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 글/해간 3기 이근식

나는 해병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머린코341(mc341) 2015. 10. 22. 20:08

나는 해병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나의 모든 노력은 해병대를 위함이었다.

나는 나의 23년 간의 해병대 근무 중, 국가시책에 의해 해병대가 해체되어 전역할 때까지 남보다 앞서기 위해 남다른 노력과 함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물론 한국전쟁 중 일선 소대장, 중대장을 하면서 죽음의 순간을 여러번에 걸처 넘기면서 전투 중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그 공훈으로 미국 정부는 나에게 미국 은성무공훈장(U.S.Siver Star Medal)을 수여했다. 그때 해병 제1연대는 미 해병 제1사단의 작전 통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정부로부터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면 과연 나는 누구를 위해, 어느 나라를 위해 전투했단 말인가?



이근식 소위(해간 3기 1951년2월) U.S. Silver Star Medal

이 미국 은성무공훈장(U.S.Silver Star Medal)은 우리, 해간 3기생 중 3명(김익태 소위, 오정근 소위, 및 이근식 소위)에게 "도솔산 전투"의 공훈으로 수여 되었는데 그때 우리는 공격소대장이었다. 이 모든 것은 자타가 인정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해병대 장교 중 도미 유학도 제일 많이 했다. 나의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사령부 요청)에 의해서 이기도 했다. 미국 해병대의 Basic School(1954년). Junior School(1963-4년). 미국 육군 특수전학교(1961년).그리고 우리 해병대에서 최초로 미국 육군 지휘 및 참모 대학(U.S.Army Command & General Staff College) 정규과정(1968-9년)을 졸업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다른 장교들이 하지못한 일도 해냈다. 나는 이런 점에 대해서 남다른 자부심도 아직껏 갖고 있다.

- 목 차-
1. 미 제1군단(집단) 장병들에게 특별 초청 강의
2. 미 육군 특수전학교 입교
3. 육군 공수교육대 입교
4. 한국군 최초로 파월근무(주월 한국군사원조단, 비둘기부대)
5. 국군의 날(1962년10월1일) 수색중대장 임명
6. 해병대 창설기념(1964년4월15일) Memorial Jump
7. 서해 무인도, 무장간첩 침투 예상지역 무장정찰
8. 각군 대항 체력경연대회
9. 나의 회한

* * * * * * * * * * * * *

1. 미 1군단(집단군) 장병들에게 특별 초총강의

제목: 공격 시 보병중대
(The infantry company in the attack)
1958년 3월 7일 미 제1군단(집단군)사령부(Camp Red-cloud), 강당에서 "The infantry company in the attack" 라는 제목으로 50분(영어) 간 미군 장교와 하사관 약 300명에게 특별강의를 한바 있음.


이근식 소령 -1957년3월-

1958년 2월 초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미군측으로부터 미군 위관장교와 준사관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투경험담, 특강( 공격 시 보병중대) 강사요청을 접수하였다. 그 당시 해병대 사령부에서는 미군측의 요청에 통역장교출신인 T 소령(미 해병학교 Junior School 졸업)이 미 해병학교에 유학했고 또 영어도 유창하게 잘 하므로 그를 추천하여 그의 명단을 미군측에 통고했으나 전투 시 소총중대장을 안했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따라서 시일이 촉박한 강의일정으로 인하여 해병대 사령부로부터 긴급지시를 받은 해병 제1사단의 작전참모(고상하 대령)가 그때 한참 일산지역에서 FTX 에 바쁜 해병 제2연대(연대장 김용국 대령) S-2인 나(이근식 소령)에게 연대장을 경유하지도 않고 직접 전화로 통고가 와서 약 10일 간 나는 그 특강 준비에 연대장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서 바쁜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그렇다해서 내가 영어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1954년에 미 해병학교의 Basic School(초등군사반 과정)을 수료했을 뿐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나의 영어 회화실력은 시원치 않았었다. 그래서 염려도 되었으나 이렇게 됬으니 부딪처 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해병대 소령이라는 배짱에서 였다.

이때 교육대상의 중요성에 비추어 강의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달라는 나의 요구에 연대장은 "그 강의는 너 개인의 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시간을 내줄 수 없으니 FTX 에 전념하고 잠자는 시간에 준비하건, 말건 네가 알아서 하라"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나에게 했었다. 나는 이런 연대장의 무식한 소리에 유구무언으로 항의했다.

어쩌면 이것이 나 개인의 일인가? 해병대를 대표해서 한국전쟁 중의 해병들의 전투 실상을 미군 장병들에게 소개하는 귀중한 기회를 "너 개인의 일이니 별도로 도와줄 수 없다"니! 나는 그 연대장의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듣고 아연실색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고 밤에 잠도 안 자다싶이 하고 나의 전투 당일(1951년 6월 7일, "도솔산 전투" 시 #4 목표의 중간 목표, 무명고지 공격)의 생생한 기억에 근거하여 강의록 초안을 만들고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여 고문관실에 보내서 미국식 표현으로 교정을 받은 후 그 내용 전부를 암기해 버렸다.

그때만 해도 나에게는 남다른 암기능력이 있는 것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하고 놀라울 정도 이다. 그 당시는 정말 연대장에 대한 오기로 해낸 것이었다. 그때의 우리의 상관들은 이런 편파적이고 옹졸한 생각들을 갖고 있는 면도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연대로 귀대한 나의 결과보고를 비아냥거리는 듯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연대장은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 없이 "실수한 것 없었어?" 하고 마치 내가 실수할 것을 기대한 듯한 말투로 한 마디 한 것뿐이었다. 나는 그런 연대장의 얼굴에 대고 "기립 박수를 받았습니다."하고 대답했다. 순간 연대장의 얼굴이 이그러진 듯 보였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연대장의 태도였다. 과연 내가 이런 상관을 존경할 수 있었을까?

대신에 강의장소에서 나의 강의를 강당 뒷쪽에서 조심스러히 듣고 있던 사단의 G-3 고문관인 Maj. Jone은 나의 강의가 끝나자 미군들의 우뢰같은 기립 박수 소리 속에서 강단에까지 뛰어올라와서 "Maj. Lee No1" 하면서 나를 포응까지 해주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이런 장면을 보면서 미군들은 "KMC, KMC"하면서 손뼉을 치며 휘파람같은 괴성을 지르기도 했었다.

그란데 해병대의 지휘관은 전혀 무관심했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그것은 이 연대장이 부임 초에 나에게 자기 심복이 될 것을 요구했는데 내가 즉석에서 거절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기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에서 였을 것이다.

이때 내가 얻은 유일한 의외의 소득은 50분 간의 강의내용을 전부 암기한 결과로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의 영어회화 실력이 나도 놀랄 정도로 향상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관의 무관심 속에서도 나는 나대로의 나의 노력의 대가를 얻었으니 나는 그 해병대에 감사해야 했다.

2. 미 육군 특수전학교 입교

1961년 5월 나는 결혼일을 2주일 앞두고 해병대에서 처음 가는 미 육군 특수전 학교에 특수훈련이라 하여 입교 희망자가 없어서 도미유학시험에 응시도 하지 않았는데 사령관 지시로 5일 만에 유학 수속을 마치고 육군 공수단 장교(대대장) 2명과함께 도미유학을 떠난 일도 있다. 이건 순 강제 군사유학이었다.

5.16 군사구테타의 소식은 미국 San Francisco 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Hotel lobby에 있는 신문 판매대에 놓여있는 신문일면에 한국 지도가 크게 보도된 것을 보고 알게 됐다. 물론 결혼식 청첩장도 준비해 놓고 결혼식을 연기했었다.

미 육군 특수전학교(U.S.A. Special Warfare School)



미 육군 특수전학교에서 육군장교(육군 공수단 대대장)와 함께 -1962.6-


미 육군 전략군(101공수사단, 특수전부대,및 82공수사단)사령부

3. 육군 공수교육대 입교

1961년8월 나는 해병대에서 처음으로 미 육군 특수전학교(U.S.Army Spl. Warfare School Ft. Bragg N.C.)에서 소정의 교육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특수전학교의 교재를 번역하여 "反게릴라 작전의 전술과 기술"이라는 '해병대 전술교범'을 사령부 작전국을 통하여 발행했다. 그리고 계속하여 해병 교육기지 및 해병 제1상륙사단(포항)과 해병 제1여단(김포)의 장교들에게 특수전에 관한 순회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해병대에서는 이런 특수전 분야에 대해서는, 내가 특수전과정을 마치고 해병대 예하부대를 순회하면서 교육(Counter Guerilla Operation)했으나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결국 나는 해병대의 필요에 의해서 군사유학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해병대에 배정된 Quota 때문에, 그 Quota를 계속 유지하기 위하여 부랴부랴 군사유학을 강제로 다녀온 셈이 되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외국의 문화와 지식의 획득으로 도움은 되겠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군사예산의 낭비에 지나지 않았다. 이때 나는 해병대 사령부 정보국에 근무하고 있었다.

다음 해,1962년8월 나는 미 육군 특수전학교(Ft. Bragg, N.C.)에서 특수전에 관하여 교육받는 동안 특수전술의 중요성을 재삼 인식하게 되어 그 특수전술의 이행과정에서 필수 요소인 공수낙하 훈련을 받기 위하여 육군 공수교육대에 자원 입교하여 4주 간의 공수낙하 훈련을 받았다. 그 당시만 해도 전군에서 공수낙하 훈련을 이수한 중령급이상의 장교는 공수단장(조문환 대령)과 부단장(중령) 2명뿐이었고 나까지 포함하여 3명이었다. 나의 공식 Jump기록은 43회이다.

나의 공수 낙하 훈련 중 수도방위 사령관(김진위 소장)이 지상 훈련에 한참 바쁜 나를 찾아 왔다. "귀관이 해병대에서 자원해서 공수교육을 받으러 왔다는 해병대 장교인가?"하고 나에게 물었다. "예 해병대 이근식 중령 입니다"하고 대답했더니 "역시 해병대는 다르군. 대육군에서도 공수훈련을 자원해서 받으려 하는 중령이 없는데 해병대 장교가 자원입교하여 교육받고 있다기에 부러워서 어떤 장교인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 왔네" 하면서 나와 악수를 하고 돌아 간 일이 있었다.

그는 역시 대육군의 장군이었다. 장군쯤 되면 비록 내가 타군 장교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관심과 아량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나는 놀라면서도 역시 대육군이라 다르구나 하고 나는 그 육군 장군을 보면서 부럽게 생각했다. "나도 이왕이면 육군으로 갈걸"하고 순간 생각하기도 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해병대 장군은 어떤가?


4. 한국군 최초로 주월(비둘기 부대) 근무

1965년 1월중순 한국군 최초 파월(주월 한국 군사원조단, 비둘기부대) 때도 1년 간의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지 5개월밖에 안됐는데 진해로 해병대 사령부 인사국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 중령, 월남 안가겠어?" 무슨 홍두깨같은 소리인지 나는 이해가 안 갔다. "왜요?"하고 나는 반문했다.

인사국장은 "지금 사령관님(공정식 중장)을 모시고 회의 중인데 월남에 한국군을 파송하는데 해병대에서 중령을 보내게 돼 있어서 인선 중 이 중령이 가장 적임자로 지명됐는데 가겠어?"하고 말했다. "그러면 언제까지 결정해야 합니까?" 하는 나의 질문에 인사국장은 "지금 전화상으로 결정 해"라고 말했다. 이럴 때 독자들은 어떻게 대답했을까?

사실 그때(1965년 초)만 하드라도 월남은 전란의 와중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파월희망자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지명된 자도 기피하고 있었다.

그 당시, 비둘기부대가 Saigon인근의 Di An에 주둔하기 시작한 후부터(1965년 3월 초) MAC-V(주월 미군 사령부)로 격일로, 혹은 매일 업무 연락차 Saigon시내로 갈 때에는 나(J-2)는 Jeep의 뒷좌석에 기관총을 장착하고 또 엽총에 실탄을 장진하고 무릎 위에 얹고 언제든지 사격할 수 있는 자세로 다녔다. Viet cong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출현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약 20km의 거리였으나 도중에 Viet cong의 출몰지역이 있었기 때문에 기관총에는 항상 실탄 을 장진한 상태였다. 이는 보이지 않는 적과의 계속되는 전투였다.

외국으로, 그것도 전쟁 중에 있는 월남으로 가는데 동네집으로 놀러가는 것 같이 지금 당장 결정하라니 정말 이런 것은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가 없다. 이런 처사는 몇년 전 미 육군 특수전학교로 급히 유학 갈 때 보다 더 급한 요구였다. 특히 이런 경우, 외국의 전지로 가는 데 가족하고도 의논할 시간도 필요했으나 나는 그런 시간 여유도 없이 "예 알았습니다"하고 대답하고 다음 날 하루 종일 처와 둘이서 이삿짐을 꾸리고 야간열차를 타고 서울로 이사 온 일도 있다.

이때 나의 처는 내색은 않했지만 속으로는 꽤 나를 원망했을 것은 틀림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1965년2월21일 오산 공군 비행장에서 미군 C-130 수송기편으로 새벽 4시에 한국을 출발하여 당일에 전쟁 중에 있는 월남의 Saigon에 도착한 이후 "비둘기부대(주월 한국 군사원조단)" 의 정보참모로, 전투부대가 파월 되었을 때는 "주월 한국군 사령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고 1966년3월6일에 나의 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사령부 인사국장(이홍균 대령)은 나에게 "무슨 보직이건 원하는대로 발령하겠으니 말해"라고 말했다. 나는 당연히 내가 할 일을 했을뿐인데 특별히 희망하는 보직은 없다고 대답했다. .

주월 한국군 군사원조단
(비둘기 부대)



비둘기부대 환송 국민대회(서울 운동장) 1965.2..9







주월 비둘기 부대 J-2 이근식 중령(1965.2.1-1966.3.6)


비둘기부대 정문


비둘기부대 를 방문한 김성은 국방장관(좌측)과 공정식 해병대 사령관 - 1965.4.15 -


해병대 창설 15주년 기념 회식(1965.4.15)
중앙 비둘기부대장(조문환 준장 좌측 참모장(송택구 대령) 해병 공병중대장(박동규 소령) 카키색복 정보참모(이근식 중령)


해병대 사령관(공정식 중장) 비둘기부대 방문(필자 작업모)






해병 공병중대원들의 Jungle 속 작업현장. 필자 좌측에서 둘째.


해병 제1독립 공병중대 장교들 (중앙이 비둘기부대 정보참모인 팔자)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중장


주월 한국군 사령부 참모장교단 필자 좌측(작업복) - 1965.12 -Saigon-

5. 국군의 날(1962년10월1일)의 수색중대장

1962년 "국군의 날 행사"에 해병 부대의 선두에서 행진할 수색중대의 중대장이 대위인데 중령인 나를 행사 중 수색중대장으로 사령부에서 임명하기도 했다.


"국군의 날"행사 예행 연습 중인 해병 수색중대(필자 선두)- 여의도 공군 비행장-

6. Memorial Jump

1963년4월15일은 해병대 창설 15주년 기념일이었다. 나는 이때 지난해 8월초부터 이곳 미국 해병학교(Junior School Quantico Va.)에 재학 중에 있었는데 한국 해병대 창설 15주년 기념일을 축하하는 기념Jump를 하기위하여 학교본부에 Helicopter지원을 요청했다.

그런데 학교본부에서는 학교 개설이래 외국장교로서는 처음이라면서 쾌히 승낙하고 Helicopter와함께 나와의 동반Jumper로 Maj.Kelly(80년대 초 미 해병대 사령관)를 주선해 주었다. 우리는 학교 훈련장에서 동반하여 1.250feet 상공에서 Jump했는데 이 내용이 학교신문인 Quantico Sentry에 대서특필로 보도되어 많은 미국인들이 알게된 일이 있었다. 이거 역시 한국 해병대를 세계에 소개하기 위한 나의 노력의 일부였다.


해병대 창설 15주년 기념 Jump (1964.4.15) Partner Maj. Kelly( 80년대 초 미 해병대 사령관 됐음.


Jump 직전의 표정

7. 서해의 무인도 무장정찰

1968년 1월 21일 청와대 무장공비 습격사건 직후 서해의 00지점에 무장공비의 상륙 가능성의 정보보고(합참)에 의해 청룡부대 교대병력의 훈련 책임을 맡고 있던 특수교육대장인 나에게 보병연대장들이 3명이나 있었는데 그 지역에 대한 무장수색정찰임무가 부여되어 나는 장교 3명과 수색중대 하사관 6명을 인솔하고 공군의 Helicopter와 함께 해군 함정의 지원하에 그 지역 일대를 눈 속에서 3박4일 간 잠복, 수색정찰한 일도 있다.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


해병 제1상륙사단 특수교육대장 이근식 대령(1966.5-1968.6)
(특수교육대: 파월 청룡부대 인원 훈련)


서해지역 00지점 특별무장수색정찰대(우측 김종세 소령 필자 우측에서 세번째)

8. 각군 대항 체육대회

1970년에는 진해에서 해병대학 총장을 하고있던 나에게 서울, 해병대 사령관실 부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사령관님께서 이 대령님 곧 서울로 올라오라 하십니다". "왜 나를 오라 하시지?"하고 부관에게 물었는데 자기는 그 내용을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나는 다음 날 "CESSNA"(민간상용 4인승)를 타고 서울로 가서 사령관(정광호 대장)을 사령관실에서 만났다. 그런데 사령관은 나에게 "이 대령, 각군 대항 체력경연 대회에서 해병대 팀이 작년에 3등을 했으니 해병대 팀을 잘 훈련시켜서 1등을 시켜봐." 이것이 사령관의 지시사항 전부였다. 나는 이렇게 사령관의 직접지시를 받고 선수들을 1개월 동안 강훈련시켜서 1등을 한 일도 있었다.

이 행사는 연례행사였는데 경기 종목은 100m달리기, 5.000m달리기, 넓이 뛰기, 턱걸이, 수류탄 던지기 및 쌀가마니 메구 뛰기 등 6종목이었다. 이때 나는 선수를 장교를 제외하고 전원을 해병대 야구부선수로 교체시키고 진해에서 1개월 간 강훈련을 시켰다.

그 인원 속에는 김우열 해병(후일에 OB의 야구선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때 바싹 야위어 있었다. 그 대회에서 해병대 팀은 4.500점 만점에 육군 팀에게 8점 차이로 분패했으나 다음 해 다시 훈련시켜서 참가 해 무려 300점 차이로 육군 팀에게 압승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다음 해부터 그 연례행사가 취소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의 나는 이렇게 약국의 감초겪이었다. 물론 나도 피곤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나는 나의 하는 일들에 대해서 항상 보람을 느끼면서 나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엇이 건 최선을 다 했다. 그래서 칭찬을 듣기도 했고 따라서 나는 해병대내에서 유명해 졌다.

9. 나의 회한

그러나 이런 지난 모든 일들을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비록 정부시책에 따라 해병대가 해체되어 전역하게 되었지만 가족에게 정말 미안한 일들이 아닐 수 없다. 나에게는 그런 일들이 어떤 누구보다 많았다. 그러니 가족 생각을 하게되면 미안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 시간을 다시 되돌려 놓을 수 없는데에 나의 더 큰 고민이 있다. 왜 나는 가족을 위하는 생각을 못했을까?

그것은 나는 나의 일에만 너무 치중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가족을 위한 시간배려를 너무나 소흘히 했기 때문이다. 나는 과연 나의 가족을 위해 무엇을 했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서글프고 안타까운 지난 시간들이 아닐 수 없다.

독자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족을 위하며 또한 가족과 함께 하는 후회 없는 삶의 시간으로 살기에 힘쓰고 애쓰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 속에서 이 겨례와 이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 하기를 바란다.

도서부대장 직책은 장군 T/O 임으로 해병대의 돌연한 해체가 없이 거꾸로 됀 해병대 사령관의 보직이 정상적인 사령관 교대로 이루어져 초대 청룡부대장인 이봉출 장군이 해병대 사령관이 되면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 질 수 있었는데 그것이 일 순간에 그 동안의 나의 모든 노력과 함께 무너져 버렸으니, 나는 정말 시운이 없다고 생각하니 허망할 뿐이었다. 이날은 또한 오늘까지 내가 살아온 의미를 잃어 버리는 날이기도 했다.

전역식은 후암동에 있는 해병대 사령부 연병장에서 오전 10시부터 거행되었다. 사령관의 의장대 사열부터 시작하여 식순에 따라 전역식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뭐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전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마음이 벅차고 심란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전역식은 우리의 도저히 풀 수 없는 한을 남기고 15분만에 끝났다.

지금도 그때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 해병대의 무력함에 나는 분통이 터짐을 금할 수가 없다. 과연 우리는 해병대였을까? 허풍대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개병대였을까?

나는 해병대를 떠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그 해병 정신과 그 열정은 항상 그 속에 남아 있을 것을 나는 다시 다짐했다. 나는 지금도 종종 그때의 일들을, 분통이 터졌던 일들을 회상하기도 한다. 그것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미화된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렇지만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쟁이 만일 다시 발발하게 되면 나는 다시 현역복무를 하고 싶다. 육신은 늙었지만 마음은 이전보다 더 강해졌고 슬기로워졌으니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부담도 덜해 졌고 인생이 어떻다하는 것도 깨닫고 알게 되었으며 또한 정신이 육신을 지배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이 나에게는 남다른 나를 위기 때마다 나를 도와주신 하나님을 믿는 信仰이 있기 때문이다.

Silver Star Medal Criteria:




The Silver Star is awarded to a person who, while serving in any capacity with the U.S. Military, is cited for gallantry in action against an enemy of the United States while engaged in military operations involving conflict with an opposing foreign force, or while serving with friendly foreign forces engaged in armed conflict against an opposing armed force in which the United States is not a belligerent party. The required gallantry, while of a lesser degree than that required for award of the Navy Cross, must nevertheless have been performed with marked distinction. Soldiers who received a citation for gallantry in action during World War I may apply to have the citation converted to the Silver Star Meda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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