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다섯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머린코341(mc341) 2015. 10. 26. 16:58

【(다섯째 글) 나는 5.16 革命軍 先鋒部隊 小隊長이었다!】


 5 16 혁명 수기 (5) – ‘해병대의 예정된 운명(?)’   


김 피터( 박사, 교수)


(5 16 혁명, 50주년의 해를 맞이하여, 혁명군, 선봉 소재장으로 참가했던 기억을 되새기며,
여기, 그때 무슨 일이 실제로 있었던가 하는 것을 ‘일선 소대장’의 관점에서 적어 봅니다.
이 글은 필자의 동의 없이 ‘전제’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어떤 ‘역전’의 상황이 발생할지 몰라 심히 불안하게 보낸 그 ‘5월 16일’ 의 밤은 지나기고, 17일의 새벽이 밝아왔다.


장교는 전원 집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남산 지역에서의 야영,그리고 밤중에 있언던 몇번의 비상소집 때문에, 별로 잠을 자지 못해, 푸석 푸석해진 얼굴들을 하고, 우리 혁명에 참가했던 해병 장교 전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역시 밤새 한잠도 못 잔 것 같이 보이는 '오 정근/ 대대장과 '김 윤근' 준장이 약간 언덕이 진지역에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 윤근' 장군의 예견(豫見)


"여단장님께 대하여 경례 !”


무슨 대오를 만들어, 열을 지어 선 것도 아니고, 그저 언덕 지역에 자유 자세로 서 있었지만, '오 정근' 대대장의 구령에 맞추어, 우리는 부동자세가 되어, 힘차게 경례를 올려 부쳤다.


그 순간 나는 여단장이나 대대장이 엄한 ‘지휘관’이 아니라, 하나의 ‘전우’라는 친근감이 느껴져 왔다.


여단장은;

“3군 참모총장의 지지 성명이 있었다. '장 도영' 총장이 정식으로 혁명 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제 우리의 혁명 거사는 거의 80% 정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20%가 아직 문제이다.
우리는 이미 목숨을 내 놓고 이 혁명에 참여하였으므로,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치 단결하여 끝까지 싸우자!”

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다.


우리는 모두 누구랄 것 없이 힘차게 박수를 쳤다.
이틀 밤을 거의 자지 못했던 피로도 여단장의 그 격려의 말로 인해 다 사라지는것 같았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김 윤근' 여단장은, 해병대로서는, 오래 기억해 두어야 할, 아주 주요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 해병대가, 국가의 위기를 방관만 할수 없어,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혁명을 일으켰지만, 또 어쩔수 없이 혁명군의 선봉에 섰지만, 이것은 장래에 우리 해병대에 큰 ‘마이너스’로 작용하게도 될 것이다.


지금은 ‘육군 측’이 우리 해병대가 필요해서, 함께 혁명에 손을 잡았지만, 이 혁명이 완수되고, 그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 우리 해병대를 ‘위험 세력’으로 보고 그대로 놔둘 것 같은가?


또 다음 정권이 들어선다고 할 때, 그 정권도, 해병대를 ‘정부 전복을 했던’ 위험한 군대’로 보고, 우리 해병대를 없애려고 할지 모른다. 나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무슨 사심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우리 해병대는 ‘혁명 거사’가 어느정도 완료되었다고 판단되면, 지체없이, 원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서부전선 방어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안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 제1 대대와 부속 중대만 잔류하고, 우선, 여단 본부나 다른 부대에서 차출되어 온 배속부대 인원들은 모두 철수한다.


나 자신은 물론, 나머지 부대들도 속히 원대 복귀할 것이다”


하급 지휘관인 나 같은 소대장은 감히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호소력을 지닌, 여단장의 설명을 듣고, 나는  “아 그는 얼마나 애국심이 투철한 사람인가? 또 얼마나 해병대를 사랑하는 부대장인가?” 큰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해병대의 장래에 대한, 하나의 역사를 내다 볼 줄 아는, ‘혜안’에 대하여, 지금도 나는 감탄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대로, 그 후, 12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박 정희' 정권에 의해, ‘해병대 사령부’는 해체되고, 해병대는 해군의 예하 부대로 전락하여, 그야말로, ‘애비없는 자식같은’, 하나의 ‘찬밥 신세’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군내 위치 여기서 해병대 얘기를 잠깐 짚어 보자.


해병대의 위치는 사실 좀 애매한 면이 있다.


물론 육 해 공 삼군 체제의 군 조직법에 의하면 해병대는 해군으로 분류된다.


나 자신도 ‘해병 간부 학교’에서 10개월의 훈련을 받고 임관될 때, ‘해군 소위’로 임관한다는 국방부 장관 명의의 ‘임관장’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해병대는 마치 하나의 ‘군’처럼 체제가 되어 있었다.


군 대표를 표기할 때 언론은 언제나, ‘육해공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 사령관’으로 언급되곤 했다.


물론 타군 총장과 마찬가지로 해병대 사령관도 4성 장군이었다.


그것은, 우리 한국군이 최초 창설될 때, 미국의 지원을 받아, 미군의 체제를 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해병대의 모든 체계는 거의 미 해병대를 본받은 것이었다.


우선 해병대의 ‘표어’부터가 그렇다. 그 유명한,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라는 표어
 미 해병대의 표어 “Once a marine, always a marine !” 을 번역한 것이다.


또 내가 해병 학교에서 훈련받는 동안, 매일 외친 표어는, “항상 충실한 해병이 되자!’였다.
그것 역시 미 해병대의 ‘SEMPER FIDELIS’(라틴어) 에서 온 것이다.


지금도 미 해병들은 누구나 만나면 ‘SEMPER FI.’ 를 외친다.
그뜻은 ‘Always Faithful’(항상 충실!)이다. 그러면 미군에서, 해병대의 위치는 어떤가?


해군은 원칙적으로 ‘기술병’들이다.
커다란 함정에는 제일 아랫부분, 엔진 실에서부터, 꼭대기 함교(Bridge) 에 이르기까지 모든 요소에 수병, 부사관, 장교들이 다 들어붙어 일을 해야 배가 움직인다.

따라서 해군에는 유사시에 ‘전투 요원’이 따로 필요했다.


특히 과거 돛을 단 ‘범선’(帆船) 운용 시절, 바다에서 ‘해적’과 싸우는 일을 해병이 했다.


해적과의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것은 1800년대 초, 북 아프리카의 ‘트리폴리’ 전투였다.


해적들은 주로 사람들의 ‘목’을 칼로 쳤다. 그래서 해병들은 ‘목’부분에 두꺼운 가죽을 둘렀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지금도 해병대의 정복은 목 부분이, 장병 모두 (넥타이 스타일이 아닌) 목을 두르는
‘칼라’(Standing collar, 속칭, ‘쓰메 에리’)스타일이다.


또한 해군은 각 항구에 ‘기지(基地)’를 운용하는데,그 ‘기지’를 방어하고 경계해야 하는 일도 해병들이 한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의 각국에 나가 있는 ‘기지’ 같은 대사관들, 심지여 백악관등도 해병들이 지키는 일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해병대의 임무는 역시 ‘상륙작전’을 위한 특수 부대로서의 임무이다.


미 해병대는 행정, 보급, 작전에 있어서 해군의 지시를 받지않고 해병대 사령관이 독립적으로 운용한다.

그래서 한국의 해병대도 그 ‘독립적’인 체제를 따랐었다.


그런데, ‘정부’측 특히 육군이 주를 이루는 국방부 레벨에서 볼 때에는, 수(數) 도 얼마 안되는 해병대를 독립적으로 운용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예산 규모로 볼때, 육군 1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사단을 비교하면 해병대가 훨신 예산 비율이 높다.


특히 집권 층의 입장에서 본다면, 5.16 혁명 당시, ‘단독’으로 ‘군사 혁명’을 모의하기도 했고, 또 혁명의 선봉에 섰던 해병대는 아무래도 ‘위험 부담’을 안고 있는 있는 부대이다.


‘예산 절감’, ‘국방 개혁’ 등의 명분을 부처, 결국 해병대는 1973년 그 ‘목’이 날라갔다.
즉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 당한 것이다.


진해의 해병 보급 정비단, 교육단, 그리고 포항의 해병기지 사령부 등 지원 부대들도 다 해체 당했다.


그때, 혹 해병대의 반발을 우려해, 정부는 ‘포항의 해병사단’과 ‘김포의 해병 여단’의 길목인, 대구와 김포에 각각 1개 육군 사단 병력을 배치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집권층의 해병대에 대한 하나의 시각을 엿볼수 있는 조치이다.


그러나, 정말, 해병대 해체가 그 당시 박 대통령의 의중이였는지는, 나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해병대 사령부 ‘해체식’ 1973년 10월 10일 오전 10시, 후암동의 사령부 연병장에서는, ‘해병대 사령부 해체 식’이 거행되었다.


나는 그때 그곳 사령부에 근무했었기 때문에, 그 의식에 참가했었다.


사령관, '이 병문' 대장은, 자기가 해병대의 마지막 사령관이 되는 것을 절통해 하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연설 도중 몇 번이나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거기 도열해 있던 모든 해병 장병들도, 나 자신도, 함께 눈시울을 적셨다.


나의 뇌리에는 그때, 바로 1961년 5월 17일 아침, 남산의 한 언덕에서 우리 해병 혁명군 장교들에게 했던 '김 윤근' 장군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가 지금은 구국 일념으로 혁명에 선봉을 섰지만, 앞으로 들어설 다음 정권은 해병대를 혁명이나 일으키는 ‘위험 군대’로 보고, 해병대를 해체시킬지도 모른다”


그 '김 윤군' 장군의 염려하던 것이 결국 현실로 닥아 온 역사를 나는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 동하' 장군도 해병대를 혁명에 끌어들였던 것을 끝내 후회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역사깊은, 그리고 정들었던, 언덕 지역에 조경이 정말 아담스럽게 보였던, 후암동의 해병대 사령부는 그 문을 닫았다.
5,16 혁명이 일어난지 꼭 12 년째 되는 해였다.


옛말에 ‘토사 구팽’이란 말이 있었던가?
'박'대통령이 그때 해병대를 해체시키면서 하사했다는 ‘2천만원’은 또 무엇이었던가?
(해병대 장병들은, 그후, 스스로 모금을 하여 그 ‘2천만원’에 보태서, 옛 해병대 사령부 자리 한구석에, 해병기념 박물관’을 지었다.)


그때부터 ‘무적 해병’을 자랑하던 해병대 내에는 ‘열등 의식’이 서서히 드리워저 갔다.
결국 지난번 ‘연평도, 북의 도발 공격때 해병대는 그 약점을 여실히 들어내지 않았던가?                            


남산에서  경복궁으로 다시 1961년 5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5월 17일. 당시 미 8군 사령관인 ‘매그루더’ 대장은 ‘박정희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작정하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으며 '장 도영'은 군사 혁명 위원회 의장직을 수락했으면서도,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육군의 가장 큰 주력부대장인 제 1군의 '이 한림' 장군도 예하부대를 출동시켜 ‘반란군’을 진압시키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그외 17일에 전개된 여러가지 상황은 ‘혁명 거사’가 실패할 것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 해병 혁명부대는 남산에 천막을 치고 집결해 있으면서, ‘기동 타격대’로서의 임무에 들어 갔다.


즉 어디서든지 반 혁명군’이 나타나면, 즉시 출동하여 물리친다는 계획이었다.
특히 ‘제 1군’쪽 부대가 서울로 이동 가능한 방면에 정보를 집중시키고 있었다.


16일의 밤처럼, 17일의 밤에도 여러 번 ‘비상소집’ 출동이 있었다.


‘적’으로 예상되는 추력들이 서울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모두 무장을 하고, 추력에 탑승하여, 한참 달리다 보면, 잘못된 정보였다는 것이 판명되어 되돌아오기를 여러 번 하였다.


그런데, 18일이 되면서, ‘혁명 거사’는 어느 정도 성공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대통령 윤보선이 혁명군 측에 ‘호의’를 보였고, 또 가장 문제였던 1군의 '이 한림' 장군이 혁명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


오전 9시경, 우리 해병부대는 다시 이동 명령이 내려, 남산 지역을 떠나 시내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의 추럭 행렬을 향해, 이번에는, 많은 시민들이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닌가?

국민들도 5 16 군사 혁명을 찬동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청 앞 지역을 지날 때, 우리는, 육군 사관 생도들이 ‘혁명 지지 시가 행진’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장교’가 될 젊은이들인 사관 생도들의 혁명지지는 우리들에게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나는, 그때, ‘학업’과 ‘훈련’에 열중해야 할 ‘사관 생도’들까지 거리로 나올 필요가 있는가?


누가 그들을 거리로 끌고 나온것인가?


나는 그때 그 생도들의 모습이 늠늠 하다기 보다 하나의 ‘꼭두각시’처럼 보여, 좀 유쾌하지 않았던 기분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 To be continued No.6ㅡ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