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수기/해병158기 이장원

청룡 1진의 기억 -(19) - 급여와 송금.(우리는 용병이었나).

머린코341(mc341) 2015. 1. 15. 06:56

청룡 1진의 기억 -(19) - 급여와 송금.(우리는 용병이었나).

 

나는 일병으로 가서 병장으로 귀국했습니다.

13개월 동안 모두 대략 U$500 정도 받았는데
그 중에 U$480 정도를 오히려 85%를 넘게 집으로 송금했습니다.

현지에서 쓴 돈이라고는 작은 카메라 하나와 라디오 하나 산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카메라는 귀국할 때 팔아서 돈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이 그림은 1966년 3,4월경,
월남 투이호아 전선의 청룡 여단 2대대 본부 상황실 한 귀퉁이입니다.

모래밭에 가슴 높이의 대형 참호를 파고 천막으로 덮어 그늘을
만들어 대대 본부 각 부서가 들어와 행정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탁자 옆 상자에 서류가 가득 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서류와 인주와 주판이 보입니다.
이 서류가 무슨 서류인가 하면 6백여명 대대 전인원의 급여와 본국 송금 서류입니다.

중대 본부 서무병은 중대원의 신상 기록부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정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서류는 대대 인사과에서 만들었습니다.

장교들은 대체로 급여중 자기가 원하는 만큼 본국으로 송금을 했지만
사병들은 무조건 급여의 85%를 본국으로 송금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매월 전 대대의 송금 신청서를 내가 다 만들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 군대의 월남 파견 수당은 필리핀 군대 보다 적었는데
그것은 그 때 필리핀 국민 소득이 우리 보다 높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병이 월 U$27, 일병이 U$36, 상병이 U$45, 병장이 U$54 였습니다.
하사관은 아마도 U$7,80,장교는 U$100 이상이었을 겁니다.

 


(1만 달러의 거금을 멘 행정병 시절 - 이라고 써있네요)

내가 월남에 가 있는 동안 우리집은 이 송금으로 동생들 공부시키고 먹고살 수 있었습니다.

내가 돈 벌려고 월남으로 간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월남 파견 수당이 우리 식구들을 먹여 살린 것입니다.

최근 독일 월드 컵과 더불어 파독 간호사와 광부 이야기가 새삼 화제가 되고
그 때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가와 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으며 나라 경제에
얼마나 보탬이 되었나 하는 이야기를 다시 떠 올렸습니다.

그러나 월남 파병에 대해서는 세상이 바뀐 탓인지 양민 학살 운운 하면서 무슨
대역 죄인 취급을 하는 신문, 방송, 시민 단체가 나오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채명신 장군 혼자만이 동분서주, 국민의 이해를 얻으려고 고군분투하는 듯 합니다.
이념의 옳고 그름은 결국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선악을 기준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이 나쁘고 평화가 좋은 것은 인류 일반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궁극적인 평화를 위한 선한 전쟁도 분명 있고,
해악이 되는 천추에 용서 받을수 없는 평화 주장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청룡 여단 인사과 천막입니다.)


급여를 받고 송금을 하려면 여단 인사과에서 이렇게 확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대대에서 여단 본부로 이동하려면 무장을 하고 움직여야 하므로
내 옆에는 엠원 소총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림 왼 쪽이 입대전 충청도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다는 153(?)기 송병장입니다.


(자료사진 -- 밤샘 매복 철수후 - 깡마른 눈빛)

누가 우리를 청룡을 용병이라 합니까 ?


우리는 조국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사를 걸고 송금한 돈으로 우리의 고속도로를 처음 건설했다는 것도 자랑으로 하진 않겠읍니다.

 

이젠 노병이 힘이 없다면 - 後 靑龍을 비롯한 후세에게 부담을 드릴까 합니다.

 

출처 : 파월 제1진 청룡부대 2대대 해병158기 이장원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아! 청룡이여 제1권 캄란에서 호이안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