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12.12사태

12.12 : 군벌과 군조직 -完- (상)

머린코341(mc341) 2020. 3. 16. 23:32

12.12 : 군벌과 군조직 -完- (상)



12.12 당시 반란군측에 대항한 장성들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연행당한 장성은 용인 3군사령부의 이건영 중장이었다.


가장 먼저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이 자신의 직속부하인 3공수 15대대장 박종규 중령의 병력으로부터 총격을 받으며 연행되었고, 새벽 4시 직후 장태완 수경사령관 또한 자신의 직속부하인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의 병력에게 문홍구 합참본부장과 함께 연행되었다.


하지만 용인 3군사령부에서 예하부대들의 출동을 저지하고 있던 이건영 3군사령관만큼은 체포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12일 밤 10시 경 3군사령부 헌병대장 조명기 대령에게 이건영 3군사령관에 대한 체포를 지시하였다. 조명기 대령은 하나회 회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속상관이자 육군의 주요 야전군 사령관인 이건영 중장을 연행해간다면 3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것이며 적전에서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결국 그를 연행하지 않았다.


보안사로부터 동일한 지시를 받은 3군사령부 보안대장 김부연 대령 또한 그에 동의했다. 조명기 대령은 이건영 사령관에게 가서 말했다.


"사실은 보안사에서 사령관님을 연행해오라는 연락이 얼마 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안부대장 김부연 대령과 저는 적전에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합의했습니다.“


이건영 사령관은 이 말을 듣고 사령부와 공관 경비강화를 위해 무장한 헌병 1개 소대를 배치할 것을 지시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은 12월 13일 오전 6시 경이었다.


그 때 서울에서는 모든 상황이 끝나 있었으나 이 3군사령관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노재현 장관은 그에게 6시까지 국방부로 올 것을 지시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이건영 사령관은 국방부 정문 앞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연행당했다. 이건영 장군의 서울 호출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부탁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반란군은 자신들에게 대항한 장성들을 모두 체포하는데 성공하였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이건영 3군사령관, 문홍구 합참본부장,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등이 모두 연행당했다.


이들은 보안사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성들은 며칠부터 몇 달 후 기소 없이 석방되었다. 하지만 군복을 벗어야 했고 보안사의 철통같은 감시는 여전했다.


반란군측은 신군부라는 이름으로 명패를 바꿔달았다. 김윤호 육군 보병학교장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필두로 한 ‘6인 위원회’가 자신에게 대항하였거나 코드가 맞지 않는 장성들의 생사 여부를 결정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화두는 윤성민 육군참모차장과 문홍구 합참본부장의 생사 여부였다. 둘중 한 명은 살고 한 명은 죽어야 했다.


유학성 중장과 노태우 소장은 문홍구 합참본부장을 1군사령관으로 보내야 한다(1군사령관 김학원 중장은 12월 13일부로 보직해임되었다. 그는 몇 년 후 홧병으로 세상을 등졌다.)고 주장했으나, 김윤호 소장과 황영시 중장은 윤성민 중장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호남 출신인 윤성민 차장을 올려 지역안배를 해야 한다는 논리가 가세해 윤성민 중장은 육군참모차장에서 1군사령관으로 영전하였다.


혹자는 윤성민 차장이 12.12때 보여준 애매한 태도가 그의 영전에 도움을 주었다고도 말한다. 한편 당시 인사를 담당한 김윤호 보병학교장은 문홍구 중장이 노재현 장관과 같은 포병 병과였음이 한 몫을 했다고 진술하였다.


군단장급 인선 또한 문제였다. 차규헌 수도군단장이 육사교장으로 영전(영전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밀려난 꼴이었다. 실제로 그는 군사령관 중 가장 권한이 적은 2군사령관을 재직한 후 예편하였다.)하면서 공석이 된 수도군단장 자리에 깨끗하다고 알려진 소준열 육군 종합학교장과 육본 감찰감 권익검 소장을 기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노태우 소장이 그들의 12.12 당시 행적을 비난하며 불만을 표출했다. 소준열 소장은 12.12 당시 윤성민 차장의 명령을 받고 박준병 20사단장의 체포를 수행하려 하였고 권익검 소장은 그 직전 20사단 본부의 동태를 살펴보러 출동했었던 것이다.


결국 소준열 소장은 육군 종합행정학교장에 그대로 머물렀고 권익검 소장은 5관구사령관으로 이동했다.


수도군단장에는 유학성, 노태우 장군이 주장하던 박노영 합참 정보국장이 임명되었다.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직을 맡고 있던 류병현 대장은 기존 계획에 따라 합참의장으로 영전하였고 역시 이전 계획대로 합참의장 김종환 대장은 13일부로 전역하여 내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공석이 된 연합사 부사령관 직에는 백석주 육사교장이 임명되었다.


신군부 내부의 보직이동 또한 있었다. 우선 육군참모총장에는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임명되었다. 사실 신군부 측에서는 황영시 1군단장을 밀었으나 최규하 대통령의 뜻이 강했다.


대신 신군부측에서는 윤성민 차장이 1군사령관으로 이동하면서 공석이 된 육군참모차장석에 황영시 중장을 앉혀 이 총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2군사령관 직에는 차규헌 수도군단장이나 윤흥정 전교사령관(지금의 교육사령관)이 거론되었으나 결국 유임으로 가닥났다.


원래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면서 공석이 된 서리직에 내정되었으나 본인이 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적절한 직책을 찾지 못한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결국 주요 요직은 아닌 육사교장으로 이동하였다.


3군사령관 보직에는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가 임명되었다. 수경사령관에는 노태우 9사단장이 임명되었고, 공석이 된 9사단장 자리는 백운택 71방위사단장이 임명되었다.


새벽에 대구에서 올라온 50사단장 정호용 소장은 특전사령관직에 임명되었다.(다만 정승화 총장 또한 정호용 50사단장을 특전사령관에 임명하려던 계획이었다고 87년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다)


신군부는 내각 또한 조종했다. 원래는 유임할 계획이었던 노재현 국방장관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주영복 공군참모총장이 앉았다. 원래는 계획이 없던 총무처장관 자리에는 김용휴 국방부차관이 앉았다. 누군가는 그것이 김용휴 차관이 12.12 당시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1980년 말까지 96명의 장성들이 강제로 예편되었다. 30여명의 장군들이 한번에 잔여 군생활 1년당 5백만원씩 계산된 특별 보조금과 공로훈장만을 받은 채 전역식도 없이 전역해야만 했다.


정보참모부장 황의철 소장, 교육참모부장 채항석 소장, 작전참모차장 안철원 소장, 예비군참모차장 이호봉 소장, 국방부 인력차관보 유병하 소장, 민사군정감 신정수 소장, 2관구사령관 정상만 소장, 3관구사령관 김종구 소장, 5관구사령관 김명수 소장, 전교사 부사령관 백윤기 소장등 수많은 장교들이 예편되어야 했다.


신군부의 숙군은 군사령부 부사령관급까지 이어졌다. 1군사령부 부사령관 박승옥 소장, 2군사령부 부사령관 곽응철 소장, 3군사령부 부사령관 김수중 소장 또한 숙군되었으며, 육군대학 총장 김한용 소장, 포병학교장 박재종 소장, 제2훈련소장 이필조 소장, 제2훈련소 부소장 김병삼 준장, 육군 행정학교 교수부장 정우봉 준장, 육본 감찰차감 장영돈 준장 또한 숙군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육사 8~10기 혹은 갑종, 육군 종합학교 출신들로, 6.25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들이 많았다. 이런 이들을 1952년 입교하여 전쟁의 포화 뒤에서 자라 1956년 임관한 육사 11기들이 주도하여 숙청한 것이었다.


김진기 헌병감 또한 숙군될 예정이었으나 12월 20일 12.12 쿠데타를 숙청한 책임을 지고 예편원을 내면서 강제전역 당하지는 않았다.


진압군측의 주요 참모들과 부대장들 또한 신군부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수경사 작전참모 박동원 대령으로, 육사 14기 대표화랑으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당시 수경사령관이던 장태완 소장이 수경사 참모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으나 12.12 후 겨우 준장으로 진급하여 2사단 부사단장, 7군단 참모장, 3사관학교 생도대장, 동원사단 훈련단장, 방위사단장, 1군단 부군단장 등 한직만을 돌다가 87년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진압군측의 선봉에 섰다가 회군한 윤흥기 9공수여단장 또한 12.12 이후 보직해임되어 연합사로 전출되었다. 그 또한 한직을 매돌다 소장으로 전역하였다.


33경비단 작전주임으로 직속상관인 장태완 사령관의 명령을 받들어 김진영 33경비단장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렸던 김달연 소령은 아예 12.12 다음날 김진영 대령에게 권총으로 얻어맞은 후 감금되었다가 한직을 매돌며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그는 목사가 되었다.


전속부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 전속부관 김광해 중령은 하소곤 소장의 피격 이후 장교들의 무덤이라고 불리던 동해안경비사령부(현재의 8군단)으로 전출된 후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김수탁 중령 또한 더이상의 진급 없이 중령으로 예편하였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수석부관이던 황원탁 대령은 육사 18기 대표화랑이었으나 연대장 보직조차 맡지 못한 채 96년 남북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직을 마지막으로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12.12 당시 가장 먼저 피격당한 이재천 소령은 2002년 준장으로 전역했다. 그 다음으로 피격당한 김인선 대위는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특전사령관이 연행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자리를 피한 장범주 대위는 80년 예편하여 유신사무관 제도로 농림부 사무관, 서기관을 거쳐 2001년 농업기반공사 평택지부장에 임명되었다.


[뻘글 집합소] 201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