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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南戰 - 특공대를 조직한 강인회 중위

머린코341(mc341) 2016. 10. 8. 23:23

越南戰 - 특공대를 조직한 강인회 중위
 

1968년 1월 30일 공산군 측은 새벽 2시를 기해 구정 휴전 협정을 어기고 전 전선에 걸쳐 대대적인 공세를 취했었다.

 
그런데 휴전을 위반한 그 구정공세 기간 중(1.31) 특공중대의 엄호 하에 목표지역으로 전진해 가고 있던 윤춘웅 대위가 지휘하는 3대대 10중대는 숲과 촌락과 공동묘지 등이 산재해 있는 개활지에서 첨병소대인 1소대가 기습적인 요격을 받게 됨으로써 위급한 상황 하에 직면했다. 즉 개활지를 지나 작은 숲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이르러 첨병분대가 논두렁 위에 경기관총을 올려놓는 순간 돌연 좌우편쪽 숲으로부터 집중사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소대장 박승진 중위를 비롯한 10여 명의 대원이 졸지에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사태가 돌발하자 10중대장 윤춘웅 대위는 1소대 뒤를 따르고 있던 3소대를 투입했으나 공격이 부진하여 후위소대인 2소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2소대 역시 노출된 개활지인데다 사방에서 적탄이 빗발치는 바람에 공격이 부진했고, 설상가상 격으로 대대본부의 81밀리 박격포탄이 중대본부에 떨어지는 바람에 위생하사관 한 명이 참사를 당하는 변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리고 정오경에 이르러 여단본부의 작명에 따라 특공중대가 투입이 되었으나 특공중대 역시 적의 포위망 속에 들어가 초장부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소대의 첨병분대가 요격을 당한 약 100미터 전방의 논두렁 위에는 아군의 경기관총 한 정이 그대로 팽개쳐져 있었고, 논두렁 밑과 그 뒤쪽 무논에는 전사자들의 시체와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상자들이 너절하게 뒹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의 현장에서 한 부상자가 “소대장님 날 구해 줘요~”하고 소리친데 이어 “날 살려달란 말야 이새끼야~”하고 소리치자 얼굴에 파편상을 입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1소대장 박승진 중위는 차마 그 대원의 애원을 외면할 수가 없었던지 한사코 제지하는 전령의 제지를 무릅쓰고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다가 이마를 저격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러하자 중대장은 미 해병대의 엥글리코맨으로 하여금 팬텀기를 요청하여 적진을 공격하게 했으나 10여분 후에 날아온 2대의 팬텀기는 뚜렷한 목표물이 포착되지 않아 2개의 폭탄만 투하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포병관측장교 이우한 중위는 부상병을 구출하기 위해 포대에 백린연막탄을 요청하여 적진 앞을 연막으로 차장한 끝에 그 틈에 일부 부상자들을 끌어낼 수 있게 했고, 중대본부에서는 급히 매드백을 요청하여 그들을 실어 보냈었다.

 
그런데 문제는 주간에 끌어내지 못한 중상자들과 전사자들의 시체를 어떻게 끌어내야 하느냐는 것이었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소대장 강인회 중위는 특공대를 조직했다.

 
“나와 함께 갈 사람은 나오라” 그가 이렇게 말하자 분대장 홍 하사를 비롯한 7명의 대원이 선뜻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소대장은 선임하사관 함태영 중사에게 엄호를 부탁한 다음 시체를 끌어오기 위한 약간의 전선줄을 마련해 가지고 대원들과 함께 은밀하게 기동하여 현장으로 접근 해 갔다.

 
약 30분 후 현장에 이른 그들은 늪이나 다름없는 무논에서 수영을 하듯 허우적거리며 시체와 중상자들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는데, 1소대장 박 중위의 시체를 찾고 있던 2소대장 강인회 중위는 시체 옆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통신병을 발견하고 “소대장의 시체는 내가 끌고 갈테니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라”고 했더니 그 통신병은 “소대장님을 살려주시이소. 소대장님을 두고 우째 가겠십니까”하며 넋두리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 통신병에게 강 중위가 “일어섯!”하고 나즉히 말하자 그는 벌떡 일어났고, 또 “뛰어갓!”하자 그는 발걸음을 떼놓기 시작했으나 일어설 때 빠져 있던 한 쪽 눈앞이 덜렁거리고 있던 그 통신병은 몇 자국도 발걸음을 떠놓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 날 밤 10중대는 늪지대에 쓰러져 있는 전사자와 중상자는 끌고 올 수 있었으나 적진 전방 7~8미터 지점에 놓여 있는 경기관총과 그 옆에 쓰러져 있는 3구의 시체는 끌어오지 못했는데, 그 이튿날 오후(15시경) 전과 3범으로 알려져 있던 양 모 일병이 그를 따라 나선 2명의 대원과 그 일을 해내었다.

 
군 입대 전 사회에서 한 가락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던 그 양 일병은 소대장이 앞장서겠다며 나서자 한사코 소대장을 만류시켜 놓고 아군의 맹렬한 엄호사격 하에 용감하게 달려가 논두렁 위에 놓여 있는 그 LMG를 둘러매고 뛰어 왔고, 그를 수행한 2명의 대원도 시체 한 구씩을 끌고 나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양 일병은 다시 한 번 현장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가장 위험한 곳에 있는 시체 한 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모든 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신으로 달려가 그 시체를 끌고 나오고 있던 양 일병은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쓰러질 듯 움찔했으나 한쪽 손을 복부에 갖다 댄 채 기어이 그 시체를 끌고 나옴으로써 전우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리고 후송되어 갈 때 “소대장님, 저는 살아서 돌아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려고 했으나 그 이상의 운신이 어려웠던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2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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