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군 글/해간 7기 오윤진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필승의 정신인 해병대

머린코341(mc341) 2015. 1. 7. 15:43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필승의 정신인 해병대

 

만약 내가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면 너희들은 나를 쏴라.

너희가 비겁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쏠 것이다.”

취재 : 발행인 신동설

 

<월남전 당시 영국군 부대 사열하는 모습>

 

12라는 숫자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12라는 숫자는 완전이나 조화구원을 의미한다고 들었습니다. 동양에서는 12간지를 들어 세월의 순환을 상징하였고 천체물리도 12달 또는 12시간 단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윤진 장군님은 금년이 해병대에 입대하여 60년이 되는 해이고, 125번째 순환을 하고 있는 60년째이기도 합니다. 해병대신문은 창간 6개월을 맞아 제12호를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장군님의 해병대정신과 해병대신문이 추구하는 발행취지는 같은 목표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런 깊은 의미를 오늘의 인터뷰에서 같이 조명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입대 전에는 무엇을 하셨습니까?

 

나는 평양전문학교(평양상고전신)를 나오고 서울로 공부를 하려고 단신 월남했지요. 서울대 법대를 시험 보려 하니까 졸업증명이 있어야 하는데 공산당을 피하여 내려온 사람이 그런 것 생각했겠습니까. 결국은 졸업했다는 증명이 없어서 시험 볼 자격이 없었는데 입학시험에서 1등을 하면 졸업한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시험을 봤지만 1등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등록금이 적은 홍익대에 들어갔습니다.

 

2학년 때 친구가 신학교로 가자 등록금도 싸고 잘하면 미국도 갈수 있다고 하기에 신학교를 가기로 마음먹고 목사님 추천을 받으려 동대문교회 조화철 목사님께 친구하고 같이 갔었죠.

 

목사님은 우리보고 물으셨습니다.

 

목사가 되려면 십자가 가시밭길을 헤치고 가야 한다. 그런 마음의 준비는 되었나?”

 

.”

 

실제 속마음은 그게 아닌데 공부할 욕심으로 나를 속인 거죠.

 

세례는 받았겠지?”

 

이번에는 거짓으로 대답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잘 생각이 안 납니다.”라고 했더니 목사님이 말하셨습니다.

 

안 받았구먼. 그럼 1년 정도 교회에 다니면서 세례를 받게나.”

 

그래서 유학을 가려는 욕심으로 학교를 중단하고 교회를 다니던 중에 전쟁이 난겁니다.

 

- 해병대 입대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1.4후퇴 때 나는 서울에 잔류하고 있었습니다. 공장에 해병대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리에 해병대라고 쓰여 있는 거예요. 육군, 해군, 공군은 아는데 해병대라는 단어는 생전 처음 들은 겁니다. 그래서 해병대가 뭡니까?” 하고 물으니 해병대가 해병대지.” 하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병대는 상륙군이라고 하더군요.

당시 나는 너무 배가 고파서 굶어 죽느니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없으면 차라리 자살하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돈이라고는 참외 한개 사먹을 돈밖에 없었어요. 나중에 대구까지 후퇴하는데 따라갔지요. 거기 가서 느꼈습니다.

 

모든 청년들이 군대에 안가고 편안하길 바란다면 나라는 누가 지키나.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은 편안함도 안전한 생활도 이룰 수 없지 않겠나. 나는 나라를 지켜야겠다. 군대에 가자! 가려면 상륙군인 해병대로 가자! 그래서 진남포로 상륙하여 평양에 제1착으로 도착하여 고향으로 가자!’

 

이런 굳은 결심으로 19516월 견습사관(해병학교 제7기생)으로 지원했습니다. 우리는 진해여고 자리에 세워진 해병학교창설 1기생입니다. () 기수까지는 육군에 가서 위탁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죠. 전시중인데도 교육 7개월에 사관견습 3개월을 꼬박 받았습니다. ‘땀 한 방울이 피 한 방울이다라는 신념으로 철저히 받았습니다. 천자봉을 12번 구보했습니다.

 

당시 해병대는 1연대, 동해부대(6대대), 서해부대(8대대) 이렇게 3개 부대였는데 진남포로 상륙하려면 서해부대인 제8대대로 가야하지만 몰라서 6대대를 지원했습니다. 배치된 곳이 원산 앞바다에 있는 사도였지요. 동해는 섬이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원산 앞에 여도, 웅도, 사도, 모도, 신도, 황토도 이렇게 6개의 섬이 있어요. 여기에 사도에 2개 소대가 배치되어 있는데 거기에 소대장으로 명령 받았습니다. 거기서 1년간 소대장으로 있다가 중위 때 해병학교 구대장으로 와서 병16기와 17기를 교육시켰습니다.

 

- 월남에 청룡 제1진으로 가셨던 얘기가 궁금합니다.

 

나는 작전통 입니다. 작전국에서 소령에서 대령까지 있었으니까요. 1965년 청룡부대 제1진 제2대대장으로 명령이 났습니다. 나는 그때 애들이 셋이고 아내가 있는 가장이었습니다. 전쟁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생각하게 되죠. 그 죽음이 처자식을 책임져야할 책무를 포기한 죽음이라면 매우 안타까운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였고 비장한 각오로 출전했습니다. 부두에서 시() 한 수를 읊으면서 말입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 말동 하여라’ (장군은 이시를 읊으며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 월남에 도착하여 전투는 어떻게 지휘하셨나요.

 

도착하자마자 1차로 까두산 공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투를 내가 지휘하는 제2대대가 맡기로 했습니다. 참 많은 생각이 나더군요. 베트콩은 바람과 같이 나타났다가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지형이나 베트남의 모든 것이 생소한데 이유 불문하고 이겨야 되는 전투입니다. 첫 전투에서 지면 계속지고 이기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첫 전투의 중요성 아닙니까?

 

까두산은 프랑스군이 아홉 번이나 공격했으나 실패한 지점입니다. 이것을 청룡은 한 번에 꺾어야 하는 것이죠.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 부하들을 부디 지켜주십시오 저 젊은이들이 고향의 부모님 앞으로 갈 때까지 사랑하는 부하들의 생명을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그리고서 훈시를 했습니다.

 

“5천년 역사에서 우리나라는 900번이 넘게 외세의 침략을 당해왔다. 우리나라는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약소국이다. 나라의 장래는 청년들에게 달려있다. 너희들은 대한민국의 해병대이고 강한 청년들이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가 강해질 수 있는 도약대다. 이 전투에서 진다면 국가도, 나의 가족도, 여러분의 장래도 보장 못한다. 그러니 우리가 이겨야 한다. 만약 내가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면 너희들은 나를 쏴라. 너희가 비겁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쏠 것이다 (이 말을 하면서 강인하게만 보였던 장군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그래서 전투에서 승리하셨나요.

 

, 글쎄 그놈들이 접전하다가 도망가 버렸어요. 그놈들이 우리 해병대하고 붙어보니까 미군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마오쩌둥의 16자 전법을 사용한 거죠.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후퇴한다), 적주아교(敵駐我撟적이 야영하면 우리는 적을 교란한다), 적피아타(敵疲我打적이 피로를 느끼면 우리는 공격한다), 적퇴아추(敵退我追적이 후퇴하면 우리는 추격한다) 이런 논리로 우리를 피해 후퇴한 것 같아요.

 

- 첫 전투의 승리도 중요하지만 첫 훈시의 말씀도 역사에 남는 명연설 이십니다. 그 후의 얘기가 점점 관심이 갑니다.

 

각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거의 참가했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캄란의 1대대와 교대하려고 하니까 이번에는 여단 작전참모로 명이 나는 것입니다. 작전참모는 중대 시찰, 방어점검, 전투가 끝나면 제일먼저 답사해야 하는 등 바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같이 갔던 이봉출 장군과 함께 귀국하기로 되었는데 김연상 장군이 2대 여단장으로 부임하자 나보고 더 있어 달라는 것입니다. 월남전의 유경험자가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6개월을 더 있다가 귀국했습니다.

 

귀국하고 조금 있으니까 강기천 사령관이 불러서 갔더니 월남을 또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차로 또 갔습니다.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귀국할 때 남들이 다 가져오는 물건 하나 없이 맨 몸으로 왔습니다. 내 짐이라고는 포탄 껍질로 만든 의자뿐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의자는 제1사단 기념관에 기증했습니다. 언젠가 갔더니 어느 대대장의 의자라고 쓰여 있기에 그 사람이 나라고 했더니 오윤진 대대장 의자라고 정정해서 전시되고 있습니다.

 

월남전이 끝난 지 40년이 가까운 시간인데 이미 흘러간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당시 참전했던 피 끓는 젊은이들은 이제 노인들이 되었고 파월 1진으로 갔었던 대대장 중에는 나만 생존해 있습니다 (1대대장 명익표 중령대령예편 작고, 3대대장 전종남 중령대령예편 작고).

 

부대대장 최창헌 소령, 작전장교 고삼석 소령 등 모두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한때 전쟁을 지휘했던 지장(智將)이고 덕장(德將)이고 용장(勇將)이었던 여단장 1대 이봉출 준장, 2대 김연상 준장, 3대 이동호 준장, 4대 이동룡 준장, 5대 허홍 준장,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꽃다운 우리의 용감한 해병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고 고엽제와 전쟁 중의 부상으로 지금까지 신음하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있지 않습니까. 참 세월이 무상한 거죠.

 

우리가 치른 피 값은 국가경제를 일으키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고 엽전들이라 할 수 없다는 그 당시 국민들에게 팽배해있던 자괴감을 깨트린 우리나라 5천년 역사의 일대 혁명적 격동기의 주역들 아니었겠습니까?

 

이제 우리들이 가고나면 누가 월남전을 얘기할 것이며 누가 조국을 얘기 할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우리 세대에서 월남전의 역사적 의미를 확실히 인식시켜야 하는데 종북세력들의 이간에 넘어갈까봐서 안타깝습니다.

 

-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 해병대는 하나가 되어 선배님들이 세운 전통을 발전 계승시켜야 할 줄 믿습니다. 귀국 후의 나머지 군 생활과 예편은 언제 하셨으며 어떻게 사셨는지요.

 

어느 날 중앙정보부장이 만나자고 하기에 갔더니 오 장군 나와 함께 일 합시다. 내일부터 중정 2국장으로 일해주시오.” 하는 겁니다. “제가 이제 막 장군으로 진급했는데 해병대 지휘관으로 남고 싶습니다.”라고 고사했지만 이미 결정된 명령이니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중정 2국장으로 있다가 전라북도 책임자로 나갔습니다. 중정에서 원대 복귀하여 김포 여단장으로 갔다가 해군본부 참모부장을 끝으로 소장으로 예편했습니다.

 

나는 그동안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경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 후 시간강사 조금하다가 상명대학교 행정학과 조교수로 발령받아서 열심히 학생들을 지도 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건 출석 체크나 학점을 해병대식으로 철저히 했죠. 그 학생들이 지금은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어 무슨 날이 되면 은사님이라고 찾아오는 것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고 보람을 갖습니다.

 

- 장군님이 그런 학구적인 면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나서 해병대전우회 중앙회(이하 중앙회로 함) 총재를 하셨는데.

 

중앙회 총재는 존칭 생략하고 1대 김성은, 2대 이병문, 3대 김두찬, 45대 김연상 다시 김성은 이렇게 사령관 출신들이 했습니다. 그때 9인위원회가 의결하여 사령관 출신 아닌 사람으로 하자고 해서 내가 총재를 햇수로 3년하고 물려줬습니다.

 

해병대는 다른 부대가 하다가 실패한 작전,

미군도 실패한 공격을 해내는 용기와 충성의 군대

강하고 충성스런 전통 계속되어야

 

 

<오윤진 장군은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에 대항하는 철모 장군으로 유명했다.>

 

- 이제 해병대 전우들을 향하여 장군님의 고견을 말씀 해주십시오.

 

아들(오중석, 497)이 군대 갈 때 절대로 아버지가 장군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모든 일에 솔선수범 해라라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백령도로 보내달라는 부탁을 해서 휴가도 못나오는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추운 겨울에 고지에 지게를 지고 물을 길어 올리고 참모장 변소에 직접 들어가서 변소를 퍼내는 일들을 했다고 합니다. 이놈이 휴가 와서 아버지 때문에 호되게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아들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애병(哀兵)이 되라는 얘깁니다.

 

첫째는 애병필승(哀兵必勝)의 군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죠. 서러움을 당하다가 일어선 군대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뜻입니다. 해병대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장비로 출발하여 연전연승의 신화를 만든 군대입니다. 거기에는 겸허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지휘관들이 있었고 불속에도 뛰어드는 죽으면 살리라는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 필승의 신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해병대는 강하고 충성스러운 군대가 되어야 합니다. 해병대는 다른 부대가 하다가 실패한 작전, 특히 미군도 실패한 공격을 마다 않고 해내는 용기와 충성의 군대입니다. 전역 후에는 국가안보와 재해시 인명구조, 자연환경 보호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봉사자들입니다.

 

해병대는 수륙양면작전부대(水陸兩面作戰部隊), 국가기동예비군(國家機動豫備軍), 전천후타격부대(全天候打擊部隊), 공지기동부대(空地機動部隊), 다목적신속대응군(多目的迅速對應軍)으로 대변됩니다. 한마디로 국가가 비장하고 있는 무기요 오른팔입니다. 카드에서 조커와 같이 언제든지 쓰이는 군대죠.

 

북한을 잘 관찰해보면 중요한 군사요충지, 정치와 통신의 중심지, 산업시설들이 거의 북한 해역과 지근거리에 있어서 해병대가 상륙공격 목표지점으로는 안성맞춤입니다. 그것을 잘 아는 김정일은 동서해안에 5개 군단을 배치해놓고 있습니다. 즉 우리나라 해병대 27,000명이 북한군 180,000명을 묶어놓고 있는 것이죠.

 

부시 대통령 때 미 해병대를 예로 들겠습니다. 미 해병대에는 대장이 2명밖에 없었는데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해병대 대장이 5명으로 늘었고 합참의장, 구라파연합군 사령관, 미국전략 사령관등 요직에 해병대가 모두 보직되었습니다. 기자가 부시대통령에게 질문했습니다.

 

왜 전례 없는 요직에 해병대장군들을 임명했습니까?”

 

육해공군도 해병대를 닮으라는 뜻입니다.”

 

그 기질이 무엇입니까?”

 

해병대는 언제 던지 국가의 부름에 응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국가 예산을 절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해병대는 미 해병대의 전술교리와 전투경험도 같이하였기 때문에 그 기질도 비슷하기에 이렇게 예를 든 것 입니다.

 

뿐 아니라 해병대 예비역 역시 완전한 국가비밀 병기입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전쟁의 종결은 예비역이 합니다. 예비역은 매우 막강한 화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해병대는 현역이나 예비역이나 막론하고 해병대정신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상경하애(上敬下愛) 정신으로 선후배간의 끈적한 관계가 잘 소통되어야 하겠습니다. 절대로 나약한 군대가 돼서는 안 됩니다. ‘한 번 해병대는 영원한 해병대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한 목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모든 해병들이 교훈삼아 들었을 줄 압니다. 오늘 인터뷰를 통해 장군님의 인간적 내면을 볼 수 있어 더욱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해병대를 사랑하시고 해병대정신을 듣는 값진 시간이 되게 해주신 것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오윤진(吳允晋) 장군은 누구인가?

 

<5.16민족상(안보부문) 시상 받는 오윤진 장군 내외>

 

19288월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에서 나이를 잊은 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평안남도 성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1951년 해병학교 제7기로 입대, 해병대 소위로 시작하여 1981년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했다. 31년간 군 복무 중 한국전과 월남전에 참전하여 해병대의 명성과 용맹성을 드높였다.

 

6.25 전쟁 중에는 원산 영흥만 봉쇄임무와 1965년 청룡부대로 파월, 프랑스군이 아홉 번이나 공격했으나 실패한 까두산 고지를 한국군최초로 공격하여 대승을 거뒀다. 그 외 청룡1,2호작전’, ‘다비아계곡 작전’, ‘해풍 작전’, ‘추수보호 작전’, ‘재건 작전’, ‘짜빈동 전투등 수많은 작전에서 대승을 거두며 월남 전투의 영웅으로 해병대 전사(戰史) 에 길이 남아 있다.

 

80만 해병대 전우회 총재로 선출되어 맥아더장군 동상철거와 친북좌파 정권에 대항한 전투복에 철모를 쓴 철모장군으로 그 명성을 드높였다. 예편 후에는 경희대학교와 상명대학교에서 14년간 한국행정론현대사상의 이해등을 강의하여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1966충무무공훈장’, 1967월남엽성무공훈장’, 1976보국훈장 천수장’, 1980미국공로훈장’, 2010‘5.16 민족상을 수상한 바 있다.

 

 

출처 : 해병대신문, http://www.rokmcnews.net/cover/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