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수기/해병158기 이장원

청룡 1진의 기억 -(17) - 애증의 투이호아..

머린코341(mc341) 2015. 1. 13. 22:22

청룡 1진의 기억 -(17) - 애증의 투이호아..

 

투이호아 해변 모래 밭에 세운 청룡부대 여단 본부에 내가 처음 도착한 것은 첫 전투가 이미 끝난 1966년 1월 하순 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투이호아 전투를 위해 청룡 본대가 이리로 이동해 간 것은 1965년12월22일, 본격적인 전투인 "청룡 1호 작전"은 1966년 1월 12일에 시작했다고 “해병대 역사”에 기록하고 있네요.



내가 소속된 2대대와, 3대대가 주력으로 투입되고 1대대는 예비대대로 여단본부 외곽을 경계하였읍니다.

이 작전은 전투가 막상 시작되자 베트콩의 저항은 생각보다 훨씬 강력했고 규모도 예상보다 큰데다 우리에게는 처음으로 해 본 대규모 교전이어서 아군의 피해도 소대장 1명의 전사를 포함하여 상상외로 컸습니다.

아마도 까투산의 첫 전투가 의외로 쉬웠고 해병대 지휘관들이 전선 없는 전쟁 월남전에 익숙하기전에 전공을 세워 보고자 하는 의욕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나중에 해봤읍니다.

 


(후 청룡 월남수기 자료사진 - 투이호아 전선)

희생자가 생기는 만큼 - 본국에서 보충병력이 금방 도착할 수는 없으니까 후방 잔류 요원도 모두 본대로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드디어 월남속의 월맹이라는 투아호아의 전쟁 터에 도착하게 되었읍니다.

낮에는 전투에 참가하고 밤에는 대대 인사과로 가니 할 일이 산더미 같이 밀려 있었습니다.

최소 인원을 제외하고 모두 소총 소대로 내려가 전투에 참가한 상황이라 아무 소리 못하고 이 일들을 해 내느라 그 후 두 달 동안 집으로 편지 한 통을 써 보내지 못해, 아버님이 외아들이 월남전에서 전사했는가 싶어 생사를 알아보려고 해병대 사령부로 육군 중앙 경리단(송금을 보내주는 곳?)으로 확인을 하러 다니며 애간장을 태우셨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각중대 서무병들이 대대 본부에 들릴 때마다 이야기를 해 주었고, 또 훈포장 상신을 위해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했기 때문에 2대대의 각 중대에서 있었던 실제 전투상황은 비교적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위 사진 A - 지점 - 투이호아로 가는 험난한 1번 국도 - 우측 바다가 봉로만 미군 군사기지)

투이호아는 길고긴 월남땅에 중부 제1일의 곡창 지대로 하노이 월맹군 본부에서 가장 무장된 정규군을 파견하여 주민을 베트콩화 시켜 중부 전선과 그 이남 게릴라 전선에 군량미를 대는 곳입니다.

군사적 요충지는 서로간에 절대 필요한 것이어서 미군은 투이호아 봉로만에 중부전선 최고의 군항을 만들고 똑같이 중부 전선 아군에 전략 물자를 제공하는 거점으로 삼았으나 투이호아 혼바산 동굴속에 베트콩들이 밤마다 봉로만 미군 기지를 습격하고 낮에는 혼바산 동굴속에 숨으니 미군은 한국 해병대에 투이호아 평정을 맡기게 됩니다.

월남의 유일한 도로인 1번 국도도 이곳 험준한 투이호아 혼바산에서 베트콩에의해 두절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후 청룡 수기 자료 사진 - 자취도 없지만 힘들게 투이호아 쳥룡 본부터를 찾아주신 분들께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시련을 극복하며 투이호아 전선을 거의 평정해 갈 무렵 해병대는 다시 투이호아를 백마부대에 인계하고 추라이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게되고 이인호 대위도 잃으면서 경악하게 됩니다.

청룡가의 가사에도 있듯이 - 삼군에 앞장서는 해병이지만 투이호아에서의 아픔이 너무 컷고 어느정도 안정이 될때쯤 낯선 전선으로 이동 명령에 술렁이게 됩니다.

수많은 전우가 숨져가며 평정한 투이호아 -- 그래서 떠나기 어렵고 전장을 선구하는 해병대에 내려진 이동명령 -- 그래서 떠나야 하는 애증의 투이호아 였읍니다.


 

출처 : 파월 제1진 청룡부대 2대대 해병158기 이장원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아! 청룡이여 제1권 캄란에서 호이안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