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1편> - 짜빈동 기습방어전

머린코341(mc341) 2016. 10. 8. 23:11

해외 출전<1편> - 짜빈동 기습방어전


  1개 중대의 방어병력으로 1개 연대의 적 기습부대를 격퇴시켜 혁혁한 전과를 거둔 짜빈동(꽝나이성 손틴군·추라이지구) 전투는 월남전 사상 가장 빛나는 승전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는 전투이다.


  당시 3대대 11중대가 배치되어 있던 짜빈동 진지는 남북간 약300미터, 동서간 약 200미터 가량 되는 나직한 야산에 구축해 놓은 4주방어진지였다. 교통호로 연결시켜 놓은 진지 외곽에는 조명지뢰군과 단선 철조망을 매설하거나 가설하고 그 안쪽에는 개인지뢰원, 그리고 그 안쪽에는 5중으로 된 원형철로망을 가설해 놓은 견고한 진지였다.


  청룡부대에서 이처럼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던 까닭은 1957년초 추라이지구로 침투한 월맹군 2사단이 해병여단 본부와 포병대대 및 추라이의 미 해병대 비행장을 차례로 공격하여 추라이지구에서의 전세역전을 획책하고 있었고, 짜빈동이 그 관문지대에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단본부에서는 그 짜빈동 전지에 1대대 1중대에서 차출한 1개 소대(3소대)를 배속시켜 병력 보강을 도모하는 한편 105밀리 포 1문을 11중대에 배치하는 등 가능한 조치를 사전에 강구했다.


  짜빈동 진지가 기습공격을 받은 시각은 2월 15일 새벽 4시 10분경이었고, 공격에 투입이 된 적 병력은 1개 연대로 추산되었다.


  60밀이 박격포와 82밀리, 120밀리 및 4.2인치 중박격포의 지원하에 새벽녘의 허를 찌른 적 공격부대는 2개 대대를 주공방향인 3소대 정면에 투입하고 1개 대대의 조공부대를 2소대 정면에 투입했는데, 그 3소대쪽 접근로 상에는 관목이 빽빽이 우거진 돌산지대가 있었다.


  적의 지원포격이 개시되자 거의 반사적인 대응으로 아군포의 포탄은 적의 예상접근로를 강타하여 적의 후속부대를 차단하는 한편 진지 전방의 장애물 지대에 VT탄을 때리기 시작했고, 적 포탄이 진지 후방으로 연신되며 적이 돌격전을 감행할 시기에는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 상공에 무수한 조명탄을 밝히는 가운데 살상력이 강한 VT탄을 때려 적의 공격력에 타격을 가했다.


  한편 적이 돌격을 감행하자 3소대 대원들은 대낮 같은 어둠을 밝혀주는 그 조명탄의 불빛 아래 필사적인 최후저지 사격을 가했으나 4시 40분 경에 이르러 3소대 진지에는 두 군데나 구멍이 뚫려 그 구멍으로 적병들이 물밀 듯이 난입하는 바람에 1분대 진지와 화기반 진지에서는 처절한 육박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혈투는 너무나 처절했다.


  1분대장 배장춘 하사는 다급했던 나머지 보고를 마치기도 전에 들고 있던 무전기를 버리고 "백병전이다!"하고 소리치며 교통호 위에 놓인 야전삽과 곡괭이를 집어들고 좌충우돌, 2~3명의 적병들을 때려 누이다가 그도 역시 어깨와 괄과 다리에 부상을 입고 유혈이 난자한 상태에서 2소대 족으로 후송을 당했고, 목통이 터질 듯한목소리로 "진지를 사수하라"고 외치고 있던 1조장 이학현 상병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몸으로도 난입해 오는 적에게 실탄을 퍼붓다가 수 명의 적이 약 20미터 전방의 오물통(똥통 속으로 뛰어들자 질풍 같이 달려가 그 오물통 속에 빠진 적병들을 수류탄으로 폭사시켰다.


  그리고선 급히 교통호로 돌아온 그는 분대장 배 하사 쪽으로 수명의 적병들이 접근해 가자 수류탄으로 그들을 처치하며 분대장의 위기를 구했으나 바로 그 때 오른쪽 발목에 적탄을 맞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투혼은 그것으로 꺾이지를 않고 자기 총기에 실탄을 장전하여 옆에서 분전하고 있는 전우(도성룡 일병)를 도와 주다가 끝내는 그가 지니고 있던 마지막 수류탄의 안전핀을 뽐아 들고 우루루 몰려 오는 적병들을 와락 끌어 안으며 그들과 함께 폭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도성룡 일병도 전사를 했고, 다른 일각에서 버티고 있던 조정남 상병과 김중대 일병도 장렬한 전사를 하고 윤창호 전수철 김명덕 방기장 일병과 배장춘 하사 등은 중상을 입는 등 분대장을 2소대 진지로 부축해 간 이영복 일병을 제외하곤 전원 전사를 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또한 거의 같은 시각에 돌파당한 화기반 진지에서도 경기관총사수 김낙성 상병이 적탄에 맞고 쓰러지자 부사수 이내수 일병이 사수를 대신하여 계속 방아쇠를 당겼고, 그가 쓰러지자 1번탄약수 오준태 일병이, 그리고 그가 쓰러지자 2번탄약수 송영섭 일병이 기관총을 붙들고 사투를 계속하다가 그도 또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한편 1분대 진지가 무너지자 약 20분 후 2분대 진지도 무너지고 말았으나 3분대 진지에서는 분대장 송영옥 하사의 진두지휘 하에 BAR사수들이 계속 불을 뿜을 수 있도록 M1사수들이 BAR탄창에 실탄을 끼워 주고 BAR의 총신이 과열하자 M1소총의 사수들을 위해 BAR사수들이 Ml소총의 빈 클립에 실탄을 끼워 주어 계속 불을 뿜게 하다가 소대장(이수현 소위)의 명령에 따라 2선으로 철수했고, 2선에서는 3소대에 배속되어 있던 1중대 3소대 1분대 대원들이 철주를 뽑아들고 좌충우돌하고 있는 분대장 김정동 하사의 진두지휘 하에 수십 명의 적과 혈투를 벌였고, 2소대에 배속되어 있던 3분대(1중대 3소대)의 이다성 상병과 김희도 병장 및 통신병 이정식 상병은 최후의 순간까지 용전분투하다가 산화했다.


  더구나 이런 와중에 적진에서 발사한 4.2인치 포탄이 아군 4.2인치 중박격포의 탄약고에 명중되자 아군 진지는 수라장으로 화하는듯 하였고, 그런 틈을 타서 3문의 화염방사기를 앞세운 적 특공대가 화염을 내뿜으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한편 적의 조공부대가 투입이 된 11중대 1소대 진지에서는 소대장 신원배 소위와 2분대장 이중재 하사 등 용감한 대원들이 진내로 침투한 화염방사기 사수를 공격하여 화염방사기 1문을 노획했고, 먼동이 틀 무렵에는 1소대 진지 전방 약 100미터 지점의 바위뒤에서 10여 명의 적병들이 대전차유탄포와 로켓포 등을 가지고 아군진지를 공격하는 것을 이진 병장과 김용길 중사 등이 수류탄을 투척하여 유탄포 3문을 노획했다.


  그 날 새벽 진내에 침투해 있던 적은 약 1개 중대였으며, 날이 샐 무렵까지 계속된 피아군의 혈전은 3선 근처에서 적을 견제할 수 있었던 중대장 정경진(丁京鎭)대위가 11중대 1소대의 1개 분대를 좌측, 2소대의 1개 분대를 우측으로 전개하여 돌파구를 양쪽으로 포위하는 한편 중대본부에 배치된 4문의 3.5인치 로켓포가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화기소대장 김기홍 중위로 하여금 중대본부 요원과 일부 3소대 병력으로 특공대를 편성하여 중대본부 바로 아랫쪽으로 돌격을 감행케 하여 쥐새끼들처럼 진지를 빠져 나가고 있는 적을 공격함으로써 작전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격전이 소용돌이쳤던 그 짜빈동 진지는 한마디로 끔직한 인간도살장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3소대 진지 전방의 장애물지대(철조망과 지뢰매설지대)와 교통호 안팎에는 수많은 시체가 널려 있었고, 백병전이 벌어졌던 교통호에는 시뻘건 피가 발목이 잠길 만큼 흥건히 고여 있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이 거둔 전과는 적사살-243, 포로-2, 화염방사기-3문, 대전차포-6문, 경기관총-2문, 4.2인치 중박격포-1문, 75밀리 무반동총-7정, 수류탄-350발 등이었고, 아군의 피해는 전사-15, 부상-33명에 불과했다.


  짜빈동 전투는 많은 기록과 화제를 남겼다. 전투가 끝난 그날 아침부터 3월 중순경에 이르기까지 짜빈동 진지와 청룡부대 본부에는 방문객들의 발이 끊이지를 않았다. 당일 오후에는 미 해병 제3상륙군사령관 월트 중장과 그 전날 시찰차 월남에 도착했던 강기천 사령관 및 한국언론계의 중진들이 방문했고, 16일에는 월남군최고사령부참모부장과 주월한국군사령부 작전참모 및 UPI기자들이, 그리고 17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 김성은 국방장관이 신상철 주월대사와 함께 방문을 했고, 21일에는 월남공화국의 국가원수 티우중장과 키 수상 및 람 1군단장 일행이 방문하는 등 귀빈들의 방문이 그치지를 않았다.


  그리고 특히 월남군과 미군 당국에서는 연구반을 보내어 현지견학과 방어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게 했고, 또 박정희 대통령을 위시하여 강서룡 국방차관과 장창국 합참의장, 주월미군사령관은 이 전투에 참가한 장병들의 혁혁한 전공을 치하하는 메시지를 보내와서 장병들의 사기를 고무했다.


  다음은 보도와 관련된 부분인데 이 지면에 소개된 여러 신문의 머릿기사들이 그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듯 월남전 사상 중대단위 방어부대로서는 최대의 전과를 거둔 짜빈동 전투처럼 대서특필된 승전보도 기사도 없었다.


  그런데 여러 신문들 중 맨 먼저 특종으로 보도했던 신문은 조선일보였다. 조선일보에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전날 청룡부대에서는 부대장의 지시에 따라 16일에 개시할 한·미·월군 합동작전(거룡작전)을 취재할 기자들을 안내(초청)해 오기 위해 미 해병대의 C-47 수송기 한 대를 빌려 정훈참모실 공보장교(정기인 중위)를 사이공으로 보냈는데, 결국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위험한 곳으로 가기를 꺼려했지만 오직 한 사람 조선일보사의 목사균 특파원만은 용산고등학교 후배인 정 중위의 간청도 간청이었지만 스스로 용기를 내민 정 중위를 따라 나섰기 때문이었다.


  기록 가운데 가장 빛나는 기록은 훈장과 특진의 기록이었다. 이 전투에 참가한 모든 사병들에게 일계급 특진과 함 훈장이(전장병에게) 수여되었다. 여단장 김연상 준장에게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었지만 특히 중대장 정경진 대위와 1소대장 신원배 소위에겐 태극무공훈장과 미국정부의 은성훈장, 하사 배장춘 중사 김용길 상병 이학현 상병 조정남에게는 을지무공훈장, 중위 김기홍 일병 이영복을 비롯한 8명에게는 충무무공훈장, 나머지 장병들에게는 화랑무공훈장과 인헌무공훈장이 각각 수여되었다. 이처럼 푸짐한 훈장의 기록은 대한민국의 훈장이 제정된 이래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밖에 드리핑 석상에서는 이런 화제를 남겼다. 즉 여단본부에서 제공한 티우 대통령과 키 수상을 위한 브리핑 석상에서 키 수상은 “청룡부대 장병들은 육박전을 할 매 상대방의 갈빗대도 부러뜨린다던데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고, 그러한 질문에 작전참모 오윤진 중령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전제한 다음 인지와중지를 펴 보이며 "이 두 손가락으로 상대방의 눈알도 쑤셔 빼지요"라고 말해 질문자를 경악하게 했다. 또한 주월사 보도실에서 가진 외신기자들을 위한 브리핑 석상에서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


  즉 어떤 외신기자가 "월맹군이 얼마나 강하더냐?"고 물은데 대해 중대장 정경진 대위가 "매우 강하더라. 그러나 우리 청룡들 보단 덜 강하더라."고 답해 장내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다. 그리고 청룡부대의 브리핑 장교들이 상대방의 눈알을 쑤셔 뺀다는 말을 한데 대해 주월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고렇잖아도 한국군이 잔인하다는 말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런 말을 하느냐."며 주의를 환기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말을 전해들은 김성은 국방장관은 "죽기 아니면 살긴데 까짓거 눈알이 아니고 불알이면 어때"하면서 브리핑 장교들을 두둔했다는 말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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