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수기/해병158기 이장원

청룡 1진의 기억 -(21) - 미제 군수품과 P.X 이야기

머린코341(mc341) 2015. 1. 27. 07:41

청룡 1진의 기억 -(21) - 미제 군수품과 P.X 이야기

 

*** 두번째 기억은 미제 군수품과 P.X 이야기 입니다 ***

1965년 10월3일, 수송선에 오르면서부터 모든 보급은 미제로만 이루어집니다.
선내에서 일주일 내내 주는 미제 급식. 입맛이 황홀합니다.

꼭 1년 동안,
그러니까 1964년 10월4일 선서한 날부터 3개월은 훈련소 훈련으로,
다시 1965년 실무 배치 직후의 상륙전 참가와
7월부터 3개월은 파월 특별 훈련으로 얼마나 쫄쫄 굶었습니까?

캄란 만에 상륙한 뒤 자리가 잡혀 가면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겼습니다.

차를 타고 캄란 만을 지나가 보면
캄란 만 천지가 온통 미군 군수품으로 가득가득 쌓여 있습니다.

수 십년 전쟁으로 지새고 있는 월남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이 끝난 지 12년 밖에 안 되는
우리에게도 이 흔한 미군 물자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에는 직접 몰랐지만 - 후청룡의 전언으로 캄란기지는 현대식 차로도 70분 직진거리라합니다)

엠원 소총을 매고 간 우리에게 처음 월남 적응 훈련을 설명하던
미국 공수부대의 엠16과 헬리콥터와 각종 화기와 수송 장비는 어떠했습니까?

한 장교께서 말씀하시기를
"6.25 때 이 화력의 십분의 일만 있었어도 전쟁은 그냥 끝낼 수 있었겠다" 고 부러워했습니다.

과연 미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물량 작전으로도
월남전쟁을 이기지 못하고 철수했으니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1966년 5월 2대대가 예비 대대로 빠진 직후에 오윤진 중령께서 여단 작전 참모로 명을 받아
여단 본부로 옮기는 바람에 결국 그 좋은 예비대 생활을 제대로 못 해보고
다시 여단 본부의 작전 지휘부로 갔다가 귀국하고 말았지만

월남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뒤의 1진의 마지막 예비대 생활을 한 2대대 전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산더미 같았던 미군 군수물자를 이용한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았다고 합니다.

한국에 주둔한 미군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월남은 더 했겠지요.
대강의 영어만 좀 되면 미군 부대의 보급 담당을 찾아가
동맹군, 한국군임을 밝히면서 막사를 짓는 데 필요하니 건축 자재를 좀 달라고 하면 그대로 오케이!

일단 오케이를 받으면 온갖 자재를 차떼기로 싣고 나와 월남 상인들에게 팔아
넘겨 돈을 만든 뒤 유흥가에 가서 신나게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P.X. ( Post of Exchange) - 피엑스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습니다.

나야 학생으로 입대했으니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몰랐지만
우리나라의 미군 피엑스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월남의 미군 피엑스를 맘껏(?) 이용했다고 합니다.

수송선에 승선했을 때 이미 모든 부대원들에게 미군 피엑스 이용 카드가 한 장 씩 주어졌습니다.
설명을 들어도 그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몰랐지요. 알아도 어쩔 수도 없었고요.

이 카드에는 일년간 각 사람이 미군 피액스를 이용할 수 있는 물품 내역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담배는 일 주일에 얼마, 술은 얼마 등등입니다.
카메라는 일 년에 몇 대, 텔레비, 냉장고는 몇 대 이렇게요.

예비대로 빠진 어느 하사관이 이런 내용을 다 알고, 아무것도 모르는 분대원들의
피엑스 카드 열 장을 모두 걷어 주머니에 넣고 사이공으로 날아 간 겁니다.

미군 부대에 가서 말만 잘 하면 비행기도 그냥 태워 줍니다.

-- 주월 한국군 사령부에 전령(messenger)로 간다…”등등. --

사이공 미군 피엑스 앞에 가면 월남 상인들이 달려 옵니다.
자기들이 필요한 물건을 말하면서 값을 두 배 또는 몇 배를 준다고 말합니다.

피엑스 카드 열 장을 들고 갔으나 그 카드를 다 쓰면 엄청난 돈을 모으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돈을 모아 귀국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이공에서, 나쨩에서 신나게 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청룡 2대대 인사과 오른쪽에서 이정호, 신성영 하사, 오승홍 병장, 김경중, 이장원, 박민호, 김유성)

청룡 1호 작전 초입에서 예상치 못한 엄청난 손실을 당하면서
비로소 우리는 베트콩을 제대로 인식하고 전투 자세를 잡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번 국도의 확보와 주둔 지역 주민의 안정을 위해 주간에는 전투 정찰,
야간에는 매복으로 점령지역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 과정에서 청룡1호 작전과 같은 규모의 전면전은 없었지만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투가 주간의 전투 정찰 중에 또는 야간의 매복 작전 중에 이어졌습니다.

대대 내에서는 중대별로 항상 2개 중대가 전방에서 전투에 투입되고
1개 중대는 예비대로 대대본부 외곽 경계를 맡았습니다.

작전 기간이 끝나고 전투 중대가 예비대로 들어 오는 날,
인사 과는 그 때부터 후생 서비스 작전이 시작됩니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여단 PX에 가서 맥주를 확보해 와야 합니다.
맥주는 각자 사 마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양은 인사에서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맥주를 공급한 다음에는 편지지와 봉투, 그리고 볼펜을 공급해야 합니다.
이런 물건은 여단 PX에 없습니다.

편지지와 볼펜 조달을 위해 시내 상점으로 나갈 수 밖에 없습니
그래서 단골 문방구가 생겼습니다.

점원 아가씨가 예뻤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도리가 없습니다.

 


(투이호아 시내로 문방구 조달을 나간 PX 반장(?) 문방구 아가씨가 예뻤는데 말을 모르니…)

진급 정리와 봉급 수령은 일상 업무 였지만 본국 송금은 월남에서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전 대대원의 송금 서류를 내가 다 만들었습니다.

작전이 끝난 뒤 그 다음으로 하는 일이
전상자 후송에 따른 처리와 전사자 발생에 따른 서류였습니다.

모든 서류를 대대에서 만드는데 전사자 한 사람에 필요한 서류가 일곱 장이니
아홉 군데에 보고서를 보내야 하므로 63장을 만드는 겁니다.

지금처럼 복사기가 없었으니 먹지를 끼우고 한 번에 다섯 장씩 쓰면 열세 번을 씁니다.

마지막으로 해야 하는 일이 훈장 및 표창 상신입니다.

작전이 끝나면 상부에서 우리 부대에 배당되는
훈포장의 종류와 수가 하달되고 대대 참모 회의에서 해당 인원이 지명됩니다.

그러면 개개인에 대한 공적 조서를 작성합니다.
6하 원칙에 입각하여 어떤 공훈을 세웠는지 설명 합니다.


(행정병 출동이라 씌여진 사진 행낭에“때로는 1만달러의 거금이 들어 있기도 했다”고 써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서류 작성에 피엑스 업무까지 맡아 물건 조달하랴 돈 관리하랴
두 명은 이미 소총 소대로 내려간 터라 끝없이 계속되는 일로
얼마나 시달리고 피곤했는지 두 달 동안 집으로 편지 한 장을 못 써 보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인사 부관인 해간 32기 문병훈 중위가
소총 소대에 비하면 대대 본부는 덜 위험하니까 어쩌겠느냐 싶었는지
어찌 몰아 부치는지 드디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습니다.

면담 요청을 하고 더 이상 인사에서 일 못하겠으니
나도 소총 소대로 내려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는 일 손을 놓았습니다.

다른 한 명의 선임도 같이 사보타쥐를 선언했는데 인사 부관이
그 선임은 붙잡기로 하고 나는 내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경우 중대 소속이 바뀌려면 대대장의 결제를 받아야 하니까
그렇게는 못하고 본부중대장의 동의를 얻어 내어
같은 본부 중대 소속인 박격포 반으로 옮기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대대 인사과에서 전투 병과인 박격포 반으로 옮겨
포판수 직책을 받아 7중대로 파견되었습니다.

이제 나도 대대 본부 행정병이 아닌 전투 일선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 드디어 귀국자 명단에 나의 이름이 나왔읍니다.



출처 : 파월 제1진 청룡부대 2대대 해병158기 이장원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아! 청룡이여 제1권 캄란에서 호이안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