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6·25사변

마산-진주 전투(킨 작전) 중 통영상륙작전

머린코341(mc341) 2016. 8. 10. 11:31

통영상륙작전
 
킨 작전에는 한국 해병대의 金聖恩[(김성은·1924~2007), 국방장관 역임] 부대도 참가했다. 김성은 부대는 8월6일 밤부터 적 중화기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야반산·수리봉·서북산 일대의 적 진지를 탈환한 후 함안·군북으로 우회 기동하여 그 남쪽에 있는 오봉산과 필봉의 적을 섬멸하는 등 분투했다.

해병대 統營(통영) 상륙작전은 북한군의 ‘8월 공세’가 한창이었던 1950년 8월17일 김성은 중령이 지휘한 한국해병 제1대대가 단독으로 통영군 용남면 長坪里(장평리) 바다를 통해 상륙, 통영과 거제도를 점령하려던 북한군 제7사단을 무찌른 전투이다.


장평리 앞바다는 임진왜란 때(1952년 7월8일)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와카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왜군 함대를 閑山島(한산도) 앞 넓은 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5~6척의 척후선을 보낸 거제도-통영 사이의 좁은 바닷길인 見乃梁(견내량)으로, 현재 이곳 바다 위엔 新거제대교와 거제대교가 걸려 있다.


통영 상륙작전은 같은 해 9월15일의 仁川(인천) 상륙작전보다 한 달 앞선 상륙작전이었으며, 북한군의 기습 남침 이후 韓美 양군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방어전에 급급할 때 유일하게 북한군을 공세에 의해 제압한 작전으로 기록되었다.


이때 마산 서부 鎭東里(진동리)에서는 마산-진해를 거쳐 부산을 함락시키려는 敵 제6·제7사단의 공격이 미 제25사단에 의해 막히자 적은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던 통영반도를 먼저 장악한 뒤 거제도를 점령해, 對岸(대안)의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 했다. 북한군 제7사단은 제1차로 예하의 제51연대와 제104 치안연대 650명을 보내 8월17일 새벽 1시 고성을 통해 통영읍으로 침입시켰다.


이에 8월17일 새벽 3시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눠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km 지점에 위치한 紙島(지도·거제도와 통영군 사이의 섬)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제도 서북 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우리 해군 함정 703·901·504·512·302·307호정 및 평택호의 지원·엄호 하에 8월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 장평리에 상륙을 개시했다.


이와 병행해 해군 함정들은 사전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 매일봉, 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사격에 가세했다.


적은 해병대가 통영항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오판하고, 고지에 배치되었던 병력을 통영항 일대에 집결시켜 해안선에 배치시켰다. 이로써 장평리 상륙작전은 아무 接戰(접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상륙을 완료한 해병대는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한 공격을 감행하여 8월18일 새벽 제2중대가 ‘통영의 목구멍’ 轅門(원문)고개로 진격하여 방어진을 구축하고, 제7중대는 시가전의 요충인 매일봉을 5분 먼저 점령함으로써 한 발 늦게 올라오는 적에 치명타를 먹였다.


이에 당황한 적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8월18일 12시부터 해군 함정의 지원사격을 받으며, 19일 오전 10시까지 통영 시가지에서 소탕작전을 벌였다. 퇴로를 차단당한 적의 일부는 어선 3척을 타고 해상으로 도주하다가 해상을 경비하던 504·512호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통영상륙작전을 완수한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예상 공격로인 원문고개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 반격해 오는 적의 대부대를 치열한 육박전까지 감행하면서 수 차례에 걸쳐 격퇴했다. 轅門(원문)이란 원래 軍門(군문) 또는 官衙(관아)의 外門(외문)을 뜻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후 3도수군통제사영이란 관아가 설치되어 統營(통영)이라 불렸는데, 원문은 그 외문에 해당한다. 통영에는 이순신 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606년에 세운 忠烈祠(충렬사)와 국보 제305호 洗兵館(세병관)이 보존되어 있다.  


이 상륙작전에서 거둔 전과는 적 사살 469명, 포로 83명이며, 따발총 128정, 아식소총 107정, 권총 13정, M1소총 3정, 기관단총 14정, 박격포 2문, 지프 12대, 트럭 10대와 다수의 포탄· 수류탄 등을 노획했다. 아군 피해는 전사 19명, 부상 47명이었다.


미국의 일간지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마가렛 히긴스 기자는 한국 해병대의 승전을 보도한 기사에서 “귀신이라도 잡겠다(They might capture the devil)”는 찬사를 보냈다. 6·25 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한 히긴스는 1951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세계적 전쟁 전문 기자였다.


[조갑제닷컴]2015.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