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가는 최강해병대(4-4. 도전 극복-의지)
제 4장
挑 戰
제 4절-----도전 극복
4. 의 지( Will )
최고의 찬사를 받았던 지휘관을 비롯한 거의 모든 지휘관들은 영감, 공포, 죄의식 그리고 이성적 추론을 바탕으로 하는 예리한 통찰력 등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지휘하는데 있어 유사한 부분들이 많게된다.
그러나 유사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왜 어떤 지휘관들은 성공하는데 어떤 지휘관들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일까?
성공하는 지휘관이 가지고 있는 것과 실패하는 지휘관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모든 성공한 지휘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어떠한 난관의 도전도 용감히 맞설 수 있는 의지와 이러한 의지를 부하들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는 능력이다.
1951년 3월 8일 영월지구전투에서 해병대 제1연대 3대대 수색 소대장 진투태 소위가 보여준 불굴의 투혼은 해병대 전통수립의 값진 유산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해병대 창설요원으로서 병조장(현 계급 : 원사)계급을 달고 처음 신병 소대장으로 보직된 그는 후리후리한 키에 가냘픈 체격으로 보아 무척 온순하게 보였다.
그러나 외모에서 느끼는 것과 달리 투철한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해병대의 초석이 될 병1기생을 혹독하게 훈련시켜 최강의 해병대원으로 양성하였다.
제주도 공비토벌 작전에서는 신현준 사령관으로부터 '군인중의 군인'이라는 찬사를 받은 그는 장항, 군산지구전투에서 대퇴부에 부상을 입고 적에게 포로가 되어 소속부대에 복귀하지 못하고 행방불명되자 1계급 특진(소위)과 동시에 전사자로 처리되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적진을 탈출하여 3개월만에 원대복귀 하였다.
그후 자신의 묘지를 찾아 하얀색 십자가 푯말이 세워져 있음을 발견하고 먼저 간 전우들이 떠올라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진 소위가 소속된 제1연대는 진해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후 1951년 2월 중순 중동부 전선으로 출동하였다.
이 무렵 적은 국군 제7사단과 수도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인 하진부리 남동쪽의 박지산(1391고지)과 발왕산(1458고지)방면으로 공격을 재개하여 다시 아군의 전선이 위험에 직면하였다.
이에 연대장 김성은 대령은 제2대대는 발왕산을, 제3대대는 박지산 동쪽의 봉산리를 점령토록하여 적의 진출을 차단하였다.
3월 8일 제3대대 수색소대장인 진 소위에게 박지산을 수색하여 적정을 정찰토록 명령이 하달되었다.
진 소위는 1개 수색분대를 이끌고 허리까지 차는 눈길을 뚫고 적을 찾아 나섰다.
얼마 후 수색대는 흰 눈 위에 서 아직 열기가 남아 있는 탄피와 탄약이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평소 침착하였던 그가 오늘따라 이것이 수색대를 함정 속으로 유인하기 위한 미끼인줄 모르고 전진하였다.
잠시 후 사방에서 총성이 들렸고, 진 소위는 "전원 후퇴,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만 하달하고 혼자서 수색대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약 1시간이 경과할 무렵 수색대와 증원부대가 현지에 도착하였다.
이때 흰 눈 위에는 유혈이 낭자하였고, 진 소위는 벌집처럼 적탄에 맞아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웠다.
이때 제3대대 장병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이날이 바로 그가 스물 네번째 맞이한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후일 그에게 1계급(중위)특진이 추서되어 그는 전쟁중에 2계급을 특진하는 해병대의 영웅이 되었다.
장진호 지구 전투시 미해병대 제1사단 Barber대위가 지휘한 F중대는 유담리 통로상에서 최후의 일인,최후의 일각까지 그 소임을 다해 오늘날 우리 해병대에 까지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유담리로부터 하갈우리까지 행군하는데 있어 사단의 주 보급로이자 유일한 접근로인 약 3마일에 걸친 산악도로의 방어 임무를 맡은 Barber 대위는 대원들이 모두 지쳐있었지만 대원들을 독려하며 날이 어두워지기전에 얼어붙은 언덕에 교통호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설치하였다.
연대급 규모의 적병력이 파상적인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아군에게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진지를 포위 하였으나 7시간에 걸친 사투 끝에 Barber 대위는 적의 공격을 어느 정도 저지시키고, 공중보급만 되면 계속해서 진지를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급부대에 진지사수를 허가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증원부대가 고립된 부대와의 접촉을 시도하다 적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실패하자 상급부대는 진지를 포기하고 후방으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지를 포기하면 유담리에 고립된 8,000여명의 해병대원들과 접촉이 단절될 뿐만 아니라 동해안쪽에 위치한 3,000여명의 해병대원들과 합류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부상당하여 걷지 못하는 동료 해병대원들을 데리고 이동하기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또 적이 진지를 확보하게 되면 전장의 우세를 적이 대부분 점하게 되고 아군의 피해가 더더욱 커지게 되므로 그는 부대가 전멸하더라도 끝까지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Barber 대위는 심하게 부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들것에 실려 이리저리 이동하며 부대를 지휘하고 부하들을 독려, 5회의 주간전투와 6회의 야간전투동안 광적인 적을 맞아 필사적인 전투를 계속해나갔다.
영웅적인 Barber 대위의 부대는 혹독한 영하의 날씨속에서 약 1,000여명의 적을 사살하였으나 중대가 구출 되었을때에는 220명의 중대원중에서 그들이 지켜낸 진지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던 해병대원은 겨우 82명 뿐이었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 Barber 대위가 보여준 충성심과 용기, 위대한 감투정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꿋꿋함이 죽음의땅 장진호로부터 사단이 성공적으로 철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와같은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부대를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지휘관이 강인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진호 전투에서 5연대를 지휘한 미 해병대 Murray 중령은 지휘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쇼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친구를 갑자기 잃었을 때 느끼는 쇼크와 같은 것이었다.
내가 가장 먼저 싸워야 할 것은 바로 내 자신이었다.
쇼크로 인한 정신력의 빈공간을 스스로 채워넣어야 했던 것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부대를 하나로 뭉치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해병대 사령관 글 > 22대사령관 전도봉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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