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2) - 해군과의 인연

머린코341(mc341) 2014. 9. 10. 21:09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2) - 해군과의 인연

 

 

내가 해군과 연을 맺게 된 것은 순전히 지역적 영향이다. 군항도시 진해 가까운 곳에서 학교를 다닌 탓에 자연히 해군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192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마산 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마산은 진해와 이웃한 해양도시다. 연안항로의 중요 거점이고 큰 어항을 가진 이 지역 사람들의 관심사는 주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학생들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업이 어업·해운업 등 바다와 관련된 일이었다. 농촌 출신인 나도 그런 환경 때문에 자연히 바다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여서 주로 해전 양상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전함과 미국의 항공모함 중 어느 편이 셀까? 일본이 과연 남태평양의 그 많은 점령지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이 해군·해병대에 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43년 12월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나에게 징병소집 영장이 날아왔다.

언제 전쟁터로 붙잡혀갈지 모를 불안한 나날이 시작됐다. 고향 친구들 가운데는 벌써 징병에 끌려가 전사한 사람도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패망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일제는 조선인을 전쟁에 끌어가기 시작했다. 청장년들을 징병·징용·노동보국대로 끌고 갔고, 젊은 여자들은 정신대 위안부로 잡아 갔다.

농촌 사람들은 정신대가 무서워 어린 딸들을 결혼시켜 유부녀로 만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고 사냥하듯 젊은 여자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식량을 강제로 공출해 전쟁터로 실어갔고, 숟가락·밥그릇까지 전쟁물자 자원이라고 빼앗아 갔다. 초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송진을 채취해 모아 가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과달카날·사보이 해전과 이오지마·오키나와 상륙작전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 해군의 위용과 해병대의 용맹성이 비밀스러운 화제가 됐다. 그런 중에 광복을 맞이했다.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때의 기분을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문장력이 좋지 않은 나로서는 “그저 좋기만 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들뜬 기분으로 달이 가고 해가 바뀌었을 때 펄쩍 뛸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1946년 정초였다. 부산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을 때였는데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이 해군병학교 학생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신문에 광고가 났다는 소문이 돌더니 머지않아 거리에 벽보가 나붙었다.

되찾은 내 나라 바다를 지키는 임무도 근사한데 장교가 되면 미국 유학도 보내 준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있나 싶었다. 며칠 안 있어 그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강연회가 열린다고 했다. 시간에 맞춰 부산역 광장에 달려갔다. 손원일제독을 도와 해방병단을 창설한 정긍모(제3대 해군참모총장 역임) 제독이 마이크를 잡고 광장을 오가는 군중들에게 애국심을 호소하고 있었다.

해군병학교는 이름처럼 병사를 양성하는 학교가 아니라 장교를 양성하는 학교이며, 정부가 수립되면 정규 사관학교가 된다는 것, 졸업 후 미국 유학을 갈 수 있다는 소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즉각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러 갔다. 시험은 서울·부산에서 동시에 시행됐는데 전국에서 900여 명이 지원했다고 했다.

합격자는 90명이었다. 10대1의 경쟁을 통과한 합격자들은 해방병단총사령부 구내에 개설된 학교에 모였다. 개교식은 1946년 2월 8일 거행됐다. 해방병단 창설 유공자와 병사 가운데 편입시험을 통해 합격한 23명이 학기 초에 합류해 1기생 수는 113명으로 늘어났다.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