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2편> - 푸애블로호 남북사건과 극비명령

머린코341(mc341) 2017. 7. 14. 17:06

해외 출전<2편> - 푸애블로호 남북사건과 극비명령


  김신조(金新朝) 등 북한무장간침단(31명)의 청와대 기습사건(1968.1.21)과 동해상의 공해(公海)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미 해준 정보수집함 푸에불로호의 남북사건이 잇따라 발생(1.3)했던 1968년 1월 하순의 한반도는 마치 불이 붙기 시작한 화약고와도 같은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하마터면 청와대가 쑥밭이 될 뻔했던 1.21사태가 발생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나 격분을 했던지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해병사단을 해주(海州)에 상륙시킬 준비를 갖추라는 명령을 내렸고,  자하문 밖에서 들통이 나 격퇴를 당한 그 남파 무장간첩들이 그들의 북상 탈주로를 차단한 아군의 군경 토벌대의 포위망 참담하게 사살되고 있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북한이 돌연 동해상의 공해에 정박해 있는 푸에블로호를 납치하여 원산만(元山灣)으로 끌고 가 억류하자 미국은 83명의 승무원 전원과 함정을 즉각 석방하라는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오카나와에 주둔하는 2개 전투비행대대를 한국으로 급파하는 한편 핵항모 앤터플라이즈호를 동해로 출동시키고 주한 미 8군에 비상령을 내리는 등 일전을 불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깃이다.


  그런데 그러한 소용돌이 속에 해병 제1사단 3연대장 염태복(廉泰福) 대령은 사단장 정광호(鄭光鎬) 소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극비명령을 받았다. 즉 특수작전에 투입될 증강된 1개 중대의 특수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과 변산반도(辺山半島)예 대한 지형정찰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변산반도는 서해 연안(전북 부안군)에 돌출해 있는 반도이다. 명령을 받은 3연대장은 그 임무를 부연대장 김영선 중령(해간 7기)에게 부여했고, 임무를 부여할 때 연대장은 특수부대가 상륙할 상륙해안이 어디란 말은 하지 않고 그 해안 지형이 변산반도와 비슷하기 때문이라고만 했다.


  한데, 임무를 부여 받은 김영선 중령은 극비에 불이라고 한 연대장의 명령을 어기고 오직 한 사람 그와 절친한 사이였던 3연대 1대대장 고임훈 중령에게만은 그 이야기를 털어놓고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필시 특수부대가 투입이 될 상륙해안이 푸에블로호가 억류되어 있는 원산만 일각의 호도반도(虎島半島) 일 것으로 추정하면서 머리를 맞대어 부대편성과 지형정찰 및 훈련과 관련된 의견을 진지하게 교환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영선 중령은 강원도 통천(通川) 출신이고 고임훈 중령(해간 6기)은 함경남도 영흥(永興) 출신인데 이 두 사람이 절친한 사이가 된 배깅에는 김영선 중령이 중위 때부터 소령의 계급으로 진급할 때까지 약 5년 간을 고임훈 중령의 4촌형인 고길훈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근무하는 동안 지근한 거리에서 한솥밥 식구처럼 지내온 그러한 인연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별히 언급해 둘 이야기가 있다. 즉 고임훈 중령은 김영선 중령에게 "너는 처자식도 있고 하니 내가 대신 가겠다"고 한 말이었다. 고 중령의 그러한 말에 김 중령은 "명령을 받은 사람은 난데 그럴 수가 없지 않느냐"고 했으나 투지가 만만했던 고 중령은 자신이 9.28 직후 서울에서 모집한 공군 헌병요원모집에 응시 합격하여 일본에서 특수훈련을 받은 그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사나이답게 한바탕 싸우고 고향 가까운 곳에서 죽겠으니 적당한 시기에 임무교대를 할 수 있도록 상부에 건의하기로 밀약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고임훈씨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미 공군기지에서 4개월 간 특수훈련을 받는 동안 총 150명중 여러 단계의 심사과정을 통해 끝까지 탈락이 되지 않고 자기와 함께 최종적인 심사에 합격했던 23명 중에는 그 후 해병대에 입대했던 이창렬씨(해간 7기)와 후일 서울시장을 역임한 염보현(廉普賢)씨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하며, 그들이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 것은 미 공군의 계획 변동으로 특수작전에 투입되지 않고 대구비행장으로 돌려보내져 해산이 된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고 중령과 머리를 맞대었던 김영선 중령은 주로 이북출신과 사고무친의 고아출신 대원들을 중심으로 인원 편성을 했고, 편성이 끝나는 즉시 5~6명의 지휘관급 장교들과 분대장급 이상의 하사관 등 약 30명의 간부요원을 데리고 지형정찰과 도상실습 등을 위해 육로로 변산반도로 향했다.


  그런데 현지에 당도하여 4~5일 간 야산을 오르내리며 계획했던 임무를 수행했던 김영선 중령은 예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방에서 좁혀지고 있는 감시의 눈초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나타난 위장복 차림의 군인들이 며칠 간이나 머물며 이상한 행동들을 하자 주민들은 혹 간첩이 아닌가해서 경찰서나 군 정보기관에 신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렇게 해서나마 서둘러 도상실습훈련을 마무리했던 김영선 중령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27일(경) 특별기편으로 서울로 가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브리핑을 했는데, 장관실에서 그 브리핑을 경청하고 있던 김 장관은 김 중령이 작전계획 뒷부분의 철수계획을 언급하려고 하자 철수계획을 빼도록 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길로 청와대로 향했으나 청와대에서는 브리핑 계획이 취소되어 보고자료만 두고 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세워졌던 그 극비작전계획은 결국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채 중지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애당초 그 극비명령이 결행할 뜻을 가지고 내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미국은 월남전을 수행하고 있었고, 한국은 그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북한의 남침을 자초할 불장난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염려 때문에 특히 푸에블로호 승무원 석방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미국은 그 극비명령의 실체와 진의 파악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함장 '부처' 중령을 비롯한 82명의 승무원과 피랍당할 때 사살된 승무원의 시체 1구가 판문점을 통해 미국측에 인도된 날짜는 그 해(1968년) 12월 23일이었다. 그리고 그 극비명령을 내린 김성은 국방장관이 1.21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장관직을 사임한 날짜는 1월 28일이었다.


  그 후에 알려진 일이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주석궁(主席宮)을 습격하기 위한 비밀특공대를 조직하여 인친 앞바다의 실미도에서 극비리에 훈련을 시켰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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