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35기 구문굉

월남전의 비밀???

머린코341(mc341) 2015. 11. 11. 21:59

월남전의 비밀???


어제는 열심히 고광호 전우와 이기용 전우 그리고 이읍우 전우에게까지 폰을 했다.


까닭은 1968년 5월3일에 있었던 5대대 25중대의 불운했던 블라킹 사건이 아리송해서였다.


내가 쓴 소설 "불꽃처럼"에는 5월 초순경이라고 표현을 했기 때문에 그 날짜의 표현에 대해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적들과 접전을 했던 시간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5대대 25중대의 소총수였던 정금용이라는 해병이 쓴 짧은 소설을 보면 C-레이션을 먹은 후 접전이 있었다는 구절을 내가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당일 내가 소속 되었던 5대대 27중대는 그야말로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데이트가 아니고..

던 아리널을 가는 날이었다.


27중대는 전날 그러니까 5월 2일 저녁 늦게까지 1주일간의 차이나 비치 휴양을 가기 위해 짐을 꾸리기에 한참 바빴었고 아침을 먹자 중대원 모두는 출발을 하기 위해 트럭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늦어도 9시 반쯤에는 올줄 알았던 트럭이 너무 늦어 화기소대장이 직접 알아 보았더니 우리를 이동시킬 트럭 3대 중 1대가 길에서 고장이 나  다른 트럭들도 그 수리를 도우느라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곧 당도할 것이라는 전갈에 그저 희망을 걸고 기다리고 있던 차, 갑자기 화기소대장이 휴가가 취소 되었으니 빨리 짐을 풀고 출동을 해야 한다고 김빠지는 전갈을 했다.


우리는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불평을 했고 내용인 즉슨 미 해병대 블라킹을 나갔던 25중대가 좌초 되어 우리가 빨리 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대원들은 모두 화가 끝까지 치밀었다. 여단에서 맨 꼴지로 그것도 목이 빠지라 기다린 연후 가는 것인데... 그렇게 급하면 특공중가 헬기로 투입이 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들이었다.


결국 첨병 소대로 앞장 선, 내가 지휘하는 1소대는 앞에다 LVT 두대를 세우고 평소보다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25중대를 지원하기 위해 찾아 나섰다.


* 이 대목에서 적들과의 접전 시간이 우리 27중대의 나와 이읍우 전우(당시 2소대장)는 오전이었다고 주장을 하고있고... 당시 25중대 화기 소대장이었던 이기용 전우는 아마 오전 같기도 하다는 입장이고... 당시 25중대 FO였던 고광호 전우와 25중대 소총수였던 해병은 C-레이션을 먹고난 오후라 하고...  ???


* 듣기로... 우리는 25중대가 당하게 된 것은 먼저 적을 발견하고 소대장(36기)이  앞장 서 추격을 했는데 그만 다른 적들의 사격에 의해 이마에 총상을 입고 전사를 했다는 것과 대응 사격을 하던 25중대 대원들은 그곳이 사질토라 다금한 포복으로 말미암아 약실에  모래 먼지가 들어가는 통에 그만 총알이 나가지 않아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대나무와 크게자란 나무들로 당시 5대대가 1967년 8월 대대 전체가 파월이 되면서 가지고 온 무전기 ANPRC-10 이  불통 되는 바람에 더욱 피해가 컸었다는 소문으로 이해를 했다.


오비이락이라고나 할까? 5대대 전 중대는 그 사건 이후부터 M16 소총을 모두 신형 약실로 교체 해 주었고 무전기도 감도가 꽝꽝거리는 PRC-25 로 교체를 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25중대 대원이나 이기용 전우에 따르면... 문제는 당시 접전시 M16이 총알이 안나갔던 일은 없었고 무전기가 불통이 되어 지휘에 지장을 준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이기용 전우의 말을 빌리면 25중대가 당하게 된 것은 여단 작전에서 좌표를 엉터리로 전달 해 불라킹을 엉뚱한 곳에서 했던 것이 문제였다고 했다.


만약 그렇다면 여단 본부에서는 신형 약실의 M16과 무전기를 미해병대로부터 받아 내기 위해 25중대의 사건을 거짓말로 이용을 했던 것은 아닐까??? 실로 수수께끼 같은 얘기라기 보다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약간은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공정식 사령관의 회고록을 보면 실로 우리가 몰랐던 1968년 1월 31일 월남전 구정 공세 때의 얘기가 기록 되어있다.


애긴즉슨  당시는 내가 마악 소대장을 한지 며칠 되지도 않았던 때였는데...


1968년 1월 31일 호이안시가 적들의 손에 넘어 가 우리 MIG 대원 2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그 중 한명은 탈출을 하고 한 명(당시는 남병장이라고 했다)은 실패를 하여 팔에 붕대를 감은 채 적들이 앞장을 세우고 청룡이 있을 만한 곳으로 끌려 다닌다고 했다.


그로부터 2개월 정도가 지난 후 그 남병장은 월남인의 복장을 하고 2대대 본부에 나타났는데..  그의 첫 일성이 "베트콩은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라고 했고 그 뒤로는 그 남병장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말이 돌았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베트콩들이 심리전을 펴고 있다는 것쯤으로 알았고 모두가 잊고 있었던 사실인데....


근간 내가 공정식 사령관의 회고록에서 발견한 것은 그 당사자는 남병장이 아니고 모 중사로 되어 있었고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청룡부대장이었던 김연상 장군이 고심 끝에 만약 그 중사를 돌려 보내주면 몇주간의 베트콩에 대한 추적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정보를 은근히 흘려 결국 그 중사가 돌아올 수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실로 전장에서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위인지 실로 가늠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며 곰곰 생각을 해보면 지금에사 하나 하나 의심가는 일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2013.2월  운몽/ 구문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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