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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에 만난 사람 <4> 김 영 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시설사업소 전무

머린코341(mc341) 2017. 6. 16. 12:10

호국보훈의 달에 만난 사람 <4> 김 영 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시설사업소 전무


 “전우가 준 목숨, 해병대 위해 끝까지 봉사할 것”
1972년부터 46년간 한 해도 거르지않고 황종만 상병 찾아

‘해병대 홍보맨’으로 활약…황 상병 부모님 아들로도 30년



한 노병이 전사자 묘비에서 전우의 이름을 발견하고 슬픔에 젖었다. 거수경례로 인사하며 전우의 넋을 위로했다. 주름진 손으로 전우를 보살피듯 묘비를 정성스럽게 닦았다.


갓 스물을 넘긴 어린 나이에 사선을 넘나들었던 전우는 노병을 구하는 대신 자신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전우에게 오는 발걸음은 늘 무겁다. 김영대(76)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시설사업소 전무는 해마다 6월이 되면 가슴이 더욱 시리다.


김영대 살리고 먼저 간 황 상병


‘1626 고(故) 황종만 해병상병 1968.1.31 월남전 전사’. 현충일을 하루 앞둔 지난 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26묘역. 김 전무는 고 황종만 해병상병(추서계급)의 묘비를 찾았다.


“종만아~ 내가 왔다! 잘 지내고 있냐.”


반갑게 부른 전우의 이름이지만, 흐느낌도 묻어 있다. 김 전무는 국화꽃 한 아름을 비석 위에 살포시 놓아두고 참배했다. 준비한 흑백 사진 속에서 전우의 모습을 가리키며 꼭 기억해야 할 그날을 떠올렸다.


1968년 1월 31일. 당시 이들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해병대 청룡부대 특공중대 1소대 3분대 소속이었다. 김 전무는 3분대장(하사)이었고, 황 상병은 분대원이었다.


부대는 1967년 9월 베트남으로 향했다. 베트남 호이안 일대에서 청룡부대 여단 본부의 외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날은 고국에서 구정이기도 했다. 전날인 30일 자정. 갑자기 베트콩의 공격이 시작됐다. 아군인 10중대가 집중공격을 받았다.


특공중대는 즉시 전장으로 달려갔다.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쳤다. 첨병인 김지원 상병이 먼저 적의 총탄에 이마를 다쳤다.


김 전무는 쓰러진 김 상병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압박붕대로 이마를 감아줬다. 그는 또 다른 분대원이 남아 있는 포화 속으로 향했다.


그러던 찰나 적이 쏜 총알이 심장에 스쳤다. 그걸 본 황 상병은 김 전무를 구하러 달려갔다. 적의 공격은 더욱 거세졌다. 황 상병은 김 전무를 온몸으로 막아서며 엎드린 채 그 자리에서 산화했다.


“3일 뒤 눈을 떴을 때, 종만이는 이미 전사했더라고요. 종만이가 아니었다면 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김 전무와 황 상병은 사이가 좋았다. 김 전무는 낯선 땅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황 상병을 위해 먹을 것을 가지고 면회를 가는 등 살뜰히 챙겼다.


그런 김 전무에게 황 상병은 고마움을 느꼈다. 사이좋은 형과 아우이자 전우였던 두 사람, 20대 황 상병과 여든을 바라보는 김 전무는 일 년에 기일과 현충일, 명절날 마주한다. 김 전무는 1972년부터 올해까지 46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현충원을 찾으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달래고 있다.


그는 황 상병 부모님의 아들이기도 하다. 1987년 현충일, 한 방송국에서 이들의 사연을 듣고 황 상병의 가족 찾기에 나선 것. 김 전무는 그 당시 처음으로 황 상병의 부모님을 만났다.


4남3녀 중 장남인 황 상병의 전사 소식은 가족들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술로 달래다 1989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 전무는 맏상제 자리에서 상복을 입고 조문객을 맞았고, 가족들과 같이 장례를 치렀다.


“너무 죄송해서 한동안 뵙기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부모님은 종만이가 목숨 걸고 지켜낸 저를 아들이나 마찬가지라며 가족처럼 대해주셨습니다. 감사하게도요.”


베트남전에 참전한 해병대 청룡부대 특공중대 1소대 3분대원들. 당시 3분대장이었던 김영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시설사업소 전무가 베트남에서 직접 찍은 부대원들의 모습이다. 앞줄 맨 오른쪽이 고 황종만 상병. 뒷줄 맨 오른쪽은 김지원 상병. 사진 제공=김영대 씨


군번만 3개, 베트남전도 2번 참전


김 전무는 군번이 3개다. 1961년 3월 해병대사령부에 입대해 1963년 8월 의장대에서 병장 만기 전역을 했다. 그리고 4년 뒤인 1967년 어느 날, 베트남으로 파병 가는 장병들의 뉴스를 보고 부사관으로 재입대, 첫 번째 파병 길에 올랐다.


구정공세 전투로 흉부총탄상을 입은 채 고국으로 돌아와 치료를 마친 그는 황 상병의 죽음에 복수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1969년 1월, 두 번째 파병 길에 나섰다.


이후 4년간 복무를 한 뒤 1971년 전역했다. 마지막 군번은 1977년 육군보병학교에서 예비역 간부후보 11기로 입교해 육군 소위로 임관해 받았다.


하사로 전역한 뒤 김 전무는 1973년 대구 동구 신암4동 예비군 중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장교 출신 예비군 소대장·중대장이 부족해 병장이나 부사관 가운데 예비역 간부를 선발해 3개월간 교육했다.


김 전무는 임관과 동시에 예비역 소위로 중대장에 원대 복귀, 1983년까지 10년간 중대장 임무를 수행했다. 그 뒤로 2004년부터 현재까지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시설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


집안에 9명이 해병대 출신


걸어 다니는 ‘해병대 홍보맨’으로 불릴 정도로, 김 전무의 해병대 사랑은 끝이 없다. 정장 상의마다 해병대 마크와 단추는 기본. 해병대 반지, 목걸이, 모자 위 배지까지. 해병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해병대전우회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호루라기를 들고 거리로 나서 30년간 교통봉사도 해오고 있다.


그의 해병대 사랑이 전파된 걸까. 김 전무의 집안에는 해병대 출신이 무려 9명이나 있다. 여섯 형제 중 3남인 김 전무의 두 아들을 비롯해 둘째 형의 아들, 4남 김경주 씨, 경주 씨 아들 등 총 9명이다. 명절날 가족들이 모이면 ‘해병대 곤조가’로 군가를 부르는 전통도 있다고.


그는 2012년 ‘상주는 내 고향’, ‘비 내리는 충무로’ 등 앨범을 낸 가수이기도 하다. 예명은 ‘영원한 해병’ 가수 김영대. 해병대전우회 행사는 물론 보훈병원 위문, 양로원, 경로잔치 등 해병대의 위상을 홍보하며 활동하고 있다. 제법 인기가 있어 팬들도 많다고 귀띔한다.


“종만이가 주고 간 목숨을 다해서 해병대를 위해 끝까지 봉사하렵니다. 그래야 훗날 종만이를 만나는 날, 잘 지내고 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네요.”


50년 전처럼 흑백사진 속 황 상병은 김 전무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여전히 미소 짓고 있다.


조아미/사진=조용학 기자


[국방일보] 2017.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