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엽색영웅 박인수 대위
일찍이 해병대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희대(稀代)의 엽색(獵色) 영웅’이란 악명을 떨쳤던 박인수(朴仁秀)씨 만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년 11월 동국대학 재학 중 해간 3기로 입대하여 육군종합학교를 거쳐 장교로 임관했던 박인수 (경남 김해 출신 1929년생)대위는 대학에 다닐 때부터 놀기를 좋아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었지만 육군헌병학교에 다닐 때(중위) 대구 시내의 캬바레를 석권하며 육군장교들에게 간혹 인심을 썼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해병제1전투단 헌병대장으로 있을 때는 그가 타고 나온 빨간 비상라이트가 켜진 번들번들한 헌병대 차를 LCI나 국일관 등 유명한 댄스홀 앞에 버젓이 세워놓고 군복을 입은 채 춤을 추며 엔조이를 했다고 하며, 그러던 어느날 LCI에서 만나게 된 어느 목사의 딸을 일선부대의 벙커로 납치하다시피하여 약 1주일 간 동거를 한 것이 화근이 되어(소문에 의함) 전투단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3개월간의 휴직처분을 받음과 동시에 헌병대에서 쫓겨나 일선 소총중대(강화중대)장으로 임명이 되었으나 헌병 완장을 착용하고 몰래 서울로 가서 외박을 하는 바람에 한 달도 채 못되어 동기생인 박모 대위와 임무를 교대하고 여단본부(금촌) 본부 중대장으로 가 있던 중 그곳에서도 부대 근처의 아동리에 방을 얻어 놓고 엽색행각을 일삼은 바람에 결국 여단본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54년 6월 12일 파면처분을 당하는 불행을 자초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당시 여단본부 헌병대(장, 고윤석 소령) 조사계 선임하사관으로서 박인수 대위에 대한 조서를 작성했던 이두호씨의 말에 따르면 박인수 대위가 거처할 방을 마련해 놓고 있던 그 아동리에는 6․25 때 하루 아침에 남편을 여읜 과부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대위의 계급으로 파면 처분을 받았던 박인수씨는 헛되어 무너진 자신을 일으켜 세울 작심은 하지 않고 해병대 헌병 대위라고 신분을 사칭하며 현역 장교 시절에 드나들었던 그 일류 댄스홀을 누비며 엽색행각을 지속하던 중 박인수씨와 관계를 맺은 배경이 대단한 모 여대생을 짝사랑한 모 유력 일간신문사의 기자가 앙심을 품고 70여 명에 달하는 여성(주로 여대생)을 농락한 박인수씨의 충격적인 엽색행각을 폭로하게 되자 피해를 입은 송인숙 등 2명의 여대생이 박인수씨를 상대로 혼인을 빙자한 간음죄로 고소를 제기함으로써 마침내 그 진상이 드러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것이며, ‘55년 7월 중순 서울지방법원에서 개정(開庭)된 일심 공판 때는 1만 명 이상의 방청객이 쇄도하는 바람에 기마경관까지 동원되었으나 질서를 유지할 수 가 없이 부득불 공판을 연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일심공판(54. 7. 22)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공무원 신분 사칭에 대해서는 2만환의 벌금부과) 83일 간 구금되어 있던 서울 형무소를 나올 때는 얼마나 인기가 대단했던지 수 많은 교도관들이 형무소 문밖까지 나와 인정스럽게 배웅을 하는 그런 진풍경이 연출되었었다. 그러나 박인수 대위는 일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어 석방이 되었으나 담당 검사의 즉각적인 불복 공소(控訴)로 제2심에선 1년 징역형이 선고되어 복형을 했지만 일심에서 “법은 정숙하고 순결한 여성의 정조만을 보호한다”고 판시(判示)했던 그 권순영(權純永) 판사의 말은 지금도 명언(名言)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편 1년 징역살이를 하고 출옥했던 박인수씨는 그 후 한동안 애타게 그의 출옥을 기다리고 있던 여성팬들(주로 기생들과 마담족들)의 극성스러운 초청으로 전국적인 순회 방문을 하여 뜨거운 환대를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또 일본에서도 내노라하는 마담족들이 몰려 와 그들이 연락처로 정해 놓은 명동에 있는 모 호텔에 진을 치고 박인수씨를 고대하고 있는 바람에 상당기간 동안 그 마담족들과도 접촉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편 그러던 어느 날 박인수씨는 서울 시내에 있는 모 댄스홀에 들렀다가 자기를 알아 본 한 남자 고객이 “당신 아직도 이런 짓 해??” 하고 맥주병을 집어 던져 이마에 상처가 나는 변을 당했는데,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음인지 정확한 시점을 알 수 없으나 인천에서 거주하고 있는 모 여인과 드러나지 않게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전해진 적이 있었고 그러한 소문과 함께 그 배우자가 경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내가 만난 여성 중 처녀는 미용사 이모(23)씨 한 사람 밖에 없었다”고 말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바로 그 미용사일 것이라는 추측이 민감하게 난무했었다.
그리하여 결혼을 하게 된 박인수씨는 인천에 있는 조그마한 자동차 회사의 직원으로 취직한 다음 그 직장을 발판으로 하여 약 10년 간 전국 운수노조 인천시 노조 위원장을 역임하며 운수 노조의 발전과 권익 신장을 위해 이바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고, 또 그 후로는 약 30년 간 동대문 시장에서 아동복 장사를 하는 부인에 대한 외조(外助)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타고난 여복(女福) 탓인지 최근까지 그를 찾는 여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는 소문도 전해지고 있었는데,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대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名人∙奇人傳 第1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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