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들의 이야기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머린코341(mc341) 2017. 10. 22. 01:21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 


나금주.   부산 연제구 연제9동


지금으로부터 27년 전 서해의 외딴섬 백령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소청도에서 근무할 때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 됩니다.


민간인들도 몇 가구 살지 않는 작은 섬에서 그 당시 대원들의 유일한 즐거움은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는 것과 위문편지를 싣고 오는 연락선을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일주일에 한 번씩 들어오기에 편지를 많이 받아보는 대원들은 10통 이상씩 받았었고 태풍으로 인해서 배가 늦게 들어올 경우엔 2~30통 받는 대원들도 있었지요.


그런데 대원들 중에서 편지를 적게 받는 대원중에서 제가 5손가락 안에 드는, 나는 한 달에 한통 정도 받을까 말까 하였지요.


그것도 집에서 오는 편지거나 아니면 같이 훈련을 받았던 포항으로 배치된 동기한테서 받는 것이 고작이었지요.


그래도 그 5명 중 네 4명은 제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고참이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입대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쫄병이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는 것이 중대에서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첫 휴가를 받아서 드디어 육지 구경을 하게 생겼는데, 같은 부산에 고향을 둔 다른 소대의 선임이 날보고 휴가가거든 부산의 자기가 치아치료를 해야겠다면서 12만원만 받아오라고 하더군요.


자기 집 주소하고 약도는 며칠 뒤에 만나서 가르쳐 준다고 하면서.


그런데 그 당시 백령도 쪽에 근무하는 대원들은 휴가 받은 날짜보다 배가 들어오는 날짜에 맞춰서 휴가를 출발하기에 기후조건으로 인해서 배가 늦게 들어오거나 하게 되면 부대 내에서 휴가 날을 며칠을 까먹는 경우도 있었지요.


저는 반대로 배가 하루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휴가를 이틀을 벌수 있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내일 만나서 전달 받기로 한 선임집의 주소와 약도를 전달 받을 수가 없는게 문제였지요.


그래서 전화로 고참한테 전화를 하니 고참이  자기집 아래층에 사는 아가씨의 직장 전화번호라면서 불러 주더군요.


왜? 선임집 전화번호를 안주냐고 그러니까 자기 집에는 낮에 전부다 일하러 나가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그 당시는 핸드폰도 삐삐도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줄 알고 휴가를 나와서 부산에 도착했지요.


그땐 휴가기간이 25일 이었었는데, 이 삼 일은 여기저기 친척들 만나서 인사하고 또 친구들 만나서 돌아 다니다보니 훌쩍 지나갔는데 친구들이 학교와 직장으로 간 평일엔 할일이 없어서 선임의 부탁이나 들어주자 싶어서 선임이 불러주었던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거니 그곳이 **일보라는 신문사였는데 그 아가씨의 이름을 대면서 바꿔 달라고 하니 그 아가씨가 본인이라고 하더군요. (사전에 그 아가씨가 나와 같은 나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척 상냥하게 들렸었지요.)


난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전화를 걸게 된 이유를 설명한 뒤에 잠깐 만나서 선임의 집 위치를 가르쳐 달라는 부탁을 했더니 시간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퇴근 후는 어떠냐고 했더니, 퇴근 후에는 영어학원 가야하므로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난 나의 휴가기간이 앞으로 20여일 정도 더 남아 있으니까 그동안 아무 때라도 관계없다고 말을 하니까, 그래도 안 된다면서 전화로 집의 위치를 알려 줄테니까 찾아 가라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알려 준대로 찾아 가서 선임의 어머니를 만나서 돈을 받은 후에 휴가 날이 다되어서 귀대를 한 후에 선임에게 돈을 전해주었는데 고참이,


선임 - “야! 니 그 아가씨 만나 봤나?”

나 - “아뇨, 전화로만 통화하고 위치를 알려줘서 찾아 갔었습니다.”

선임 - “햐아! 이 자식. 내가 그 아가씨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은 니가 한 번 만나보라고 그래서 잘되면 펜팔이나 하라고 알려준 것인데 니한테 편지 오는 것이 하도 없고 해서 말이다.”

나 - “예~?  난 그런 깊은 뜻도 모르고 알겠습니다. 주소 좀 줘 보십시오.”


그래 시도는 해보자는 마음으로 난 선임의 집주소를 받아 적고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혹시라도 몰라서 여성시대의 위력을 잘 알기에 그 아가씨의 이름을 “영애” 라고 바꿔서 부르겠습니다.


첫 편지에 대충, 다른 내용과 함께


“지난번 고참 김**의 부탁으로 집 위치를 물었던 사람입니다. 이곳은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군 생활하는 동안 편지나 교환했으면 합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었지요.


두 번째 편지에는,

“영애씨 그동안 우리 사이가 서먹서먹했던 것 같군요. 그냥 우리 헤어지기로 합시다.” 라는 내용으로 간단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회신은 없었으니까 편지는 받아 보았을 텐데 답장은 없었습니다.


아니 뭐 이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나 라고 했을 지도 모르지요.” ㅎㅎ


세 번 째 편지에는,

“지난번 편지에 내가 못할 말을 했던것 같군요. 영애씨, 우리 다시 한번 잘 해 봅시다.”


ㅎㅎ 언제 시작도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지요. 역시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ㅎㅎ


그때부터 내 보내는 편지엔 번호가 매겨 지기 시작했습니다.


네 번 째 편지에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가 없다는데 지금부터 나의 도끼질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세 번 째 도끼질입니다.”


열 번 째 편지에는,

“이것이 열 번 째 도끼질입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역시 답장은 없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달리 편지를 쓸 상대도 없어서 재미삼아서 편지를 썼었는데 약간의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열한 번 째 편지,

제법 나무가 큰모양입니다. 그래서 열 번의 열 번을 도끼질 해 보겠습니다.


백 번 째의 편지를 써서 보냈지만 답장은 없었습니다. 그 당시 부대 내에서는 서로가 보내거나 온 편지를 서로 읽어보고 할 정도였었는데, 고참들은 날보고 답장도 안 오는 편지 이제 그만 보내라고 말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다 휴가를 맞아 부산으로 와서 예전의 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 “여보세요?”

여자 - “누구신데요?”

나 - “저... 000 해병입니다.”

여자 - “...ㅋㅋ....ㅋㅋ”

나 - “잘 지내시죠? 저 휴가 나왔거든요. 한번 만납시다.”

여자 - “안 되겠는데요, 시간이 없어서”

나 - “오늘이 아니라도 됩니다. 아직 휴가가 20일 정도 남았으니까”

여자 - “그래도 안되겠습니다.”

나 - “좋습니다. 그러면 편지는 되겠습니까?”

여자 - “아뇨. 세상에 많은 여자 중에서 하필이면 나를 택하셨나요?”

나 - “다른 사람 편지는 필요 없습니다.  영애씨 한 사람 것이면 됩니다.

       학교 다닐 때 위문편지 써 보셨지요?”

여자 - “네.”

나 - “그럼 위문편지 쓴다는 기분으로라도 아니 숙제한다는 기분으로라도..기다릴께요.”


그런데 아직까지 영애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던 나는 그 영애와 고등학교 동창인 나의 초등학교 동창집(여학생)에 가서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고등학교때 앨범을 보여 달라고 말을 하고서 앨범을 뒤적여서 얼굴을 확인 했습니다.


그 학교는 중학교 때 반에서 3등 이내에 들어야 갈 수 있는 학교라서 머리가 좋은 것은 누가 말 안 해줘도 알고 있고, 또 키는 고참이 말해줘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초등 동창친구는 내가 찾는 사람이 누구냐고 자꾸만 물어보는데 나는 앨범 속에서 그 아가씨의 얼굴만 확인하고 앨범을 덮어버렸습니다.


무척이나 귀여운 얼굴이었습니다. 내 맘에 쏙 들 정도로.


귀대하는 날 다시 전화를 걸어서,


나 - “나 지금 부대 들어갑니다. 들어가자마자 편지 쓸 겁니다.

       답장 기다릴게요.”

여자 - “ㅎㅎ 편지는 마음대로 하시구요. 군대생활 건강히 잘 하세요.”


자대 복귀 후, 백통을 훨씬 넘게 보낸 뒤에 난 전출을 받아서 진해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또다시 편지 쓰는 일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이틀 만에 답장을 받아 볼 수 있는 거리에 왔는데도 답장은 역시.


이제는 편지를 쓰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리고 가끔 편지내용에 우표값이 없어서 편지를 못 보내느냐면서 봉투 속에 우표, 빈 봉투 그리고 백지로 된 편지지를 넣어서 보내기도 했으며 볼펜이 없어서 그러냐면서 봉투 속에 볼펜을 넣은 편지를 부치기도 했지만 역시 답장은......,


편지는 300통을 넘어 가고 있었지만


어느새 12월 31일, 제대 날이 한 달 남짓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3**째 편지,

“이제 제가 군대 생활을 하면서 편지를 받아 볼 수 있는 날이 한 달 정도 밖에 남지 않았군요. 그동안 내가 보냈던 편지지만 펼쳐 놓아도 축구장보다 넓을텐데, 난 이대로 답장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군복을 벗어야 하나 봅니다. 아~ 허무합니다.”


3**째 편지,

“이것이 제가 군인으로 마지막으로 보내는 편지가 될 것 같군요.

이 편지를 받는 즉시 편지를 보내면 제대하기 전에 답장은 받아 볼 수 있을것 같은데 편지 한통으로서 난 모든 것을 털어 버릴 수 있을텐데........”


12월 28일 눈 내리던 날 저녁, 내무실에서 소대장님께서 열어주신 나의 제대 파티를 하던 중에 먹고 마실 것들이 모자라서 마을에 내려갔던 대원이 내무실로 들어오면서 한손에 하얀 봉투를 흔들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후임 - “나 해병님, 왔습니다!”


우리 대원들 모두 다 내가 편지를 보내는 것과 얽힌 내용들을 거의 알기에 난 직감적으로 그것이 영애씨의 편지란 것을 알았습니다.


난 편지를 들고 온 대원보고

나 - “어이, 김해병! 그것 큰소리로 읽어!”


김해병은 그것을 읽기 시작했고 다 읽은 뒤에 대원들은 박수를 쳤지만, 그때는 드디어 답장을 받았다는 기분 때문에 편지 내용은 내 귓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파티가 끝난 뒤 나는 그 편지를 들고서 일렁거리는 파도가 발아래로 보이는 초소로 내려가 혼자서 다시 편지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편지는 크리스마스 카드였는데 빼곡하게 아주 예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편지 - “근 이년이 넘는 기간 동안 때로는 이상한 문구로 날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고, 때로는 날 웃음지게 만들기도 했으며 가끔은 편지가 기다려지게 만들기도 했던 사연들 보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런 노력과 집념을 가지고 사회생활 하시면 분명히 성공 하실 것입니다. 제대 축하드립니다. 건강하십시오.”


답장 하나로서 모든 것을 잊기로 마음먹었기에 편지를 다 읽고서 난 그 사람의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태워 버렸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연기 속으로 다 날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때일이 생각나 이렇게 살며시 웃음 짓기도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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