 그 어느때보다 많은 아군의 희생을 가져왔고 내 역시 생명을 하늘에 맡길 수 밖에 없었던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이러한 환경 속에서의 월남이라는 존재는 산하도 사람도 집들도 모두가 혐오스러운 존재일 수 밖에 없었고 특히 여자들이 질겅 질겅 칡을 씹듯 풀잎을 씹어 입가에 붉은 물을 드리우며 침을 뱉어대는 모습들은 바로 혐오 그 자체였다.
물론 과거 불란서 군인들로 부터의 강간을 피하기 위해 많이 애용했었다는 그 방법은 내가 보기에도 실로 강간을 모면 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내가 20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디엠반이라는 군청을 방어하기 위한 결사대로 파견을 나가있었을 때부터 나는 차츰 월남 사람들과의 접촉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월남 정규군 장교들과도 그랬지만 장터가 군청의 정문으로부터 멀지 않았기 때문에 장날이 되어 물건을 팔고 사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로 부터도 차츰 보고 느끼는 점이 많았다.
우리 시골의 국수를 묶은 타래는 월남에서도 그 모습 그대로였고 간장도 젓국도 고추를 먹는 것도 상추와 쑥갓을 먹는 것도 매 한가지였다.
사실 향이 너무 진해 근처에 가기가 꺼려지는 음식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역시 동양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일상의 음식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처음의 그 혐오스러운 충격 때문에 아예 월남인들의 먹거리를 거의 상대하지는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자 차츰 이해를하려는 마음을 가졌다.
또 더욱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피난민들을 만나면 곧 잘 눈에 띄게 어린 아이들이 손에는 무엇을 들고 어깨에는 줄을 묶어 메고 다니는 병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손에는 바나나 잎으로 싼 밥이었고 병에는 느억맘이라는 젓국병을 메고 다녔던 것이다.
내가 말단 보병 전투소대장을 6~7개월 한 뒤 헌병대로 원대복귀를 해 처음으로 호이안시라는 도시로 파견대 순시를 할 기회가 생겼을 때였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파견대장의 안내로 제대로 갖춘 월남의 민간인 식당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는데 맨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상마다 미리 얹어 놓은 간장과 약간 누른빛을 띄고있는 느억맘이었다.
먼저 간장을 먹어보니 전에도 그랬듯이 일본 간장처럼 단맛이 있어 오히려 일본의 기꼬망보다 더 입맛이 당겼다.
그러나 젓국은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몰라 차마 맛을 볼 생각이 없었는데 안내를 했던 어떤 대원이 직접 만드는 곳을 가 보았는데 우리가 먹는 젓갈보다 더 깨끗하게 만들더라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나는 숫가락에 젓국을 조금 부어 맛을 보았다.
나는 결국 이때부터 느억맘의 맛을 알게 되었고 모든 동남아 국가의 젓갈의 원조가 바로 느억맘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작전지역에서 흔하게 만나는 사람들은 주로 나이든 여자들과 아이들이었다.
물론 농촌지역이라 생업이 농업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담배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에서는 동네 안의 그 찌든 잎담배 냄새가 너무 역겹게 여겨졌고 채 여섯살이나 됐을까 싶은 아이가 잎담배를 물고 피우는 광경도 또한 진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대부분의 농촌 사람들은 여자들이라 할지라도 일상적으로 맨발로 다녔다.
그러다보니 자연이 엄지 발가락이 무게를 받쳐서 그런지 옆으로 삐져 나와 길게 발달이 되어있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시장으로 메고 나가는 농산믈을 보면 거의 모두가 상추와 쑥갓이라 이 사람들은 상추와 쑥갓만 먹고 사나 싶을 정도였다.
아늑한 해변 그리고 어디를 가나 해변을 감싸듯 줄지어 있는 수목들은 차츰 천혜의 낙원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아무리 더워도 그늘진 곳에만 몸을 숨기면 얼굴을 간지럽히는 미풍이 지친 몸을 쉬게 했다.
그러나 "쿵~ 쿵~" "따다다다...."쒸익~" "털 털 털 털.." "부르릉 붕 붕..." 포소리, 총소리, 폭격기 소리, 헬리콥터 소리 그리고 수륙양용차의 소리는 너무나 대조적인 존재였다.
인간이 인간을 도륙하는 아비규환의 현장.
약육강식의 원칙을 어떤 이 지구상의 존재보다도 더 철저히 지켜 역사를 쌓아 온 인간들...
사자떼가 어린 코끼리 새끼를 어미로부터 떨어지게하고 엄마를 찾는 어린 코끼리를 먹이로 삼는 생태계의 비정함은 오히려 솔직한 삶의 논리가 있지마는 인간이 인간을 굴복 시켜야 하는 형태는 실로 상상하기도 힘들고 가늠하기도 힘든 구석이 많다는 것을 나는 경험 했다.
"필요 악" 이라는 전쟁.
우리가 인간 세계에서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먹이가 되지 않고 사슬의 윗부분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남의 얘기 보다는 오히려 침략에 신음했던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되새겨보는 국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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