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글/6대사령관 공정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 - 해군사관학교 시절

머린코341(mc341) 2014. 9. 10. 21:15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3) - 해군사관학교 시절

 

해군사관학교 1기생 시절의 공정식 생도

 

이해를 돕기 위해 ‘해방병단’이니 ‘해군병학교’니 하는 낯선 명칭에 대해 간단히 언급해 둬야 하겠다. 해방병단이란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손원일 제독이 광복 후 주머니를 털어 만든 사설군사단체였다.

이것이 조선해안경비대로 발전했다가 정부수립 후 탄생한 대한민국 해군의 모체가 됐다. 해군병학교란 메이지 초기 일본의 해군사관학교 명칭이었다. 손제독은 1945년 11월 11일 해방병단 창설과 함께 해군사관학교 창설을 서둘렀다. 무엇보다 신생조국의 해군장교 양성이 시급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병단창설 1개월여가 지난 12월 중순, 그는 간부들에게 사관후보생 모집공고를 내도록 지시했다.

내가 부산에서 그 벽보를 본 것이 1946년 1월이었으니 잘못했으면 응모도 못 해 보고 모집이 끝날 뻔했다.

 

해군장교 양성 시급, 해사 창설

 

해군병학교는 1946년 1월 16일 창설됐다. 미군정청 지원으로 진해항 옛 일본 해군기지 항무부 건물에 문패를 달았지만 워낙 급조된 교육기관이어서 초창기에는 학교라고 말하기 거북한 면모였다.

 

창고 같은 외관이 부끄러웠던 것일까. 며칠 지난 1월 22일 지금의 해군군수사령부 본청 지역에 자리 잡았던 해방병단총사령부 구내로 교사가 이전됐다.새 교사는 항무부 건물보다는 좀 나았다. 그러나 보급창으로 쓰이던 일본식 목조건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해군병학교라는 이름은 일제 잔재다. 해군사관학교라는 말을 쓰지 못 하던 시대, 광복의 기쁨과 열광이 식지 않은 군정시대 초기에 패전국이 쓰던 이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이 딱하기만 하다. 그러나 우리 군 역사상 제일 먼저 창설된 사관학교라는 점에서 나는 무한한 자부심과 애착을 느낀다. 일제로부터 막 독립해 나라를 만들어 가던 시대, 맨주먹에 뜨거운 가슴만으로 부딪친 젊은 날의 추억이 올올이 배어 있는 곳이다.

해군병학교란 일본이 메이지 유신 단행 5년 만인 1869년 해군장교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관 양성학교의 정식명칭이었다. 일제가 건립한 시설물에서 일제가 두고 간 보급품을 이용해 미국이 지원하는 교육과 훈련을 받으면서 우리는 언제쯤 번듯한 시설과 환경을 갖게 될지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보급품 대부분은 일제가 경황없이 쫓겨 가느라고 두고 간 것들이었다. 생도 제복은 엉뚱하게도 옛 일본 해군 항공소년병들을 위한 것이어서 우리들 몸에는 잘 맞지 않았다. ‘요카렌’(豫科練)이라 불리던 해군소년항공학교 예과연습생 제복은 나처럼 체격이 큰 사람들에게는 너무 작아서 단을 내고 단추를 늘여 달아야 했다. 창고에서 찾아낸 것이 그뿐이었으니 달리 방도가 없는 일이었다.

 

훈련복은 일본 육군 전투복이었다. 모자는 모표도 계급표시도 없는 일본 해군 것에 육군 군화를 신었다.

우리는 늘 배가 고팠다. 그 시절은 다른 분야 종사자도 다 그랬다. 아직 정부가 수립되지 않아 군대 대접을 받지 못 하던 초창기에는 예산이 없었다. 보급계니 군수과니 하는 조직도 없던 시절이다. 진해 시내 옛 일본군 창고를 뒤져 먹을 것이면 닥치는 대로 실어왔다.

한창 먹성이 좋은 나이에 콩가루·밀가루 죽을 먹고 고된 훈련을 견디기는 어려웠다. 저녁식사는 딱딱하게 굳은 빵조각이 나왔는데 그나마 너무 부족해 우리의 신경은 온통 먹을 것에 집중됐다. 한동안 간식으로 나오던 건빵이 끊긴 뒤로는 주린 배를 참지 못한 생도들이 취사반을 습격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해방병단사령부 취사반 요원은 몇 안 됐다. 간부들이 잠든 한밤중 생도들이 떼 지어 몰려가 남은 음식에 손을 대도 어쩔 방도가 없었다.

 

그렇게 허기를 채우는 생도들이 늘어나자 취침점호 이후의 일상 행사처럼 굳어져 말썽이 난 뒤로는 자제하게 됐다.


가르치고 배우는 열성 대단

 

창고를 개조한 낡고 좁은 교실, 옷도 신발도 모자도 모두 일본이 남기고 간 것을 활용하는 초라한 사관학교였다. 그러나 가르치고 배우는 열성만은 대단했다.

 

1946년 6월 15일 해방병단이 조선해안경비대로 바뀌고, 학교 이름도 해안경비대사관학교로 바뀌면서 생도들은 더욱 자부심을 갖게 됐다.

교수진은 일반 교수들과 현역 교관들로 구성됐다. 일반 교수는 해양대학 같은 일반 대학 교수들이 초빙됐고, 현역 교관단은 주로 해방병단 창설자들과 미군장교들이었다. 한동안 교장을 겸임했던 손원일 제독과 2대 교장을 역임한 김일병 부위(중위) 수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입학 전부터 손제독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던 생도들은 첫 시간부터 그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면 때려치울 생각으로 손제독을 시험하려는 심보를 가진 생도들도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

그가 맡은 과목은 항해술이었다. 잘 생기고 체격 좋은 30대 신사가 영어 원서 교재를 펴 놓고 자기나침의(Magnetic compass)를 설명하기 시작하자 교실 안은 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유창한 영어발음에 우렁찬 목소리까지 흠잡을 데 없는 명강이었다.

김교장은 중국의 명문 난징(南京)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지린(吉林)성 제일사범학교 교사 경력을 가진 그의 영어실력은 경쟁자가 없을 정도라고 했다.


생도들의 피앙세, 홍은혜 여사

 

또 한 사람 잊지 못할 분은 음악 담당 홍은혜 여사였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목소리도 곱고, 품위 있는 젊은 여인이 군대사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 그 한 가지만으로도 홍여사의 존재는 파격이었다. 그런데 그가 손제독의 부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로 홍여사는 단번에 생도들의 선생님이고 누나이자 이모·고모가 됐다.

홍여사는 무보직 교수였다.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에서 음악을 공부한 그녀는 교양과목인 음악과목을 전담하고 있었는데 손제독이 정식 발령을 내 주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적(籍)이 없는 교수였다.

“여보, 저 생도들이 부르는 노래는 일본 곡 아닌가요?”

 

어느 날 통제부 관사 창을 열고 생도들 행군을 바라보던 홍여사가 손제독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아니겠는가. 일본군가 곡에 <조선해안경비대가>로 가사만 갈아 끼운 노래였다.

 

아내의 말을 듣고 비로소 정신이 든 손제독은 그 길로 우리 군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스스로 가사를 지어 아내에게 곡을 부탁할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첫 해군 군가가 지금도 널리 불리는 <바다로 가자>이다.

(1절)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 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후렴)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젊은 날 내 몸속에 끓던 피가 다시 솟구쳐 오르는 기분을 느낀다. 가사도 곡도 이보다 더 적절하게 해군을 표현한 노래는 없을 것이다.

 

해군사관학교 교가도 홍여사 작품이다. 1947년 김교장이 노산 이은상 시인에게 작사를 의뢰한 사실을 알고 홍여사는 마산 친정 나들이를 핑계로 바닷가를 찾아가 악상을 다듬어 작곡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오고 있다.

 

초창기 해군사관학교 교과목은 지금의 학사 과정에 비춰도 크게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국어·영어·국사·대수·물리 같은 교양 공통과목에, 군사·통신·항해·기관·군법·지정학·해병학 같은 전문과목도 공통 필수과목이었다.

병과(항해)·기관과·통신과 등 3개 학과별로 이수과목이 각각 달랐으며, 여러 가지 스포츠를 통해 체력단련과 협동정신을 연마했다. 연극반·문학반·악기반까지 둬 정서교육에 신경을 썼으니 교육자로서의 손원일 제독의 면모를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회고록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