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월남전

월남전에서의 해병대의 역할과 성과

머린코341(mc341) 2015. 11. 5. 12:45

월남전에서의  해병대의 역할과 성과


김현기 교수(국제정치학 박사, peter1008@hanmail.net)


청룡부대의 파병경위


1964년 7월 31일 월남정부의 요청으로 국회에서 “국군해외파견에 관한 안건”이 통과되어 월남파병이 결정되었다. 해병대는 1965년 3월 공병 1개중대를 비둘기부대에 배속하여 파병한 이후 머지 안아 전투부대의 파병이 이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해병대정책위원회에 전투부대파병안을 연구토록 지시하였다.


국방부는 지령 제8호(1965.6.29)로 파병부대 편성지침을 확정하고 각군에 하달하였다. 파병부대 편성지침은 “1개사단 규모로 편성하되 육군보병사단(-) 및 해병 1개연대외 지원부대로 편성 한다”는 것이었다.  상기 지침에 따른 해병대 파월부대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가. 해병제1사단 제2연대
나. 해병제1사단 포병연대 제2대대
다. 해병제1사단 의무대대 제2치료 및 수용중대
라. 해병제1사단 본부대대 일부
마. 해병 제1사단 근무대대 일부
* 총인원:4,130명(장교:206명, 부사관 및 병: 3,924명)


주월한국군사령부와 함께 해병대 1개연대의 편성안이 확정되자 해병대사령부는 제1연대장으로 근무중인 정태석 대령을 파월 제2연대장에 임명하고 부대편성과 교육훈련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그 후 9월 8일 월남을 현지방문하고 복귀한 연락장교단은 파병부대 주둔지와 임무에 대하여 “수도사단은 뀌논에, 해병연대는 캄란에 각각 주둔하고 독립적인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의 독립적인 임무수행을 고려하여 파병부대를 여단급으로 확대해 줄 것을 국방부에 건의 했다. 국방부는 해병대사령부의 건의에 따라 1965년 9월 20일 제2해병연대를 제2해병여단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여단장에 이봉출 준장을 임명하였다.


파병을 위한 인원은 투철한 해병정신을 소유한 자를 선발하는데 주안을 두었다. 또한 파월을 위한 교육훈련은 1965년 7월1일부터 개인훈련, 대대단위 야외훈련, 연대전투훈련, 대게릴라전, 중대단위 주야간 전투훈련, 정글지대작전, 이동간 즉각조치 훈련, 헬기탑승훈련, 해양훈련 그리고 M1검정사격 등을 단계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와같은 마무리 단계의 인원편성과 교육훈련이 진행되는 가운데 1965년 9월 20일 포항의 훈련기지에서 박정희대통령을 비롯한 3부요인과 주한 외교사절. 한.미 양군의 주요 지휘관, 파월장병 가족과 포항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파월부대의 결단식이 거행되었고, 동년 10월 3일 부산항에서 육군선발대와 함께 미해군 수송함 편으로 월남을 향해 출항했다


월남전에서 수행한 해병대의 작전


해병대는 전투여단인 청룡부대를 창설하여 1965년 10월 3일 건군사상 처음으로 파병하여 10월 9일 캄란만에 상륙하여 주월한국군의 작전개념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작전수행을 위한 한국군의 작전개념은 다음과 같이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제1단계는 지역인수, 전술책임지역 확보, 기지방어편성, 중대급단위부대 전술기지 구축, 방어를 위한 수색정찰, 매복전술 등이다.


제2단계는 지역내의 적소탕, 방어를 위한 공격, 심리전의 강화, 전술기지의 확대, 중대.대대의 소탕작전에 의한 전술지역을 완전 장악하는 시기이다.


제3단계는 예비대 투입과 전술지역을 확대하고 연합작전으로 적의 대부대를 공격소탕하고, 대민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평정사업을 적극 실시한다. 또한 전술책임지역밖의 원거리를 기동하여 인접지역의 적 주력과 근거지를 소멸시키는 단계이다.


제4단계는 전술책임지역의 잔적 소탕과 대민사업의 본격적인 실시로 월남정부와 국민간의 행정력을 완전히 복귀시켜 평정목표를 달성하는 시기이며, 월남정부군이나 지방군 또는 타국군에게 평정된 지역을 인계하여 주고 새로운 목표지역을 향하여 이동할 수 있는 단계이다.


해병대는 1965년 12월 23일까지 캄란, 나트랑, 판랑지역에서 방어전을 수행하다가 투이호아로 이동하고, 1966년9월 19일에는 추리이로 이동하여 작전을 수행후 1968년 1월3일 마지막으로 호이안 지역으로 이동하여 1972년 2월 17일 철 수시까지 작전을 수행하였다.


청룡부대는 파월 6년 5개월동안 여단급 작전 55회, 대대급 작전 113회를 비롯하여 151,437회의 소부대 작전을 실시하여 9,619명의 적을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획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민사심리전을 활발히 전개하여 지역일대의 평정도를 높이고 적으로부터 주민을 보호하였다. 따라서 월남정부의 평정사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해병대는 다음과 같은 작전을 수행하였다.


1. 수색과 소탕작전


 수색과 소탕이란 초대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몰랜드 장군이 내세운 구호로, 적의 기지 및 군수시설을 수색하여 적을 소탕하거나 주민속으로 숨어 있는 베트콩을 분리시킨 다음 분리된 적을 포위,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신속히 기동시켜 완전히 섬멸하여 평정지역을 확대해나가는 작전으로 청룡부대가 실시한 작전의 거의 대부분은 차지하는 것으로 이는 한.미.월 연합 혹은 한국 단독으로 수행한 작전이다.


이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미군과 월남군은 대부대로 집결하여 적을 수색소탕한 다음 기지로 복귀하는 “Hit and Retreat" 방식으로 수행함으로서 베트콩은 우군이 나타나면 잠시 몸을 피했다가 우군이 철수한 다음 다시 나타나 주민을 지배했다. 그러므로 미군과 월남군의 작전은 안전하기는 하나 전과나 민사심리전면에서 큰 실적을 올리지 못하였다.


청룡부대는 적을 수색소탕한 다음 그곳에서 진지를 구축하여 동일장소를 여러번 반복하여 수색소탕하는 “Hit and Stay" 작전방식을 사용하여 책임지역의 완전평정을 이룩할 수 있었고 또한 베트콩의 활동을 차단하는 중대전술개념을 도입한 작전으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어 처음에 반대하던 웨스트몰랜드와 미군장교들은 중대전술기지개념에 의한 작전의 성과가 입증되자 그들은 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2. 상륙작전


청룡부대의 마지막 평정지역인호이안의 북으로 미해병1사단과 경게선을 이루는 라토 강과 탄킷 강이, 서북쪽으로는 아이니아 강이 있고, 지역내에서 서에서 동으로 횡단하여 도하수단이 없이는 횡단이 불가능한 디엔빈강이있으며, 이 강에는 바나나 섬과 사과섬이 위치해 있다. 또한 디엔빈 강 남쪽에는 동서로 연결되는 챔손강이 흘러 하류지점에는 고노이섬이 위치해 있다.


고노이 섬은 베트콩과 월맹군의 영역으로 많은 우군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부대기지, 병참기지, 의료시설, 탄약고, 훈련소 등 시설이 산재해 있고, 다낭, 호이안, 그리고 디엔반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한 지역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또한 바나나섬과 사과섬은 우군의 작전활동이 전혀 없었던 곳으로 하류에 위치한 고노이섬으로부터 디엔반에 이르는 가장 양호한 적의 통로로 사용되고 잇었고 적은 다낭과 디엔반을 공격하기 위하여 1번과 4번 도로와 연결하기 위한 적의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우군의 임무수행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이 지역을 확보하여 적의 활동을 봉쇄하기 위해 한미해병의 상륙작전(승룔 12호작전과 고노이작전)이 실시되었다.


가음은 중부월남의 다낭 남방 32Km 지점인 호이안 동남부에 위치한 베리아 반도는 꽝남성 일부지역인 슈엔탄, 슈엔로 및 슈엔푸의 3개면으로 구성되어 동쪽에는 남지해가, 서쪽에는 쫑장강과 그 건너편에 리리강이, 북쪽에는 꽈다이 강이 있는 반도형으로 된 지형으로 적은 천연적 요새를 이용하여 월맹군과 혼성된 베트콩 주력인 지방게릴라가 오랫동안 꽝남성과 꽝연성 및 다낭시 일대의군사시설을 위협함으로서 베리아 방도의 적 근거지를 소탕할 목적으로 한국 연대상륙단과 미국해병대 대대상륙단이 실시한 연합 상륙작전(승룔15작전)이다.


3. 민사심리전 및 대민지원


베트콩의 게릴라전은 모택동의 전략전술이론과 보구엔 잡의 전략전술이론에 바탕을 두고 베트콩 특유의 독특한 전술을 추구한 것이다. 즉 이들은 민중이 물이라면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부대나 개인은 물고기와 같은 관계이기 때문에 물을 떠난 물고기는 살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공산군들은 평화적인 수단이건 강압적 수단이건 민심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협과 선전의 수단을 사용하였다.


월남전은 비록 국한된 지역작전에서 출발하였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서 전쟁의 형태가 원시적인 것과 현대적인 혼합전쟁의 형태가 되었고 또한 정치,경제, 군사, 및 사회의 제문제와 국제정세가 서로 얽혀 닐이 갈수록 복잡해 졌으며 월남인들은 장기간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쳐 빈곤, 질병, 문맹 및 약탈 등의 혼란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이와같은 사태하에서는 비록 작전에 이겼으나 이긴 것도 아니고, 일시적인 지역확보가 승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고차원적인 종합대책을 선택해야만 전쟁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청룡부대는 전투작전 이상으로 민사심리전을 중요시하여 “백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주월한국군 심리작전의 방침에 따라 전투작전과 민심심리전을 병행하여 그들에게 정신적 위로와 생활을 위한 물질적 도움을 주어 작전의 성과를 올리고 평정의 실적도 착실하게 쌓아 올렸다.


 해병대가 획득한 성과


1965년 10월 9일 파월된 한국 해병대가 월남전에서 작전을 수행함으로서 한국해병대의 부대 발전에 기여한 성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역사상 최유의 해외파병의 선봉으로서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하였다. 한반도는 고조선이후 한국전쟁에 이르기 까지 419회의 외침이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상 국외로의 출병 중 여진정발과 대마도 정벌은 우리나라 해안과 변방을 노략질하는 행위에 대한 자체방위 수단으로 출병하였고, 다른 경우 여몽연합의 일본정벌, 후금공격(광해군),청나라 원병(인조) 등은  강대국의 강요로 타의에 의해 약소국의 입장에서 국력만 낭비하는 파병이었다.


그러나 월남파병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판단과 결의에 의하여 파병한 것으로 영광의 역사로 자부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해병대의 위용과시와 연합작전 능력이 향상되었다. 캄란과 동바딘에 주둔한 청룡부대는 미군의 책임지역을 인수받아 작전을 전개하여 오랫동안 베트콩의 지배하에 있던 월남의 대동맥인 1번 도로를 개척하고 베트콩의 유일한 전술전략요지이며 18년간이나 난공불락의 성으로 베트콩이 자랑하던 투이호아의 붕로만 일대를 점령함으로서 대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해 뉴욕 타임스지는 청룡부대의 청룡1호 작전을 월남전쟁사상 최대의 작전적 승리라고 게제 하였고, 한편 베트콩에게는 한국군대라면 벌벌 떨고 달아 단나고 하는 정보를 확인해주는 결과가 된 것이다.


1967년 2월 15일 짜빈동 야간방어 작전에서 해병대 11중대가 월맹정규군 2사단 2개연대와 지방 게릴라 1개대대 병력 포함 약 4,600명으로 야음을 이용하여 인해전술로 파상적인 기습공격을 해 온 것을 중대전술기지에서 적을 완전 격퇴시킴으로서 월남전 사상 유례없는 전과를 획득하여 청룡의 용맹을 대내외에 과시하였으며, 한국군 중대전술기지의 방어의 전술적 우수성을 입증함과 동시에 대통령의 부대표창과 일계급 전원특진이라는 명예와 1968년도에는 미국 대통령의 부대표창도 받았다.


셋째, 대게릴라 작전의 수행방식을 터득하였다. 해병대는 전투작전이상으로 민사심리전을 중요시하여 민사업무를 관장하는 민사부서를 증편하여 민사업무를 전담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 해병이 민사심리전 요원이 되어 주월한국군사령부의 방침에 따라 예의 바르고 친절한 한국군(따이한)으로서 이미지 부각에 심혈을 기울여 평정지역을 점점 확대해 나갔다.


이와 같은 평정업무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기위해서는 게릴라에 대한 정확한 정보획득을 위해서는 주민과의 지속적인 접촉에 의해서 달성될 수 있다는 것괴 게릴라전의 핵심은 주민임을 판단하고 베트콩과 주민을 분리하여 주민을 보호함으로서 작전의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개념하에 전투작전과 민사심리전을 전개하였다. 즉 전투작전으로 베트콩을 소탕하여 주민을 보호하고 민사심리전으로 주민과 친숙해짐으로서 주민을 장악할 수 있었다.


넷째, 해병대 증강 및 전투력 향상을 촉진하였다.  월남사태가 악화되자 제1상륙사단의 제2연대를 기간으로 새로운 여단인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하여 6년 5개월간(1965us 10월-1972년 2월) 전투임무 수행 후 개선하여 제5여단으로 서부전선 방어임무를 인수받아 사단으로 편성하려는 계획이었으나 파월증가 병력이 복원 처리됨으로서 사단편성개념에 차질을 초래하였지만 80년대 초반 사단으로 증편된 부대의 모체가 되었다.


한편 장비 면에서 한국군의 한국군 월남전 참여에 대한 미군 측의 대가로 월남전에 참여한 청룡부대를 포함한 제1해병사단의 장비현대화 계획에 따라 여러 종류의 장비와 탄약 등이 보완되었다. 또한 전투경험 면에서 파월당시 인가병력 6,000명(해군제외)에 대하여 년평균 98%의 수준을 유지하였고, 파월기간은 1년으로 하여 본국으로부터 교체하였으므로 월남전 참전자수는 대략 30,000여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으므로, 이들의 전투경험과 무형적 전투력인 정신전력의 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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