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5.16 혁명군 해병대

머린코341(mc341) 2016. 11. 6. 08:39

5.16 혁명군 해병대


<이 글은,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발간된 박학래 님의 5.16 비사, ‘신의와 배신’ 이란 책 속에서 오로지 백척간두에 선 조국을 건져내기 위하여 구국의 일념 하나로 주사위를 던진 우리 해병대가 직접 관계되는 줄거리만을 발췌하여 요약·정리한 내용입니다.>

 
4.19의거.


학생의 흘린 피는 아무 보람도 없이 무위로 돌아가 버리려는 사태가 연발하였다.


채 피지 못한 채 숨져간 꽃봉오리들, 그들은 흘린 피의 댓가로서 보다 민주화된 사회체제와 정치적 안정을 요구하고 있었으리라.


그들이 흘린 거룩한 피의 흔적이 이래서는 안된다고 국민들은 모두가 마음아파 하였다.

민주당 정부는 의거학생들의 넋을 위로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자유당 시절을 무색케 하는 정치로 혼돈상태를 빚어낸다.


부패와 부정과 무능의 온상일 뿐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 조국은 온통 데모에 날이 밝고 데모에 해가 졌다.

 

 데모사태는 국가의 정치기능을 거의 마비시켰다. 정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4월에 접어들면서 사회상은 날로 참담해 지면서 정치가에는 1년전과 같이 4월19일을 전후해서 또다시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갔다. 급기야 민주당 정권은 4월 위기설에 대비하여 군에게 데모대폭동진압훈련 지시를 하달한다.



6.25전쟁 시 풍전등화 같은 조국을 건져낸 용맹스런 해병대...


그들도 처음에는 4.19 혁명에 의한 민주당의 새로운 질서확립에 커다란 희망을 걸고 있었다.


허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 조국의 현실은 추호의 쇄신기운도 엿볼 수 없었다.


이에 이르자 정의감에 불타는 영관급 장교들은 이 사태를 좌시만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의 혈기는 불처럼 끓어 올랐다. 그들은 구국의 일념으로 혁명 계획에 착수했다.


그리고는 혁명동지를 규합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정훈교육시간에는 혁명의 필요성이 역설되었다.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는 해병대의 혁명기운은 마침내 김윤근 준장이 지도자로 추대되면서 그의 지휘로 혁명의 열기는 더욱 박차를 더해갔다.


그들은 거사일로 해병대 창설기념일인 4월15일을 목표로 삼았다. 중견장교들은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행동계획서를 작성하여 거사 수일을 앞두고 김윤근 준장을 찾아가 그의 결재를 요청했다.


그 때 여단장이던 김윤근 준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육군의 박정희 장군의 혁명계획이 현재 추진되고 있다고 전하면서, 우리의 거사도 육군과 합동으로 추진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어왔다.


해병대 혼자만의 외로운 전투보다는 차라리 육군과 함께하면 성공의 확률도 더욱 높으리라. 동지들은 이에 전폭적으로 찬동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해병대의 4.15혁명계획은 육군과의 합동작전 수행으로 인하여 영원히 보류가 되어 버린다.

이리하여 해병대는 5.16 혁명의 성공을 위하여 육군과 손을 잡고 혁명대열의 일익을 엄숙히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호텔정치와 무능정치로 대표했던 민주당정부와의 정치기상도는 실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무질서함 속에 마수처럼 뻗어오는 북괴의 간첩침략의 위협은 국가의 장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5월12일, 박정희는 주점 ‘경복’ 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이미 김형욱 중령, 김종필 중령, 옥창호 중령, 오치성 대령, 이석제 중령, 유성원 대령 등 육군 쪽 혁명동지의 핵심멤버가 함께 하고 있었다.


출전준비를 마치고 군장검열을 받는 듯 하는 용사들의 표정은 의기로 불타있었다.


드디어 민족사로 가름하여 거족적인 횃불을 드는 날로 5월 16일 3시가 결정되었다.


5월 16일이여, 그대 한국역사에 새로운 장을 장식하는가.


민족을 위하여 분연히 일어난 용감한 용사들의 모습을 기록하라. 5월16일을 거사일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5월14일은 일요일이어서 체포가 요구되는 정부각료들이 주말여행을 떠나버리고 없을 것이며, 5월15일은 장면총리가 제1야전군 창설기념식에 참석하게 됨으로 해서 그가 돌아온 후인 5월 16일이 가장 적합하다는 동지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은 생명을 바친 축배의 잔을 높이 치켜 올렸다.


그날 밤 박정희 소장은 해병대와의 유기적인 연락으로 혁명을 성공리에 이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김동하 해병소장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 자리에는 해병여단장 김윤근 준장도 함께 있었다.


박정희 소장과 해병대 지휘부는 거사일을 앞두고, 최초 공격 개시선으로 염창교를 결정한다. 숨가쁜 시간이 흘러가면서 운명의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신의와 배신(위기일발)


이 땅에서 사라지려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되찾고, 기아선상에서 울부짖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의 횃불이 되며, 보다 나은 국가적 위신을 회복시키기 위해 피를 나눈 혁명 동지들의 혁명계획은 전방과 후방에서 주도 면밀하게 추진되어 갔다.

 

이제는 운명의 날만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오로지 혁명은 실천만이 남아 있었다.


 아, 그러나 혁명완수를 목전에 두고 마지막 단계에서 배반자가 생기리라고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박정희 소장의 영도하에 젊은 영관급 장교들을 주축으로 한 5월16일 새벽의 혁명 계획은 동지들 중, 몇 사람의 배반으로 인하여 실로 커다란 차질을 가져온다.

 

혁명군의 주요 행동대로서 준비된 보병 제30사단 동지들의 배신이 그것이다.


폭풍전야, 그날 밤... 제30사단은 밤 10시에 비상을 걸고 새벽 2시에 출동하도록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혁명계획에 회의를 가지고 있던 전투단장 박상훈 대령과 이갑영 대령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제30사단은 출동에 큰 장애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혁명계획 전반에 걸쳐 결정 적인 위기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박 대령과 이 대령은 이윽고 사단장실의 문을 노크한다.


그리고는 혁명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단장에게 모든 사실을 밀고하는 것이다.


박상훈 대령이 입을 열었다. “


"각하, 오늘 저녁의 훈련은 가상훈련이 아니라, 실은 현 정부를 타도하려는 군사혁명의 일환으로 출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우리사단이 B형 전투단이라고 해서 훈련을 계속해 온 것은 데모군의 폭동진압훈련이 아니라, 이번 혁명에 대비한 훈련이었습니다."


사단장 이상국 준장은 크게 놀라고 당황해 하였다.


 다시 이갑영 대령이 거짓말까지 섞어가며 다음 말을 이어간다.


“각하, 혁명군이 오늘 밤에 사단장님과 제 6관구 사령관 집을 포위하여 두 분과 그 가족들을 사살할 계획으로 있습니다. 그러니 각하께서는 혁명군을 꼭 진압하셔야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이상국 사단장은 치미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단장은 황급히 본부사령에게 지시하여 사단장의 가족을 그의 처갓집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는 차를 몰아 서울지구 방첩대로 직행했다.


사단장은 곧 방첩대장에게 혁명계획의 전모를 소상히 이야기했다.


방첩대장은 즉시 이 사실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거처를 수소문하였다. 쉽게 찾아낼 수 없었다.

 

장도영 장군은 그 때 요정 ‘은성’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방첩대장은 은성에 도착하자마자 곧 장도영 장군에게 쿠데다 계획을 구두로 직접 보고했다.


장도영 장군은 식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방첩대 서울지부로 달려가 혁명진압에 대한 명령을 발하기 시작했다.

 

15일 밤, 10시 40분이었다. 혁명과 반혁명이 바야흐로 심각한 대립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장도영 장군은 혁명군의 일부인 제1공수단의 박치옥 단장에게 전화로 명령을 하달하여, 일체의 훈련을 중단하고 부대를 해산토록 지시하는 한편, 박 대령의 직속상관인 특전감, 장호진 준장을 공수단에 보내 부대를 장악토록 명령을 했다.

 

또한 아무것도 모르고 오직 육군본부에서 발하는 비상훈련인 줄만 알고 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제33사단장에게 지시하여 자신의 육성이외에는 어떠한 명령에도 부대를 이동치 말라고 엄명을 놓았다.


또한 헌병감으로 하여금 헌병을 출동시켜 서울중앙방송국을 경비토록 지시하고, 이상국 사단장에게는 믿을 수 있는 병력을 동원하여 서울시청 일대를 장악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그는 헌병 제7중대장 김석율 대위를 직접 불러 한강 인도교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혁명군을 차단토록 지시했다.

 

이즈음 신당동, 박정희 소장 숙소에 모여있던 혁명동지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전화가 날아 들어왔다.


30사단의 박상훈 대령이 배반하여 혁명계획이 탄로났고, 모든 혁명군 부대가 장도영 장군의 모든 부대 훈련 정지 명령에 의하여 출동이 곤란해 졌다는 6관구 사령부소속의 참모장인 혁명동지 김재춘 대령의 상황보고였다.

 

허를 찔린듯한 느낌, 그러나 결코 여기서 무너질 수 없다. 모두의 얼굴에 비장감이 서린다.


박정희 소장과 혁명동지들은 대기하던 지프차에 분승하여 어둠속으로 차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소장이 혁명을 선두지휘하기 위하여 미리 혁명지휘소로 예정했던 6관구 사령부로 숨가쁘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6관구 사령부는 혁명의 낌새를 아예 알리없는 서종철 사령관이 일찌감치 퇴근하면서 자리를 비운 가운데, 혁명과 반혁명이 혼돈된 극한상황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으로부터 혁명을 저지하라는 잇따른 전화가 걸려 오면서, 이에 따라 부랴부랴 서종철 6관구 사령관의 비상소집령이 하달된다.


6관구 내의 혁명동지 박원빈 중령은 그들의 혁명계획에 시치미를 뗀 체 본부사령 및 제10경비중대 부관에게 지시하여


2개 소대병력을 완전무장시켜 6관구의 3개의 출입문을 경비시키도록 함으로서 사령부는 혁명군과 혁명저지군을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서 철통같은 경비망이 깔렸다.

 

사령부에게는 3개의 출입문을 통해 장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혁명장교들은 혁명을 추진코자 비상소집령에 상관없이 계획된 시간에 의하여 붉게 상기된 얼굴로 찾아 들어왔고, 같은 문으로 6관구 사령관의 비상소집령에 의하여 혁명을 진압시키고자 하얗게 질린 얼굴의 반혁명 장교들이 또한 찾아 들어왔다.


누가 혁명군 장교이며, 누가 반혁명군 장교란 말이냐. 6관구 사령부는 누가 적인지, 누가 우군인지 구별할 수 없는 속에 격앙된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누가 먼저 뒤에서 권총의 불을 뿜어댈 지 모르는 살기등등한 6관구 사령부였다.


때마침 장도영 장군의 지시에 의하여 6관구 내의 혁명군 장교들을 색출,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내려지면서,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이 6관구 사령부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범죄수사대원 70여명을 6관구로 들여보내면서 혁명군 장교들을 체포·문초하려는 기세를 보이자,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어버린 혁명군 장교들의 얼굴은 사색이 돌았다.


계획된 시간이 이미 지났건만, 그들의 지도자 박정희 소장은 아직도 6관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혁명군 장교들은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저마다 권총의 안전핀을 풀었다.

 

이 때였다. 0시를 지나서 15분이었다.


‘2군 사령관 박정희다’ 라는 호통소리가 들리면서 6관구 위병소의 문이 열렸다.


박정희 소장이 도착한 그 시간의 위병소에는 헌병과 위병과 무장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경비하고 있었고, 6관구 사령부 장교 외에는 누구를 막론하고 출입을 시키지 못하도록 6관구 사령관의 엄명이 내려져 있었다.

 

그러나 2군 사령관 박정희 소장의 앞길은 아무도 감히 막지 못했다. 겹겹이 둘러쳐진 철통같은 영문을 긴 헤드라이트를 끌며 유유히 6관구 사령부 내로 들어서는 지프차...


본의 아니게 연금 상태가 되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기를 각오하고 권총을 빼들었던 6관구 내 혁명장교들은 이제 초조와 불안의 극한상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 박정희 장군이냐.


죽음의 골짜기에서 잃어버린 지휘관을 다시 찾은 부하들의 기쁨을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하랴.


박정희 장군은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으로부터 그 동안의 경위를 자세히 보고받는다.


장도영 참모총장의 모든 부대 출동금지 명령과 그로 인하여 혁명군 부대의 운용에도 막대한 차질이 생겼음을...


오랫동안의 무거운 침묵을 깨면서 이윽고 박정희 장군은 입을 열었다.


“수고들 했소. 그런대 김대령, 그렇다면 출동 가능한 부대는 어느 부대가 되겠소?”

“현재로선 공수단과 해병대뿐입니다.”

 

김재춘 대령은 침통한 음성을 감추지 못한 채 망연자실 대답했다.


이 불리한 상황에서 박정희 장군은 어떻게 결정을 내릴 것인가. 혁명동지들의 시선이 일제히 박정희 장군의 얼굴에 멎었다.


자휘관의 말 한마디에 오로지 혁명동지들의 운명이 모두 걸려 있기 때문이다.


“그럼, 됐어.”

 

박정희 장군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그의 표정에는 추호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날, 최후의 한사람까지라도 그 1인이 남아 있는 한, 혁명은 기필코 성취되어야 한다고 격려하던 박정희 소장의 말이 동료들의 뇌리를 혜성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사태는 근본적으로 혁명군에 불리하도록 전개되어 가고 있는 양상이다.


혁명지휘소로 예정한 6관구 사령부는 헌병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혁명군으로 출동을 예정했던 행동부대들은 그들대로 장도영 장군의 출동금지명령과 박정희 장군의 출동명령 사이에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극한적인 혼돈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드디어 박정희 소장의 결단이 내려졌다.

 

“나 지금, 공수단과 해병대를 독려하러 떠나겠어. 남아 있는 장교들은 김재춘 참모장의 지휘를 받으면서 이 6관구를 사수하도록 하시오.”


그리고는 6관구 사령부를 떠나서 김포가도를 향해가는 박정희 장군...

 

박정희 장군이 훌쩍 떠나버린 6관구 사령부는 다시금 혁명장교들을 불안과 초조에 휩싸이게 한다.


6관구를 포위하고 있는 헌병들이 언제 다시 그들의 신변에 위협을 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혁명장교 전원이 6관구를 빠져나와 버리면 이는 지휘본부를 포기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박정희 장군이 다녀간 6관구 사령부는 실로 기대하기 어려웠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서종철 사령관의 비상소집령에 의하여 혁명군을 진압차 6관구로 달려왔던 장교들이 한 무리씩 떼를 지어, 혁명군에 가담함으로서 혁명장교들을 감동시키더니, 그 다음에는 혁명장교들을 체포키 위해 수사관 70여명을 인솔하고 6관구에 들이닥쳤던 이광선 대령이 혁명대열에 자진하여 참여하는 것이다.


이에는 6관구 참모장 김재춘 대령의 설득과 6관구 사령부를 홀연히 들렀던 박정희 장군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서 이미 혁명의 이념을 필연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한편 혁명군 체포를 명받고 출동했던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이 6관구로 들어간 후 소식이 끊어지자 헌병감 조흥만 준장이 직접 6관구에 나타났다.


급기야 6관구 사령부의 주인인 서종철 사령관까지 들이닥쳤다.


혁명동지들은 그들에게 엎드려 협조를 간곡히 요청했다.


두 장군도 혁명이 일어남을 필연적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6관구를 포위하고 있던 헌병들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조흥만, 서종철 두 장군의 든든한 협조 약속까지 받아내는 감격어린 순간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공수단은 언제든지 항공기상에서 야간 침투훈련을 할 수 있는 부대였다.


거사일인 16일의 하루 전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야간훈련을 하고 있었다.


도봉산 훈련부대로 작전명령을 변경하여 15일 낮에 훈련을 실시토록 되어 있었으며, 안성·이천·장호원 훈련부대는 16일 새벽 2시에 여의도 공항에 이륙하여 훈련에 임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15일 밤 10시 30분,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 이하 공수단의 혁명 장교들은 자기네들의 혁명계획이 누설된 것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일 아침 7시까지 일체의 훈련을 중지하고 부대를 장악하라.”


참모총장 장도영 중장으로부터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에게 일체의 출동을 금지하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이어서 박치옥 대령의 직속상관인 특전감 장호진 준장이, 장도영 장군의 특명으로 부대출동을 저지하기 위해 들이닥쳤다.


사실상 박치옥 대령은 장도영 장군의 명령을 거절 할 수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평소에 장도영 장군에게 신임이 두터웠고, 그만큼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깊었던 사이였던 것이다.

 

단장 박치옥 대령과 대대장 김제민 중령은 그야말로 진퇴유곡에 빠져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도영 장군은 쉴 새 없이 출동금지의 확인전화를 걸어왔으며, 한쪽에서는 혁명동지들이 계속해서 출동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혁명의 지휘를 책임진 영관급 장교들의 애매한 태도가 계속되어가자, 차지철 대위 등 피가 끓는 젊은 위관급 장교들은 터지는 분통을 참을 길이 없었다.

 

이때였다, 6관구를 출발한 박정희 소장이 감포가도를 줄곧 달려와 공수단에 도착한 것이다.


“도대체 뭣들 하고 있는거냐, 동지들은 배반할 작정이냐?”


출동지연을 나무라는 박정희 소장의 노한 목소리가 서릿발처럼 꽝꽝 공수단에 울러 퍼졌다.


공수단의 지휘급 혁명장교들은 그제서야 새로이 용기를 가다듬었다.


도봉산에 훈련차 나갔던 병력들이 들어왔다. 부대가 집결되고 서둘러 군장검열이 시작되면서, 드디어 공수단은 혁명계획에 입각하여 늦게나마 출동을 시작했다.

 

그동안 10여 차례나 걸려온 장도영 장군의 출동금지 전화는 끝내는 무산되어 버린다.


그날 밤, 홀연히 공수단에 나타난 박정희 소장은 공수단장 박치옥 대령에게 병력출동을 독촉하고는, 그길로 해병대를 향하여 차를 몰아가는 것이다.

 
혁명거사 목전에서 30사단의 배신,


그로 인한 혁명계획의 탄로, 혁명의 시간은 이미 접어들었건만 지금까지 출동한 혁명군은 어디에도 없다.

 

어쩐지 꼬여가는 듯한 상황에 박정희 소장의 가슴에는 불현듯 외로움과 착잡함이 한순간 밀물처럼 밀려왔다.

 

아, 그러나 한밤중의 김포가도, 저기 저곳에 수백개의 헤드라이트가 줄을 긋고 있었다.


10여 리에 걸친 길고 긴 트럭의 행렬이었다.


혁명군 해병대가 서울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오는 것이었다.

 

박정희 장군의 지프가 멈추어 섰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느낌, 싸늘한 밤공기 속에 박정희 장군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해병대는 육군참모총장의 지휘를 받는 군대가 아니라, 오로지 해병대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군대였던 것이다.

 

또한 육군의 장도영 장군이 직접 해병대와의 통신연락을 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병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15일 밤 11시를 기하여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발한다.


“명일 아침에 적 공수부대에 대한 역습훈련이 있으니 참가부대인 제2연대 1대대에 탄약을 보급하라”

 

이윽고 해병대는 계획대로 밤12시에 부대를 집합시켰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군목인 김광덕 대위로부터 혁명성공의 기원을 받는다.


16일 새벽 1시, 해병대는 선두에 제2중대를, 그리고 후미에는 제5중대를 세운 채 대대장 오정근 중령의 지휘 하에 구국의 일념으로 장도에 올랐다.

 

여단장 김윤근 준장은 탱크부대에 지시하여 새벽4시에 출동토록 명령하고 즉시 차를 달려 부대후미에 따라붙었다.


부대선두가 공격개시선으로 약속된 염창교에 도착했을 때는 예정시간보다 15분이 늦었다.

 

염창교에는 혁명지도자 박정희 소장이 감격스런 표정으로 해병대를 맞이해 주었다.


육군측의 배신으로 혁명군이 불리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김윤근 준장은 박정희 소장과 함께 정면대결로 나아가기를 검토한다.

 

아울러 공수단을 선봉군으로 삼으려 했던 작전계획을 변경하여 해병대를 제1진의 선봉군으로 삼고 공수단은 제2진으로 삼았다.


역사에 찬란히 기록될 1961년 5월 16일 새벽3시, 혁명군 전초부대 해병대가 한강 인도교에 도달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한강물소리만이 밤의 적막을 깨고 있었다. 인도교 너머 저쪽 서울시내는 밤의 전등불들이 조는 듯 아늑히 깜박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한강 인도교 돌파작전을 감행한다.


혁명군 전초부대인 해병여단 제2중대가 인도교를 들어서다 잠시 전진을 멈추었다.


선두차의 승차원이 모두 하차하는가 싶더니, 해병 제2중대장 이준섭 대위가 뚜벅뚜벅 인도교로 나아간다.


옆구리의 권총이 차갑게 마찰되었다.


이준섭 해병 대위는 그곳을 지키고 있던 헌병 제7중대장인 김석율 대위와 악수를 교환하였다.


해병 대위는 헌병 대위에게 혁명군임을 알리고 인도교에 무겁게 내리워진 바리케이드의 철거를 정중히 요청했다.


헌병 대위는 간단히 거절했다.

 

“나는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으로 이곳을 경비하고 있으며 혁명군을 저지시키기 위해 출동했습니다.

불응이면 사격하겠으니 철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에 해병 대위는 발끈했다. 그리고는 소리쳤다.

 

“우리는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를 받는 군대가 아니다.

우리는 해병이다. 우리는 해병대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부대다. 빨리 장애물을 제거하라.”


한치의 양보도 허용치 않는 두 대위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제1선 바리케이드가 인도교 남단에 GMC 2대를 八자형으로 해서 다리를 메우고 헌병 20여명 가량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제2선 바리케이드는 GMC 3대로 역시 八자형을 이루어 인도교 중간을 막고 있었으며 마지막 보루인 제3선 바리케이드 역시 GMC 2대로 八자형을 이루고 있었다.

 

한강도하가 저지된 것을 확인한 해병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전 해병에게 하차명령을 발했다.


헌병들이 길을 막는다면 그들과 총격전을 벌리는 한이 있어도 혁명은 기필코 완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어차피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라고 오정근 중령은 판단했다.


병력들이 GMC에서 하차한 것과 한강에 주둔했던 헌병들의 사격과 어느 것이 앞서 일어난 행동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헌병들의 위협사격이 시작되었고 하차한 해병들은 한강 인도교 저편에 빠른 동작으로 산개했다.


선두차에 탔던 해병 제2중대 병사들의 포복이 시작되었다.


탄우를 뚫고 포복하는 병사들의 모습은 생과 사를 초월한 것이었다.


제1선의 바리케이드가 그들의 손으로 제거되었다.


총탄은 밤하늘에 빨간 여운을 길게 그리며 빗발처럼 옆을 스쳐갔다.


해병들은 이제 제2선 바리케이드 제거를 위해 인도교의 난간을 따라 포복을 계속했다.


제2선 바리케이드도 무너졌다. 전투는 점점 본격화되었다.


서로간의 위협사격이 어느새 무차별 사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제3선 바리케이드를 향해 용사들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제3선 바리케이드에서 낮처럼 밝은 헤드라이트가 비쳐왔다.


제3선 바리케이드에서 헌병 40여명 가량의 무차별 사격이 가해오고 있는 것이다.


해병들은 장애물에 막히면서도 좁은 난간을 따라 계속 포복을 하여간다.


혁명군 쪽의 지원사격도 가열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다시한번 6.25의 전상을 되씹고 있는 것이다.


해병들과 헌병들의 치열한 사격전은 혁명군으로 하여금 많은 시간을 인도교에서 머물게 했다.


마지막 보루인 제3선 바리게이트를 눈앞에 두고, 작열하는 총성속에 전진하던 해병 제2중대에 부상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대장 이준섭 대위를 비롯해 7, 8명의 사병이 총상을 입었다.


완강한 헌병들의 저지사격은 해병 제2중대에 예기치 않았던 총격전과 부상자를 내게 하면서, 혁명군의 전진을 지체케 하고 있었다.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제1중대로 하여금 제2중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선두에 나가도록 명령했다.

 

이제 제2중대는 뒤로 서고 정비된 제1중대가 앞에 섰다.


치열한 응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제3선 바리게이트 GMC헤드라이트가 해병들의 직격탄에 파열되면서, 인도교는 다시 암흑의 세계로 변하였고 그제서야 헌병들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한강 인도교는 혁명군의 전진을 거의 1시간 동안이나 묶어놓고 있었다.


실로 길고 긴 시간이었고, 참으로 길고 긴 인도교였다.


헌병들이 물러가고 제3선 바리게이트가 철거되면서 이윽고 해병들과 그 뒤를 이어 공수단 병력들이 한강을 도하한다.


한강 인도교에서 해병들과 헌병들이 치열한 교전을 벌이고 있을 때, 그 지역을 담당하던 용산경찰서는 새벽 3시의 총성을 단순한 오발사건으로 생각해 버렸다.


관내 파출소에 연락해 보았으나 장소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총소리가 연방 계속해서 울리자 시민들의 문의전화가 용산서로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답답한 것은 시민보다 담당자인 경찰측이 더 했었다.

 

3시 40분쯤 북한강파출소로부터 해병들이 육군헌병들과 충돌하여 인도교를 포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가 전해왔다.


그러나 용산서는 이것도 단순한 충돌사고로 생각했다.


3시 50분쯤 잠을 자다가 유탄을 맞고 부상당한 신계동의 한 주민이 차에 실려 왔을 때 용산서는 그제야 당황하기 시작했다.

 

4시가 약간 지나서 해병대가 경찰서 문을 들어설 때까지도 그들은 상부로부터 하등의 지시도 받지 못했다.

 

당황한 일부 경찰관은 줄행랑을 놓았고 적대행위를 하던 경찰관은 모두 연금되었다.


이제 해병대와 공수단은 인도교를 건넜다.


캄캄한 밤, 장도영 장군의 명령에 따르는 진압군의 공격이 언제 어디서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어차피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 혁명군들은 앞에총의 자세로 긴장감 속에 한발 한발 서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한강로를 지나갔다. 삼각지에 이르렀다.


그 곳에서 혁명군들은 무장한 정체불명의 수많은 군인들이 어두움 속에 길 양편으로 도열해 있음을 발견한다.

 

그들의 손에는 M1소총이 쥐어져 있었고 밤하늘에 희끗희끗 번쩍이는 대검들이 꽂혀 있었다.

 

일순간 진격하던 해병들이 주춤했다.


적인가 아군인가, 식별이 되지 않는 군대이다.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는다면 적일 뿐이다.


해병들은 충혈된 눈을 치켜뜨고 그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아, 그들은 적이 아니었다.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군대는 혁명계획에 입각하여 미리 육군본부 광장에 스며들었던 제6군단의 포병단이었다.

 

그들은 인도교의 교전으로 인하여 늦게 진입해 들어오는 혁명군을 따뜻하게 환영하고 있었다.


삼각지에서 조우한 혁명군들의 표정에는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선의의 미소가 감돌았다. 그들은 모두 “시내는 조용하니 차를 타고 가라.”고 외쳐 주었다.

 

6군단 포병단의 따뜻한 환영을 받은 해병대와 공수단은 시가전의 위험이 없음을 알자 곧장 차에 올랐다.


한강 인도교의 격전으로 말미암아 늦어진 계획시간의 차질을 메꾸어야 했다.


박정희 장군은 손수 공수단 1개소대를 이끌고 남산 중앙방송국으로 달렸다.


해병대와 공수단 주력부대는 서울역 방향으로 달렸다.

 

서울역 앞에는 약간의 경찰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혁명군의 적수가 아니었다.


가볍게 그들을 격퇴시킨 혁명군은 이제 그들이 맡은 목표지점을 향해 힘차게 GMC의 페달을 밟는 것이다.


해병대는 치안국과 시경이 그 점령목표였다.


치안국 점령을 명받은 해병 제3중대와 제6중대는 4시 30분경 치안국을 완전히 포위했다.


중대장의 발포를 신호로 일제히 담을 넘어 뛰어 들어갔다.


개머리판을 옆구리에 댄 체 구부려쏴 자세로 밀려들어오는 해병들......

 

이 광경을 본 내무부 차관 및 각 과장들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놓았다.


시경은 해병 제1중대와 제5중대의 담당이었다.


별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그대로 접수되었다.


지하실에 숨어있던 경관들이 스스로 총을 버린 채 걸어 나왔다.


여세를 몰아 해병 1개 소대는 시청을 지나 중앙전신국으로 달렸다.


유선망의 운용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전원실의 퓨즈가 해병대 장교에 의해 절단되었다.


야간근무를 하던 여자 교환수들은 놀라서 토끼처럼 뛰었다.


그녀들은 처음에는 공산반란군의 침입으로 오인하고 무척 당황해하였다.


하지만 해병대 장교의 설명으로 비로소 혁명군임을 알고 안심을 하는 것이었다.

 

공수단 일개소대는 박정희 소장과 함께 방송국을 점령코자 출발했으며, 또 일개소대는 혁명공약, 선언문 등을 인쇄하고 있던 광명인쇄소에 급파되어 경비임무를 담당했다.

 

이곳에는 김종필 중령 등이 돌아가는 윤전기를 독려하고 있었다.


그 외 공수단 주력은 시청 앞에 그 지휘본부를 두고 반도호텔을 점령하고 장면총리 이하 정부요인 체포의 임무에 당해 있었다.

 

행동대는 반도호텔로 직행하고 병력의 일부는 장면 총리의 퇴로차단과 광화문과 미 대사관 주변에 잠복했다.

그러나 반도호텔 808호실은 텅 비어있었다.


혁명군 도착 15분 전에 이미 장 총리 부부는 호텔 동쪽 문을 빠져나와 미 대사관을 거쳐 혜화동 방향으로 도주한 뒤였다.


반도호텔을 포위하고 있던 공수단은 장면총리를 놓쳤으나, 혁명급보를 듣고 장면 총리를 만나러 반도호텔로 달려온 현석호 국방장관과 한통숙 체신부장관 및 김업 국방부 사무차관 등 정부요인을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또한 공수단 1개 소대를 이끌고 중앙방송국을 접수한 박정희 장군은 공산반란군으로 착각하고 도망쳐버린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찾느라고 고생을 했다.


원래 중앙방송국에는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시로 헌병 60명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장군 일행이 도착하기 10분전, 그러니까 4시 20분경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취를 감춰버린 아나운서와 기술자들을 우여곡절 속에 겨우 찾아내면서 그들은 예정대로 새벽 5시에 가까스로 혁명의 방송을 내어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혁명의 소리는 그 순간에도 혁명을 반대하고 있는 장도영 장군의 이름으로 울려 퍼졌다.

 

친애하는 애국 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오늘 아침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군부가 궐기한 것은 부패하고 무능한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들에게 이 이상 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맡겨 둘 수 없다고 단정하고 백척간두에서 방황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군사 혁명위원회는,

첫째,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할 것입니다.

 

둘째,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 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입니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입니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추겠습니다.

 

애국 동포 여러분! 여러분은 본 군사혁명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동요 없이 각인의 직장과 생업을 평상과 다름없이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이 순간부터 우리들의 희망에 의한 새롭고 힘찬 역사가 창조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단결과 인내와 용기와 전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감격어린 혁명 제 1성이 전파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졌다.

육군항공학교장 이원엽 대령이 여의도 공항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이 대령의 지시로 몰래 상경한 교관조종사 5명이 대기하고 있었고 그들은 이 대령의 지시대로 기꺼이 하늘에 떠서 새벽의 서울거리에 10만장의 혁명전단을 살포했다.

 

5월 16일의 아침은 몹시 흐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19는 저공비행을 감행하면서 혁명군의 사기를 북돋우는 시위편대로 힘차게 하늘을 날아서 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