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와 5·16혁명

해병대 발언권 약한 이유는 군사정권시절 견제로 부터 이어 내려온 악습-정진섭

머린코341(mc341) 2016. 11. 6. 08:05

해병대 발언권 약한 이유는 군사정권시절 견제로 부터 이어 내려온 악습-정진섭


1. 5.16쿠데타 (박정희와 해병대)


1960년 2월 박정희는 육군소장으로 부산군수사령부 사령관으로 취임한다. 박정희는 해병1사단장 김동하 소장과 부산 동래온천장에서 회합을 가진다. 이때 회합주제는 혁명을 하고난 다음 미국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였다.


그 이후로 박정희, 김종필, 김동하(해병1사단장) 등은 계속적으로 만나면서 현대사에 한 획을 긋는 날을 1960년 5월 8일로 D-day를 정한다. 그러나 1960년 4월 19일 4.19의거가 발발하면서 계획은 차질이 왔다. 1960년 9월 12일부터 서울 명동 충무장 등에서 박정희는 육사 8기생을 주축으로 한 후배들 그리고 해병 김동하소장 등과 다시 거사의 날을 꾸민다.


그래서 결국 이듬해 1961년 5월 16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 날 새벽 국가권력을 장악한 뒤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고 6개의 혁명공약을 내걸었다. 이들은 미국의 신속한 지지표명, 장면내각의 총사퇴, 윤보선대통령의 군사혁명 인정에 힘입어 합법성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칭하고 3년 간의 군정통치에 착수하였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군사혁명 후 혁명과업 완수 기간 중 대한민국 최고 통치기관. 사실상 별 둘인 소장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별 넷인 육군대장 장도영이 최고의장이 되어 최고 통치권자가 된다.


거사에 직접 가담했던 각군의 참가자들은 한자리씩을 맡게 되고 이 과정에서 파벌이 나누어지게 된다. 소장 박정희 파와 5.16쿠데타를 뒤에서 그냥 눈감아 주고 최고의장이 된 육군대장 장도영 파로 나우어진다. 이 때 해병대는 별 둘인 박정희보다 당시 더 큰 영향력이 있었던 대장 장도영 세력에 붙는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이 장도영 세력도 야심만만 박정희에게 밀려나고 최고의장의 자리는 박정희의 손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516은 철저하게 박정희와 해병대의 주도아래 발생되었으며 이것을 결과로 해병대 주도세력은 모두 한자리씩 하죠. 물론 이런 약속없이 총살을 각오하고 쿠데타에 주동세력으로 가담할리도 없었겠지만 그러다가 박정희가 기대와는 틀리게 완전히 장악을 못하자 돌변해서 보다 더 낫다싶은 쪽으로 자리를 틀어버린다. 이것이 해병대가 박정희의 미움을 사는 바로 그 역사의 시작이다.


2. 자업자득으로 무너지는 해병대


박정희 대통령은 군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군장성 출신 대통령이었다. 당시로선 해병대만한 쿠데타 조력세력은 없었다. 박정희는 해병대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성공하지만 해병대의 배신으로 대통령권좌에 올라선 뒤에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또다시 해병대가 서울로 진입해 온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하고 권력을 고스란히 내주는 전대의 실수를 되풀이 해야됐기 때문이다.


쿠데타 실패란 곧 총살을 말한다.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시도 할수있는 모험은 아니다. 박정희는 정권을 잡은 뒤 군부를 대대적으로 정리한다. 반대세력은 철저하게 숙청과 견제가 이어진다. 감히 어느누구도 반항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통치가 이어진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의 혁명의 주체였던 해병대가 가장 눈에 거슬리게 된다. 수도서울에서 불과 1시간도 되지 않는 거리에 해병대 사단과 여단 병력이 집중되어 있다. 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박정희의 꿈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미국의 월남파병 요청이 있었다. 절호의 기회다. 항상 눈에 가시였던 수도권 지역의 해병대를 멀리 보내버릴 수 있있던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박정희는 한동안 평안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도 잠시. 죽어라고 보냈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해병대. 그것도 역전의 공을 세우고 눈에 핏발을 태우며 돌아온 해병대. 박정희는 더이상 주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급한 박정희.


해병대사령부 해체. 해군 밑으로 복속시키고 모든 인사 행정 군수 ... 해병대의 실권을 해군의 그늘밑으로 집어 넣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을 눈가림 하기위해 해병대 기념관을 하나 건립해준다. 말그대로 눈가리고 아웅하기다. 오늘날 해병대는 이렇게 말한다. 박대통령님은 해병대에 기념관을 건립해주신 고마우신 분이라고.


이것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당시로서는 우리군에 해병대만한 특수군은 의연 없었다. 당시 60년대 70년대 최고 정예부대의 상징이었던 얼룩무늬 군복은 공수단,해병대,공작단 만이 입을수 있었다. 월남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공을 세우고 돌아온 해병대에게 상대신 사령부해체와 함께 해군산하로 복속시키고 정예군의 상징인 얼룩무늬 위장복을 벗겨 버린다. 대신 회색(약간 초록색과 중간)의 작업복이 주어진다. 그리고 철저하게 정규군편제와 임무로 완전 이전된다. 더이상 특수한 면을 찾을래야 찾을수없게 조치된다. 물론 그 이전의 해병대도 정규군이었으나 한국군 실정에선 하나의 거대 특수군으로 보는 것이 대부분의 시각이다.

그 뒤 해병대는 그 이전의 특수군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1년 2년 10년이 지나면서 해병대는 서해안방어군의 이미지 그 이상은 존재치않게 된다. 인사 군수 각종 지원에 있어서도 돌이킬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강평관
 
해병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의 성공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1961년 5월 16일 해병대 김포여단 병력은 무단 출동하여 한강인도교에서 약간의 교전끝에 헌병병력을 제압하고 서울 도심으로 진입, 516 군사쿠데타를 성공시킨 일등 공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해병대는 이러한 불법 군사쿠데타에 참여한 덕분에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하여 천당과 지옥을 맛보게 됩니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 있었던 새로운 국군조직법의 공포는 해병대 위상을 그 무엇보다 강화시킨, 즉... 육, 해, 공군에 이어 해병대의 4군체제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0년대 초반 해병대사령부를 해체시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에게 있어 해병대는 너무 커졌다는 생각을 들게 한 것이었을까요?

일부 해병대 예비역분들은 해병대의 원상회복을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이른바 해병대 원상회복 운동을 온라인에서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해병대 원상 회복?

좋습니다. 해병대를 원상 회복시키자고요.

단, 해병대 창설 초기의 순수 그 자체 시절의 해병대로 말입니다. ^^

1949년 5월의 대통령령 제88호는 해병대에 대한 규정을 최초로 명시하게 됩니다.

그 내용은

1. 해군에 해병대를 둔다.
2.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육상전투에 임하는 동시에 주둔지역의 경비임무를 수행한다.
3. 해병대에 사령부를 둔다. 사령관은 해군참모총장에 예속하여 소속부대를 지휘 통솔한다.
4. 해병대의 편성 및 배치는 해군참모총장이 정한다.

어떻습니까?

해군에 해병대를 두며, 해병대의 편성과 배치는 해군 참모총장이 정한다.. 라고 나왔습니다.

이쯤해서 먼저 한국 해병대의 창설 배경부터 알아볼까 합니다.

해병대는 1948년 10월의 여순 반란사건 진압 후 해군에 육전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필요성의 제기로 창설되게 됩니다.

여순반란 사건 당시 해군측에서는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7척의 함정으로 임시함대를 편성한 후 진압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당시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의 모든 함정은 여수항의 봉쇄를 위해 동원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해군에는 해병이 없었으므로 해군은 해상에서 포사격이나 기관총 사격으로 반란군과 교전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진압작전이 끝난 후 당시의 해군 지휘관간에 해병대의 필요성이 논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49년 4월 진해에서 해병대는 보병 1개 대대 규모 정도로 창설되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사건으로 말미암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전쟁을 통하여 규모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한국 해병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김포의 해병여단 병력은 야음을 뚫고 서울로 무단 출동하게 됩니다.

이들은 한강 인도교에서 헌병과의 작은 교전 끝에 이들을 제압하고 강을 건너 서울 도심지에 진입, 군사쿠데타의 선봉에 이르게 됩니다.

516 군사쿠데타는 사실상 해병여단 병력이 아니었다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관측됩니다.

그러한 점에서 김포의 해병여단 병력은 혁명군의 아니 군사쿠데타 반란군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은 이러한 의미에서 해병대에게 큰 빚을 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군정 이후 대통령에 취임한 1963년 해병대에게 커다란 선물을 안겨줌니다.

그것은 바로 해병대의 위상을 새롭게 규정한 국군조직법이었습니다.

1963년 5월에 공포된 국군조직법 제3조(각군의 임무) 3항에 해병대는 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고 이를 위하여 편성 장비되며 필요한 교육 훈련을 한다라고 명시하여 육해공군과 동일 선상에서 제도적으로 조직의 임무를 보장받았었습니다.

이른바 육,해, 공군에 이어서 해병대를 동일한 반열로 올려놓은, 명실상부한 4군 체제를 법적으로 제도화시킨, 군사쿠데타의 주력이었던 해병대에 대한 이보다 더 클 수 없는 커다란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이러한 체제는 미해병대를 제외한다면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기형적인 조치였습니다.

물론 그것은 자신의 군사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끈 해병대에 대한 보답이었을 것입니다.

18만의 병력을 자랑하는 미해병대조차도 200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많은 견제와 시련끝에 쟁취한 독립성을, 한국해병대는 간단하게 그리고 손쉽게 쟁취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절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시는 해병대 예비역 분들께 경의를 표합니다.

해병사단장 투스타에서 곧바로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되는 ... 그리하여 3스타와 4스타를 짧은 시간안에 초스피드로 다는 추억의 그 때 그 시절 해병대 사령관 시절로 말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고속 진급은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 등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신비한 체험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


교육단
 
참견인님말은 장황한 설면해 비해 새로울곳이 하난도 없읍니다 .

그정도 주장은 초등학생 정도도할수있는 극히 일반화된 관습에 따르자는 아주 구태의연한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입니다.

고대로부터 육군에서 .해군.공군이 태어난지가 채100년이 않됩니다 .

초기에는 해군 .공군도 유군에 통합해야 한다 주장을 해왔읍니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그런 주장을 않합니다 .

그러나 내륙국가는 해군력이란게 미미하게 존재합니다 (왜 바다가 없으니)

한국은 3면이 반다고 국토가 길쭉한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아요

뭔말이냐 휴전선의 요새화로 우리의 국방력이 북한 보다 월등하다해도 휴전선 정면 돌파 어렵읍니다 .

육이오 전쟁과는 다릅니다 휴전선 돌파하는데 상륙세력이 우회기동 않한다면 육군의 대부분이 거들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

전쟁 은 혼자하는게 아닙니다 . 육.해.공.해병대 적절한 안배와 전력균형발전으로 승리로 이끄는 것이지 200만의 육군이 있어도 휴전선 돌파하기전에 다 거덜납니다.

해병대 강화론은 해병대 단독 존재론이 아닙니다 .

육.해.공.해병대 균형발전론이자 항상 모든순위에 밀리는 해병대 적정 수준 발전론입니다.

병대대 현재주장처럼 간화해도 국방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미만인데 이정도 강화해서 30% 전력상승 한다면 해볼만한 개혁 아닙니까.............

끝으로 김만섭님은 제대로 된주장은 님이 하셔야 할것 같읍니다.

님주장 역시 새겨볼만한 알맹이가 없는 땡강으로 밖에 않보입니다.
 

교육단
 
참견인님말은 장황한 설명해 비해 새로울 곳이 하나도 없는 주장 입니다 .

그정도 주장은 초등학생 정도도 할수있는 극히 일반화된 관습에 따르자는 아주 구태의연한 시대의 변화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로 나온 주장으로 보입니다.

고대로부터 육군에서 .해군.공군이 태어난지가 채100년이 않됩니다 .
 
초기에는 해군 .공군도 육군에 통합해야 한다 주장을 해왔읍니다.

이제는 세계적으로 그런 주장을 않합니다 .

그러나 내륙국가는 해군력이란게 미미하게 존재합니다 (왜 바다가 없으니)

한국은 3면이 반다고 국토가 길쭉한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아요

뭔말이냐 휴전선의 요새화로 우리의 국방력이 북한 보다 월등하다해도 휴전선 정면 돌파 어렵읍니다 .

육이오 전쟁과는 다릅니다 휴전선 돌파하는데 상륙세력이 우회기동 않한다면 육군의 대부분이 거들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

전쟁 은 혼자하는게 아닙니다 . 육.해.공.해병대 적절한 안배와 전력균형발전으로 승리로 이끄는 것이지 200만의 육군이 있어도 휴전선 돌파하기전에 다거들납니다

해병대 강화론은 해병대 단독 존재론이 아닙니다 .

육.해.공.해병대 균형발전론이자 항상 모든순위에 밀리는 해병대 적정 수준 발전론입니다.

해병대 현제주장처럼 병력전력 강화해도 국방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0%미만인데 이정도 강화해서 30% 전력상승 한다면 해볼만한 개혁 아닙니까.............

끝으로 김만섭님은 제대로 된주장은 님이 하셔야 할것 같읍니다.

님주장 역시 새겨 볼만한 알맹이가 없는 감정 싸움으로 보입니다.

끝으로 첨단무기만 만능도 아니고 그렇다고 육군의 대병력이 모든걸 해결해 주리라는 생각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

육군은 육군의 역할 해군은 해군의 역할 공군은 공군의 역할 해병대는 해병대의 역할을 잘 소화해 낼때만이 전쟁에서 그리고 우리한국군 의 자주국방력은 향상될것입니다 .

4군 균형발전론의 주장이 해병대 예비역분들의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

사회적 정의으의 차원에서도 맞다고 보구요

단지 현재의 해병대 조직이 너무 외앞으로 부터 자생력이 약한바 아주 적은 국방비로 독립된 조직으로 인정하고 그에맞는 책임감을 심어주자는 아주 당연하 바람인것입니다.

김현석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우리군이 세워야 할 모델이 무엇인가. 아니면 독자적 모델인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우리군은 창설부터 지금까지 미군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규모나 예산, 작전지역, 및 지정학적 위치 등에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영국군 처럼 통합군(해군 전투항공단도 해체) 하는 체제로 나갈 것인지 미군처럼 4군체제(그래도 해병대는 해군과 매우 밀접)로 갈것인지가 중요한 갈림길이라고 봅니다.

물론 미군도 최근 통합군을 강조하여 유기적 연합 넷웍 및 지휘체제 구축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대충의 논의는 이런것 같네요. 해병대가 강해져야 된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동의하나

1. 숫자를 늘이자 -> 예산과 발언권 확대 및 작전 능력 강화
2. 지금수준에서 예산과 장비를 충실하게 가져가자(헬기 및 상륙함 추가확보)

첫번째 의견의 문제점은 누가봐도 인력감축 - > 첨단화.. 라는 추세에 역행으로 보인다는 겁니다.

현 병력인 2만 5천의 병력도 동원+상근 포함으로 정수 완편이 아닙니다. 실 병력은 대략 1만5천으로 보이며 현 2사단+1여단도 정수를 못채우는 상황에서 편제만 늘인다고 발언권이 세진다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3줄요약.
병력감축은 피할 수 없다.
무조건 증편은 자릿수 늘이기, 자군 이기주의로 보인다.
현 병력 수준에서 장비/예산 및 훈련을 충실히 하자.

해병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편제를 늘이기 전에 복무기한 유지(18개월 이상) 으로 전투력 유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