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197기 김금산

[해병대의 기적] 9. 마지막 기적

머린코341(mc341) 2015. 1. 6. 04:26

[해병대의 기적] 9. 마지막 기적

 

복무기간이 엿가락처럼 늘어나 24개월이 36개월이 되었다. 나는 늘어난 1년을 월남전으로 떼울 생각을 하고 병장이 되자 마자 월남전을 지원했다. 운이 좋아 살아서 돌아오면 곧바로 제대하는 것으로 일정을 맞춘 것이다.

 

청룡부대로 참전한 나는 5중대 1소대로 배속이 되었다. 육군은 병과를 참고하여 배속을 시키지만 해병대는 소총소대에서 3-4개월을 복무한 후에 병과를 찾아주는 방식으로 병력을 운영했다. 그 바람에 고참이었던 나는 소총소대 선임조장이 되어 병력을 인솔하는 중책을 떠안게 되었다.

 

그 당시 연예계에 해병대 바람이 불어서 잘나가고 있었던 남진 태원 진송남이 함께 해병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나보다 8개월이 늦은 205기였다.

 

주월사령부는 참전용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위문공연을 실시하려고 가수들을 청룡부대로 참전하게 했는데 청룡부대는 원칙대로 소총소대로 편성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고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느그들이 잘 나갔다는 그 가수들이냐?”

 

“노래 부르느라고 바빠서 훈련을 제대로 받았겠냐?”

 

“이 참에 고생 좀 해 봐라.”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월남 고참들은 그들을 뺑뺑이 돌렸을 것임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월남전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전투보다 부비추렙이었다. 부비추렙은 베트콩이 수류탄을 인계철선으로 연결하여 매설한 지뢰로, 철선을 발로 건드리면 터지고 터질 때마다 발목이 부러진다 하여 발목지뢰로 불렀다.

 

그리하여 해병대는 작전을 수행할 때는 부비추렙을 피하려고 선임조장이 밟은 발자국을 따라 밟으면서 병력을 이동시키곤 했다.

 

나는 월남의 열사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월남전 생리를 이해할 사이도 없이 3박4일 작전 수행을 위해 중대 병력을 인솔하게 되었다. 내가 병장을 단 고참이기는 했지만 월남전에서는 전투 경험이 전무한 월남 쫄병이었다.

 

더구나 나는 보병훈련을 받지도 않았고 연평중대에서 선생 대접을 받으면서 지내다가 참전하게 되었으니 기합도 많이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월남 고참들이 꾸려주는 대로 완전무장을 하게 되었는데 무게가 40kg이 넘는 것 같았다. 신병훈련소를 수료한 이후로는 힘든 훈련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였다.

 

선임조장이 중대 병력을 이끌기 위해서는 기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처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는 기동력을 발휘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나의 장비 중에는 불요불급한 것도 있어 보였다.

 

월남 고참들은 내가 보급 병과이고 도서부대에서 복무한 사람이어서 돈도 있고 빽도 있다고 생각하여 “고생 좀 해 봐라.”는 심뽀로 그들이 소지할 병기를 나에게 짊어지게도 했다.

 

물정을 모르는 나는 그들의 병장기를 떠 안지 않을 수 없었다. 월남은 한 낮의 온도가 40도을 훨씬 넘었다. 고생도 훈련도 모르던 내가 무거운 장비를 매고 비지땀을 줄줄 흘리면서 최 일선에서 부비추렙을 살펴가며 중대병력을 인솔하기 시작했다. 목이 금방 타 올랐다. 수통 1개를 비웠는 데도 갈증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

 

나는 갈증을 참을 수 없어서 수통 한 개를 더 비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을 먹을수록 목이 더욱 타들어갔다. 휴대용 소금을 먹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갈증을 견디지 못한 나는 수통을 더 비우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리에 찼던 수통 5개가 모두 바닥이 났다. 아껴서 먹어야 하는 물을 한꺼번에 퍼먹었는 데도 갈증은 조금도 가실 기미가 없었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훈련소에서 11인분 밥을 먹어 밥이 목구멍까지 찼는데도 더 먹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현상이 또 다시 나타났던 것이다.

 

전쟁터에서의 낙오는 죽음과 직결이 되는 일이어서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나는 연평중대에서의 낙오를 재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 사력을 다 했지만 그것은 생각일 뿐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갈대를 헤치며 발걸음을 움직일 때마다 정신이 더욱 혼미해져 갔는데 그것은 연평중대에서의 구보와 같은 것이었다. 그 때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이번에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갈대를 헤치며 무의식적으로 발걸음을 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폭발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때렸고 나는 인계철선을 건드렸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다낭의 미해군 병원에서였다. 내가 인계철선을 건드려서 부비추렙이 터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나는 부상을 당하기는 고사하고 전신에 파편조각 하나 박히지 않았다.

 

재수가 없을 때는 고막이 터지기도 하는데 나는 고막도 터지지 않았다. 정신이 멍멍했을 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미해군 의사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말했다.

 

전상이 경미하면 원대복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상처 하나 없는 나는 5중대  1소대로 다시 돌아갈 각오를 했다. 그런데 미해군은 정신요양이 필요하다면서 나를 청룡부대 의무중대로 보냈다.

 

의무중대장은 내가 멀쩡한 것을 보고는 간호보조로 사용하는 바람에 나는 의료상식도 없이 환자들에게 링거 주사를 놓는 등의 의료수발을 들어주면서 4개월을 지내게 되었다. 소총소대에서 박박 기어야 할 내가 4개월을 의무중대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무중대에서 퇴원한 나는 보급병과로서는 최상급 부서에 해당하는 청룡여단 보급참모실로 발령을 받았고 귀국할 때까지 행정병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소총소대 월남 고참들은 나에게 무거운 장비를 매게 하여 기진맥진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기적의 신은 부비추렙 폭발에서 전상을 입지 않도록 보호하고, 미해군 병원은 의무중대로 보내고,

 

의무중대장은 나를 조수로 사용하면서 사지에서 벗어나게 하고, 청룡부대 인사참모는 보급참모실로 보내어 다시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도록 협력했던 것이니 참전 용사들에게는 미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나로서는 기적의 연속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겪은 마지막 기적은 귀국을 보름 앞두고 일어났다. 나는 의무중대에서의 생활이 인연이 되어 의무중대 해군 하사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의무중대 하사들은 나의 무사 귀국을 축하한다면서 라면파티를 열어주었다.

 

환자 대기실에서 7명이 곤로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의무중대는 라면을 알코올로 끓여서 먹곤 했는데 그것은 관행이었다.

 

그 날도 알코올로 라면을 끓였다. 그런데 곤로에 알코올이 떨어져 불꽃이 꺼질락 말락하여 알코올을 보충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알콜을 보충하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나의 등 뒤에 있는 5갈론 알코올통이 눈에 띄었다. 내가 곤로에 알콜을 보충한 것은 한 두 번 해본 일이 아니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알코올통을 들고 곤로에 부으려고 하자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손 하사가 갑자기 일어나 “귀국하는 사람에게 일을 시키는 것은 예가 아니다.”고 말하면서 나를 제지했다. 손 하사의 만류에 내가 비켜서자 그가 내 앞에서 알코올통을 들고 곤로에 붓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알코올통이 ‘꽝!’ 하는 폭발과 함께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공중으로 치솟아 천정에 부딪쳐 폭발하고, 불덩이와 알코올이 사방으로 튕겨져 떨어지면서 대기실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대기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옷에 불이 붙은 사람은 불을 끄려고 바닥에 나뒹굴고, 옷의 불을 끈 사람은 대기실의 불을 끄려고 아우성을 쳤다. 그런데도 나의 옷에는 불덩이는 고사하고 알코올이 한 방울도 묻지 않았다.

 

그 사고로 손 하사는 3도 화상을 입었다. 그는 얼굴에 불이 붙어서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로 심한 화상을 입고 한국으로 후송되었다. 내가 당했어야 할 화상을 손 하사가 대신 입었던 것이다. 내가 만약 알콜 붓기를 고의로 회피했다면 천벌을 받았어야 할 것이다.

 

내가 손 하사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그는 “나도 모르게 알콜을 대신 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운명이라며 쓸쓸하게 웃었다. 손 하사에게는 미안하기 그지 없었지만 나로서는 또 하나의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돈도 빽도 없고, 종교도 없었던 나에게 어떻게 그런 기적 같은 행운이 계속해서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과연 우연이었을까? 내가 경험했던 기적과 행운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기적과 행운은 입대하여 제대할 때까지 나를 계속 따라 다니면서 생겨났지만 나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남들이 말했던 것처럼 억세게 운이 좋았다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내가 행운의 정체와 이유를 깨닫게 될 때까지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했다.

 

나는 김신조 때문에 육군보다 6개월을 더 복무하고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기적과 행운 덕분에 군복무를 편하게 하고, 월남전에서 입었어야 할 전상을 당하지도 않고, 대학을 마칠 수 있는 학자금까지 벌게 되었으니 이 세상에 나처럼 운 좋고 재수 좋은 사람이 또 있을지 모르겠다.

 

1부 해병대의 기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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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연재한 글은 제가 직접 체험하고 경험한 100% 실화입니다. 해병대 시절에 저는 깨달음은 고사하고 명상과 수련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기독교에 심취한 적이 있었지만 고2 때 기독교와 결별한 후에는 종교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같은 경험을 행운, 기적, 운과 재수로 말하고 저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는 그것을 벽(장벽)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가 불가능한 벽은 지천에 깔려 있습니다.

 

불가사의, 미스테리, 본능, 신비, 하느님의 은총, 의사가 병을 고치지 못할 때마다 읊어대는 체질타령과 신경성타령도 벽이고, 원인도 증상도 없이 갑자기 죽은 사람을 심장마비. 심근경색, 돌연사로 표현하는 것도 벽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경험했던 기적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었는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자는 뜻에서 경험담을 쓴 것이니 나름대로의 생각과 지론이 있으신 분은 댓글을 달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 : 해사사 카페, http://cafe.daum.net/rokmarinecorps/6bOu/1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