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수기/해병158기 이장원

청룡 1진의 기억 - (23) - 43년 후의 월남전선을 다녀와서...

머린코341(mc341) 2015. 6. 1. 06:18

청룡 1진의 기억 - (23) - 43년 후의 월남전선을 다녀와서...

 

우리가 월남에 간 의미는 무엇인가? (1)

 

이번 해병대 월남 전적지 탐방을 떠나면서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더니 여러분이 격려를 해 주는 가운데, 내가 1966년 투이호아에서 추라이로 이동한 뒤를 따라 들어 온 백마부대와 함께 월남으로 와 냐짱에서 십자성 부대의 후송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하면서 연일 후송되는 전상자를 돌보며 일년을 지내고 온 참전유공자인 친구가 “牛亭(나의 아호)!  이번에 가거든 우리가 거기 간 의미가 지금은 무엇인지 알아 보고 와서 이야기해 주시오.” 하고 숙제를 줍니다.

 

“우리가 월남에 간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가 그토록 희생한 의미는 지금 무엇인가?”

 

나는 이번 청룡 전적지 탐방 7박8일의 여정 내내 이 화두를 붙잡고 씨름을 했습니다.

 

월남파병은 1965에서 1971년에 걸쳐 6년간이었고 총 32만 명이 참전합니다. 이 기간 동안에 경부 고속도로가 1968-1970년에 완공되었고 포항제철이 1970-1973년에 완공됩니다. 이어 현대 조선소가 1973-1974년에 걸쳐 완공되면서 일련의 국내 대규모 토목 공사가 끝이 납니다. 현대 건설은 이 대규모 토목 공사에 투입된 장비구입에 동원된 부채를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1972년 8월 3일, “사채 동결조치”가 내려지지 않았으면 그대로 부도가 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어 1973년 11월 제 일차 오일쇼크가 옵니다. 1배럴에 U$2.5 이던 원유값이 U$11.0로 뛰어 오릅니다. 1974년 정부는 극심한 외환보유고 부족으로 국가 부도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한 편 오른 기름값으로 돈이 쌓인 사우디 아라비아는 각종 공사를 발주하기 시작합니다. 선택의 길이 없는 정주영 회장은 결심합니다. 

 

“중동으로 나가자!” 사우디의 각종 토목 건축공사에 입찰합니다. 낮은 가격으로 속속 공사를 따 옵니다. 중동 사막에 20만 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투입됩니다. 우리에게는 지난 6년간 월남의 정글에서 더위와 전투에 단련된 우수한 노동력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해외 공사 현장 근무가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죽고 사는 전투도 했는데 국내에서 받을 수 없는 좋은 급여에 전투도 아닌 건설현장 일을 누가 두려워 하겠습니까? 그때까지 사우디 왕실의 발주 공사를 독식해 오던 유럽 건설회사들이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을 음해합니다. 

 

“한국 근로자는 모두 군인이다. 총만 들리면 순식간에 군대로 돌변한다.”

 

군대가 전부 3만 명 밖에 안 되는 사우디 정부에 한국 회사에 공사를 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건설회사들은 해외건설 근로자가 사우디 비행장에 도작하면 즉시 인원 파악을 위해 실시했던 “앉아 번호”를 절대로 비행장에서 못하게 하고 즉시 숙소로 이동한 뒤 숙소 앞에서 인원 파악을 하도록 했습니다.

 

1976년부터 외화로 건설 공사 대금이 국내로 쏟아져 들어 옵니다. 이 때 비로소 남한은 경제적으로 북한보다 우위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월남에 간 의미는 무엇인가? (2)

 

우리가 청룡 전적지 탐방을 간다고 하니까 모두가 묻는 말이  “괜찮아?  월남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하고 물어 옵니다. 나 같이 직접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은 적어도 일말의 부담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전혀 월남을 한 번도 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 마저 왜 그런 생각을 할까요?  말하자면 사죄 어쩌구 했다는 구수정이라는 학생도, 그걸 실어 준 한겨레 신문도 말입니다. 

 

미국 영화에 찌든 일단의 젊은 사람들의 무식이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대민 봉사를 했지 양민 학살을 한 예가 없습니다. 그 때 "양민 학살" 이란 말은 전쟁중에 있는 적군이 상대방의 사기 저하를 위해 만들어 낸 "프로파간다"였습니다. 특히 청룡부대와 같은 소규모 전투부대 운영에서 오는 노획무기의 숫자가 적은 것을 이유로  몰아부쳐진 "선동 선전"이었을 뿐입니다. 

 

심지어 10년 전(1998년) 처음으로 사이공에 가 봤다는 신영복 씨도 그의 여행기 “더불어 숲”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내가 베트남에 올 때 가장 석연찮은 것이 당신도 이야기하였습니다만 베트남 사람들의 가슴에 전쟁과 함께 응어리져 있을 ‘따이한’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에 머무는 한 주일 동안 그들의 표정이나 말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그런 응어리를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다행스럽기도 하고 더욱 난감하기도 합니다.…..” 

 


(호이안에서 만난 다낭에서 온 불교 신도 회원들.  사진을 찍자고 하니 회장인 듯 한 분이 회원들에게 모두 이렇게   전통복으로 갈아입도록 권유했습니다.  외국인과 찍는 사진이니 월남 고유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려고 한 듯. - 호이안 박, 사전 하락도 없이 저작권을 침해했습니다.  용서하실 줄 믿슘니다!!!)

 

그 사람들은 아무도 응어리 진 일이 없다는데, 왜 거기 가서 전투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 왜 석연찮고, 왜 난감할까요?  참으로 우스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 못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즉 그 때 우리는 결코 가해자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우리와 치열한 전투를 한 베트콩이나 월맹군도 결코 피해자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전투는 치열했을지언정 우리는 결국 모두 패권주의자들의 피해자였습니다.

 

이번 탐방을 하면서 보고 듣고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현재, 월남의 40세 이하의 인구가 75%라고 합니다. 우리가 철군한 1971년에 난 사람이라도 38세가 됩니다. 그러므로 인구의 75%는 참전 따이한에 대한 의식 조차도 전혀 없습니다. 7살이나 되야 듣고 자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고 치면, 지금 43살은 넘어야 “따이한”에 대한 어렴풋한 의식이나마 있을까 말까 할 겁니다.

 

응어리가 있으려면 적어도 17도 이남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베트콩 가족을 가지고 있었던 52 살이 넘은 사람들일 겁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을 얼마나 만날 수 있을까요?

 

("후에" 황궁에서 만난 사이공 대학생들. 사진을 찍자고 하니 주변의 모든 학생들이 모두 몰려 왔습니다. 희망에 부풀어 있는 자신 있는 모습들 아닙니까?)

 

둘째, 현재, 월남의 모든 실권은 하노이 사람들이 잡고 있다고 합니다. 하노이 사람들은 따이한과 물리적으로 부딪쳐 본 적이 전혀 없습니다. 하노이 사람들은 통일 후 남부에 사회주의 체제를 강요했다가 엄청난 온갖 어려움을 경험하고 끝내는 1986년 “도이모이”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다만 지금 한국이 얼마나 잘 살고 있는 나라이고, “따이한”이  얼마나 부러운지 모를 뿐입니다.

 

경제발전의 모델이 한국입니다. 모든 제도는 한국의 것을 본받고 따르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응어리는커녕, 한국처럼 좀 더 일찌기 자유주의 편에 서지 못하여 자기 국민들을 굶기고 헐벗게 한 적이 있었던 허물을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 공산당 서기장 팜 반 동은 직접 월남 국민들에게 자기들은 공산주의가 월남 국민들을 위하는 길인 줄 잘 못알고잘 못 따라갔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월남도 자국의 군사력도 높이고 국제사회에 기여도 하기 위해 외국에 군대를 파견하여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세창 중위님이 41년 전 짜빈동 동네에서 만났던 "렁"네 식구들에게 따뜻한 선물을 전했습니다.  짜빈동에서 우리와 월남 사람들과의 그 때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듣기로는 1975년 통일이 된 이후, 1946년 이후 우리의 북한에서 박헌영 이하 남로당이 김일성에 의해 일차적으로 제거되었 듯이, 17도 이남의 베트콩은 일차적으로 “토사구팽”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17도 이남에서 따이한에게 응어리 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짜빈동 전투 현장 그 동네에서 만난 어린이들입니다.  가운데 가장 예쁜 "꼬 잉"은 귀고리도 달고 있는 14살의 숙녀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천사들입니까?  40 여년 전 우리에게 "담배. 담배" 하며 따라 오던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 모습이 지금 우리와 월남 사람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넷째, 우리는 자유 월남 공화국을 도와 17도 이남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지금 17도 이남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우리와 함께 싸웠던 자유 월남 공화국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베트콩이 차단하고 있던 그들의 일 번 국도를 소통시키기 위해 싸웠고, 그들의 추수를 보호하기 위해 싸웠고, 수십 년 전쟁에 찌든 그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고, 치료도 해주면서 온갖 정성을 다 했습니다. 따이한에게 무슨 응어리가 있단 말입니까? 

 

자유 월남이 주도하여 통일하지 못한 회한이 있을 뿐일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월남 전선

 


1965년 12월, 동바틴에 주둔하고 있던 초창기,
비행장에서 우편물을 수령하여 Ferry를 건너 다녔습니다.

 

수송선에 타면서부터 두어 달, 미국제 식사만 했더니 마음은 불안했어도 금방 살이 오른 모양입니다.


" 1965년 10월3일, 수송선에 오르면서부터 모든 보급은 미제로만 이루어 집니다.
선내에서 일주일 내내 주는 미제 급식. 입맛이 황홀합니다.

꼭 1년 동안, 그러니까 1964년 10월4일 선서한 날부터 3개월은 훈련소 훈련으로, 다시 1965년 실무 배치 직후의 상륙전 참가와 7월부터 3개월은 파월 특별 훈련으로 얼마나 쫄쫄 굶었습니까?

캄란 만에 상륙한 뒤 자리가 잡혀 가면서 주위를 둘러 볼 수 있는 여유가 조금씩 생겼습니다. 차를 타고 캄란 만을 지나가 보면 캄란 만 천지가 온통 미군 군수품으로 가득가득 쌓여 있습니다.

수 십년 전쟁으로 지새고 있는 월남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쟁이 끝난 지 12년 밖에 안되는 우리에게도 이 흔한 미군 물자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때, 우리들과 함께 이 곳에 있던 월남 사람들은 다 같이 "풍요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중이었으면서도 또한 서로가 문화적 충격을 주고 받습니다.


"잘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라는 확실한 개념이 우리와 월남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이 됩니다.
이런 인식이 없으면 "잘 살아 보자!" 라는 의욕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2008년 3월, 지금의 캄란만입니다. 건너 편 왼쪽 육지가 처음 주둔했던 동바틴입니다.)

 

지금은 미군도 떠나고, 쏘련 군함도 없고 그냥 월남 해군 기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접근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많던 미제 군수품도 흔적 없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 머리에 박힌 "풍요의 인식"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지금 너무도 뚜렷하여 날로 고도 성장으로 치닫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니다.

 

멀리서 버스로 지나가면서 사진만 찍었습니다. 낡은 오두막 같은 작은 초소를 제하고는 해군 기지라는 표도 전혀 없고 얼마나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해변입니까?

 

드디어 첫 전투의 명령이 2대대에게 주어졌습니다. 바로 이 산, 판랑 옆에 있는 "까두"산입니다.

 

 

43년 만에 그 "까두"산 앞에 섰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뒷 편 산록에 대대 본부가 위치하고 산 아래로 6중대와 7 중대가 좌우에 붙고 5 중대는 예비대로 대대 본부를 경비했습니다.

 

그리고 산정으로 진격해 올라갔습니다. 그 때 지휘관들 이 그림을 보신다면 긴장되었던 첫 전투의 기억이 더욱 선명할 겁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의 긴장에 비해 너무나 미약했던 베트콩의 저항은 곧 투이호아 전투를 너무나 가볍게 생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냐짱 롯지에서 내려다 본 냐짱 해변입니다. 오른 쪽 끝 해변으로 무수한 미군 부대 천막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투이호아로 옮겨 가기 전까지 몇 차례 냐짱으로 심부름 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투이호아로 옮겨 갑니다. 청룡 1호 작전을 위하여!!!
 

 

봉로 만이라고 합니다. 왼 쪽 끝에 있는 산을 점령하고 있던 베트콩이 이 봉로 만을 드나드는 미군 함정들을 공격하므로 이를 차단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합니다.

 


그 산의 꼭대기가 바로 이 혼바산이라고 합니다. 이 일대가 베트콩에 의해 완전 점령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보니 과연 녹녹하지 않았을 베트콩의 기지였겠다 싶습니다.

 

그들을 제압하고 투이호아 평야의 평온을 위하여 소대장님도 쓰러졌고 그 많은 전우들과 또 그 많은 베트콩 전사들도 이름도 없이 없이 쓰러져 갔습니다.
 


 

산 아래 이어진 들판입니다. 여기가 바로 청룡 1호 작전의 현장이었을 겁니다. 얼마나 많은 전우들이 여기서 쓰러졌는지, 얼마나 많은 베트콩들은 희생이 됐는지???

 

까두산의 상황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평화롭습니까? 호이안 박은 넓은 들을 볼 때마다 "이런 좋은 들이 있다면 농사 한 번 해 볼 만 하겠다"고 연신 감탄했습니다. 

 

 

 

투이호아 해변 모래 밭에 있던 여단본부의 한 귀퉁이의 인사과 천막입니다. 충청도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여단 일보 담당 152기 송해병의 확인이 있어야 봉급이 지급되고 집으로 송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청룡1호작전의 목적이었던 봉로만 입구를 지나가는 해변입니다. 해변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 투이호아에 이렇게 우리의 흔적을 남기려 했습니다.)
 

(그러나 "휴송" 군청이라고 알았던-지금가 보니 "호아수엉"군청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가물거렸습니다.)

 

"후에" 관광과 한,월 역사 비교

 

이번 탐방에서는 하노이와 사이공에서 딱 중간 지점에 있어 가기가 특히 쉽지 않은 월남 마지막 왕조의 수도 “후에(化)”를 가 볼 수 있어 귀한 구경을 했습니다.

 

43년 전에는 월남의 역사 같은 것을 알아 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가이드의 설명도 듣고 자료도 찾아보고 하니 정말 재미가 있습니다. 여행의 또 다른 재미이기도 합니다.

 

"후에" 황궁에 들어 서니 의외로 유럽 관광객이 많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많이 구경을 오는 모양입니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해자의 크기를 보고  깜짝 놀랬습니다. 황궁의 규모가 베이징의 자금성 만 한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궁 내부에 들어가 보니 전체의 규모는 경복궁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후에" 황궁의 입구의 해자입니다.)

 


(황궁 입구에 세워진 게양대)


입구의 문과 본전의 이름이 오문(午門)과 태화전으로 중국의 자금성과 꼭 같았습니다. 태화전 뒤에는 아마도 건천궁이 있었던 것 같은데 1968년 구정공세 때 베트콩들이 이리로 피했다가 미군의 공습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고 합니다.

 


(황궁 본전, 태화전)

 


(폐허가 된 황궁의 뒷 부분)

 

지난 2천년 동안 월남과 우리나라 역사를 비교해 보면 중국의 주변 국가로 너무나 유사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호이안에 있는 "공자묘"입니다. 월남도 최초 대학이 국자감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와 얼마나 역사가 비슷한지 한 번 비교해 볼까요?

 

-B.C.111년 한 무제가 월남 북부 점령. 한3군을 설치. (우리나라에는 3년 뒤 B.C.108년에 한 무제가 한4군 설치.)

 

-679년 당나라가 안남(安南)도호부 설치. 그래서 안남국.(우리나라에는 10년 먼저 669년 고구려 패망 후 안동(安東)도호부 설치.)

 

-987년 吳權(응오 뀐)이 중국을 물리치고 최초 월남 독립국 설립.

 

-1009년 李(Ly) 왕조 설립. 국호 大越(대월)


-1226년 패망 때 왕족 일부가 우리나라로 망명(boat people?) 화산 李(이)씨가 됨.

 

-1226년 陳(쩐 흥 다오)가 몽고 침입을 격퇴하고 새 왕조 수립 (우리나라는 1231년부터 항몽을 시작했으나 1273년 삼별초의 제주 항몽이 마감되었고, 끝내 몽고에 귀속되어 100년을 계속합니다.)

 

-1428년 鄭(찐)이 後(후)黎(레) 왕조 설립

 

-1471년 3세기부터 중남부에 존재한 짬(Cham)족의 짬파 왕조 통합. (우리나라는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투항) 약 150년 뒤 월남은 1788년 西山(떠이선)의 阮(응웬)이 청나라 침입 격퇴

 

-1802년 중남부를 장악한 남부의 阮(응웬)이 프랑스 지원아래 덴마크를 등에 업은 鄭(찐)의 북부를 통일하고 마지막 왕조 설립. 국호를 越南(비엩남)으로 함.

 


(응웬 왕조 4대 왕 "뜨득"릉에서)

 

(뜨뜩 릉의 공덕비 앞에서)

 

(뜨득 왕의 묘)

 

-1858년 프랑스가 다낭 상륙. 1859 사이공 점령. 1884 전국토 식민지화. (우리나라는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 후 조선에 대한 청의 기득권을 배제,

 

-1905년 노일전쟁 후 외교권을 박탈. 1910년 일본 식민지화로 조선왕조 마감)

 

-1945년 일본 점령군 패퇴 후 호찌민이 바오다이 왕으로부터 국권 접수.

 

-1946년 재 진군한 프랑스와 전쟁 재개. (우리나라는 1950년 6.25 전란으로 유엔군 참전.  1953년 휴전)

 

-1954년 프랑스 디엔비엔푸 패퇴로 강화조약 체결. 17도 선 경계 설정.  남북이 미.쏘의 지원으로 대치. 1961년 미군 참전. 1965년 북폭, 확전.

 

이상이 우리가 참전하기 전까지의 우리나라와 월남의 역사 비교였습니다.

 

보신 바와 같이 너무 꼭 같습니다.  몇 가지가 틀립니다. 

 

1226년 몽고가 침입했을 때 월남에는 영웅 쩐흥다오가 있었습니다. 쩐흥다오의 동상은 전국 곳곳에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1231년 몽고의 침략이래 40년간 정부는 강화도에 피한 채 항몽 투쟁을 하면서 전 국토가 유린됩니다. 끝내 제주에서 삼별초의 항쟁을 끝으로 항몽도 끝이 나고 맙니다.

 

1636년 청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우리나라는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이듬 해 결국 삼전도에서 투항식을 하고 수 십만 포로가 심양으로 끌려 갔습니다. 그러나 월남에는 1778년 떠이선(西山)당의 응웬이 청나라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다만 현대사에 와서 월남은 100년간 프랑스의 식민지로 지냈고 우리는 35년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제국주의 시대가 끝난 뒤 우리는 남쪽이 자유주의 진영에 서고, 월남은 북쪽이 공산주의 진영에 섬으로써 월남은 우리보다  더 혹독한 경험을 하게 되고 현재 우리를 본받는 것을 지상의 목표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는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이념적 패권주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출처 : 파월 제1진 청룡부대 2대대 해병158기 이장원 선배님의 월남전 참전수기

         '아! 청룡이여 제1권 캄란에서 호이안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