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12.12사태

12.12 : 군벌과 군조직 -11-

머린코341(mc341) 2020. 3. 15. 16:17

12.12 : 군벌과 군조직 -11-



1공수여단의 출동과 같이 이루어진 것이 9사단 29연대, 30연대와 2기갑여단의 출동이었다. 경복궁에 있던 노태우 소장은 전화기를 들어 자신의 사단 참모장인 구창회 대령에게 전화했다.


“예. 참모장입니다.”

“나 사단장이다. 지금 즉시 29연대를 중앙청 앞으로 출동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구창회 참모장은 29연대장 이필섭 대령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이필섭 대령은 작전참모 표순배 중령 대신 12월 5일 발표된 대령 진급자로 보직을 대기중이던 안병호 중령을 불러 서울로 출동시키고 표순배 중령은 상황실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안병호 중령은 즉시 9사단장 전속부관 김종진 중위와 함께 사단장 지프를 타고 출동하였다.


9사단 30연대장 김봉규 대령 또한 출동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회 회원이 아니었다. 전방에 북괴군이 언제든지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에 병력을 뺄 수가 있겠냐는 생각에 그는 복병복창을 위해 노태우 사단장을 찾았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사단장의 직속상관인 1군단장 황영시 군단장 또한 자리에 없었다. 결국 그는 용인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대 이상없습니다.”

“응.”

“50분에 출동하라고 지시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응 뭐라고.....”

“출동하라고 지시 받았습니다..”

“어딜 출동하라고?“

“우선 삼송리 까지 가라고 말입니다..”

“어디?“

“삼송리.”

“누가 출동 명령을 내렸는데...“

“사단장으로 부터 받았습니다.”

“사단장?“

“예, 사단장 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거 출동 하면 안되겠는데.“

“내가 다시 사단에 연락 할게. 좀 기다려.“

“알았습니다. 전 사단 지시 받겠습니다.”

“응, 우선 출동하지 말고 기다려요. 출동하면 안돼. 여보세요.”


이건영 3군사령관으로써는 이 사건이 야전군사령관인 그의 명령이 하급부대에 제대로 먹혀 들어가고 있지 않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저녁 직후부터 터진 총장 납치사태 이후 이 사태가 합수부의 소행임을 알자 그는 합수부에 모여있는 장성들의 예하부대들이 서울로 출동하는 사태들을 막기 위해 계속 전화를 해왔다.


적어도 30사단장 박희모, 5군단장 최영구, 수도군단 참모장 김성환, 2기갑여단장 이상규, 6군단장 강영식 등이 그의 전화를 받았으며 9사단 또한 그런 전화를 받은 부대들 중 하나였다.


그런데 지금 그 9사단 30연대장이 서울을 향해 출동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이 사령관은 즉시 9사단을 연결할 것을 지시했다. 받은 것은 참모장, 구창회 대령이었다.


“아, 난데.“

“예.“

“그런데 지금 30연대장이 어디 출동 한다고 그러는데 어디서 출동 명령이 내려갔는가?“

“예?”

"9사단 30연대가 어디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 시키는가?"

"연대 출동 안합니다."

"그런데 어디 출동한다고 하는데 무슨 소리야>"

"연대가 말입니까?"

"응."

"연대 출동 안합니다."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연대 출동 안합니다."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연대 출동 안합니다."

"사단에서 그런 지시 한 거 없어?"

"?예, 연대 출동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출동하는게 있나?"

"..."

"여보시오, 그, 출동하면 안돼."

"예."

“그런데 그 출동하게 가면 안되는데.....“

“예.연대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된건가 확실히 좀 알아봐.“

“예.“

“거 출동하면 안되게끔 다 다 내가 연락했는데 왜 출동을 하나?“

“예.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확인해서 나한테 보고좀 해요.”

“예.“

“출동하면 안되요.“


구창회 참모장은 이건영 3군사령관이 9사단 출동여부를 묻는 질문에 6번이나 허위로 답했다. 9사단은 이미 출동한 뒤였던 것이다.


이필섭 연대장이 이끄는 9사단 29연대에 30연대의 1개 대대까지 배속되어 전방을 비우고 중앙청으로 출동하게 되면서 압록강을 지키고 있던 28연대의 후방은 텅 비게 되었다.


훗날 노태우는 ‘주저항선에 배치된 병력을 뺀 것이 아니라 예비연대 병력 일부를 뺐기 때문에 휴전선에 공백이 생길 수 없다’고 주장했으나, 정승화는 “서부전선은 적이 전쟁도발하면 주공이 될만한 주접근로다.


서부전선의 9사단 병력을 포함해도 적절치 않아 후방전선의 병력을 투입해야지 거기서 병력을 빼도 튼튼하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며 반박하였다.


한편 경기도 파주의 2기갑여단장 이상규 준장 또한 백운택 71방위사단장으로부터 출동지시를 하달받았다. 물론 3군사령관이 인가한 적법한 지시는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전에 3군사령관은 이상규 여단장에게 직접적으로 병력 출동을 금하는 지시까지 내린 뒤였다.


“예.”

“자네 부대 옮기는 문제는 뭐 이상이 있으면 내가 직접 전화를 할 테니까 절대 부대를 옮기면 안되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좀 단단히 부대장악하고 있어.”

“예,알겠습니다.”

“어디 다른데서 전화 오더라도 절대 움직이면 안돼.”

“예, 알겠습니다.”

“OK 들어가요.”

“계속 복무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 여단장은 영내에 있던 2기갑 16대대장 김호영 중령을 불러 출동준비지시를 하달했다.


이후 출동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던 이 여단장은 만일 죽는다면 쓸모가 없어질 족보를 가지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경주 이씨였다. 이후 그의 별명은 “족보장군”이 된다.


2기갑여단 16대대와 9사단 29, 30연대의 출동은 북괴가 언제 침략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방부대 병력을 뺀 것이라는 실질적 문제 말고도, 행정적으로도 한미연합군사령관 존 위컴 대장의 작전권을 침해한 사례였다. 당시에는 평시작전권 또한 연합사령관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9사단과 2기갑여단 병력이 출동했다. 선두에는 1군단 헌병대장 최동수 대령이 탑승한 지프가 가고 있었고, 그 뒤로 해치를 보두 닫고 벌집탄을 실은 전차 수대가 전진하고 있었다.


한편 김포에서 출발한 1공수여단 또한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들을 제압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12.12의 끝이 다가오고 있던 것이다.


[뻘글 집합소] 2015.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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