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창설 19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7) 네바다 주립대학으로 유학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7) 네바다 주립대학으로 유학 1961년 7월 4일, 5·16 군사혁명으로 예편되어 현역에서 물러난 나에게 다음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즉, 육군에서 전역된 세 명의 장군과 내가 미국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경비는 미국 정부측에서 부담(실..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6) 장면 박사와 나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6) 장면 박사와 나 여기서 나는 1952년 11월 부산에서 영세할 때 대부가 되어 주셨던 장면 박사에 대한 회상을 해 보게 된다. 나는 당시 유봉구 신부의 소개로 그 분을 알게 된 뒤, 단지 나의 대부로서만이 아니라 학자이자 지극히 민주주의..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5) 3·15 부정선거와 군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5) 3·15 부정선거와 군부 내가 해병 진해교육기지 사령관으로 재직할 때인 1960년 3월15일, 뒷날 부정선거(不正選擧)로 지탄받았던 정·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당시 국내 정세는 선거를 둘러싸고 몹시도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는데, ..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4)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연수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4)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연수 합동참모본부 근무를 마쳤을 때 나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때 나는 전역(轉役)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라는 생각에서 좀 더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육군참모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절차를 밟았다...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3) 육군대학과 합동참모본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3) 육군대학과 합동참모본부 1953년 10월 15일부터 해병 제1여단장으로서 1년 간 전방 근무를 한 뒤, 나는 김대식(金大植) 장군에게 임무를 인계하였다. 그리고 1954년 11월 1일, 나는 군사학(軍事學)을 재수학(再修學)하기 위하여 진해에 있던 ..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2) 이 대통령과의 특별 면담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2) 이 대통령과의 특별 면담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6·25 동란은 일단 막을 내리였다. 그리고 나는 이해 10월 1일부로 당시 부사령관이었던 김석법(金錫範) 장군에게 해병대 사령관직을 인계하였다. 나와 김석범 장군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1) 미국 해병대 시찰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1) 미국 해병대 시찰 나는 6·25 동란을 통하여 전우가 된 미국 해병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1952년 12월 2일부터 28일까지 약 4주 간에 걸쳐서 미국의 해병대를 시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미 해..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0) 천주교 신자가 되다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10) 천주교 신자가 되다 앞에서도 쓴 바 있듯이, 우리 부부가 천주교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43년 7월, 당시 만주의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내가 아내와 함께 명월구(明月構)에 있는 성당을 처음으로 찾아갔을 때부터였다...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9) 천막 사령부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9) 천막 사령부 본래 독립된 단위의 부대는 전방의 제일선에 나가서 작전을 수행하는 전투 부대와, 이러한 부대를 지원하기 위한 후방 사령부를 설치해서 운영해야 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우리 해병대는 6·25 동란 직후에도 이렇게 ..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8) 장녀 순희의 죽음

老海兵의 回顧錄 - 5. 6·25동란과 해병대의 발전 (8) 장녀 순희의 죽음 내가 북진을 계속하여 함흥 지구 전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아내 혜룡은 아이들을 데리고 수복된 서울의 장충동(獎忠洞)에 임시거처를 정하여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인 11월 22일 아침의 일이었다. 아내 혜룡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