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12.12사태

12.12 : 군벌과 군조직 -完- (중)

머린코341(mc341) 2020. 3. 16. 23:35

12.12 : 군벌과 군조직 -完- (중)



하지만 가장 신군부 세력에 의해 고통받았다고 할 수 있는 자들은 단연코 진압군 측에서 반란을 진압하려 하다가 오히려 연행되어 죄인이 되어버린 장성들일 것이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받고 내란방조죄로 기소되어 1980년 3월 13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 중령이 1심 선고 이후 항소하지 않는다면 곧 사면복권을 해주겠다는 제의를 정승화는 받아들였고 1980년 6월 12일 그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사면복권은 82년 3월 1일 특사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0년형(선고 직후 주영복 국방장관 재량으로 7년으로 감형되었다)을 선고받아 6년형 이상을 선고받으면 군적을 삭제한다는 관련 법조항에 의해 32년간 쌓아온 그의 예비역 육군대장이라는 군적은 삭제되었다.


예비역 육군이병으로 머무르던 그는 1987년 대선 직전 김영삼의 제의를 받아들이면서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및 부총재로 영입되었다. 그러나 통일민주당의 대선 패배 이후 정치에서 손을 뗀 그는 1997년 7월 14일 내란방조죄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으면서 예비역 대장 군적을 회복하였다.


그는 2002년 별세했다. 총장공관에서 그가 납치되는 것을 지켜본 당번병 김영진 병장은 이후 그의 사위가 되었으며, 반일부 준위는 전역 후 택시기사로 일했다.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또한 보안사에서 석 달 동안 조사받다 1980년 2월 4일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자신의 아들이 역모를 꾸미다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보고 대구 막걸리만을 마시면서 삶의 의지를 잃어버렸고, 결국 4월 18일 경 사망하였다. 한편 그의 아들 장성호는 이후 서울대학교 화학과에 합격하였으나 약육강식과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사회에 실망하여 한탄하던 중 1982년 1월 12일 집을 나가 실종되었고 같은 해 2월 9일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왜관의 산기슭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추정사인은 자살이었다.


이후 한국증권전산회사의 사장에 임명된 그는 87년 7월 심장질환으로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온 이후 95년 선거로 임명되는 첫 향군회장 선거에서 당선된 후 재임되었다.


이후 새천년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되어 1회 국회의원 직무를 수행한 이후 정계를 은퇴하였고 2010년 7월 6일 별세하였다. 1년 6개월여 후 그의 아내인 이병호는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특전사령관 정병주는 팔의 총상이 심각하여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해있다가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다. 조카의 사업 실패 등을 겪던 그는 1988년 10월 16일 집을 나가 실종되었다. 그는 1989년 3월 4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야산 중턱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되었다.(그의 손목에 있던 시계는 10월 19일에 멈춰있었다)


주변인들은 그의 자살 소식을 믿지 않으며 타살설을 제기하였으나 조갑제의 기사에 따르면 타살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에게 총구를 겨눈 박종규 중령은 1993년 56사단장까지 올랐으나 하나회 숙청 과정에서 예편되었다.


이건영 중장 또한 조사를 받다가 풀려났다. 그는 한국마사회 회장을 지내다 국민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헌병감 김진기 준장은 12월 20일 예편 이후 5일간 보안사 조사를 받다 풀려났고, 이후 광어 양식 사업 실패 등을 겪다 2006년 지병으로 별세하였다.


김진기 준장과 같은 자리에서 총을 맞은 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이후 갑종장교단을 조직하였고 2013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문홍구 합참 작전본부장 또한 12.12 직후 2개월여간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때 그의 아내는 홧병을 얻어 실명할 뻔 하였고, 석방된 후 83년에는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직에 임명되었다.


최후의 육본 회의에서 유일하게 쿠데타에 진압의사를 표명한 안종훈 육본 군수참모부장은 쿠데타 이후 육군대학 총장을 맡았고, 별을 하나 더 달고 군수기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5월 17일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에 유일하게 반대를 표시한 이후 예편되었다. 이후 그는 공우회 회장등을 지내다가 2002년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한편 그의 합참본부장 자리는 몇 년 후 12.12에서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박희모 30사단장이 앉게 된다. 그는 85년 중장으로 예편한 후 산업기지개발공사 이사장, 6.25 참전유공자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의 연대장으로 서울로 출동한 송응섭 90연대장은 이후 대장까지 올라 합참차장을 지낸 후 전역하였다.


12.12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에 반대한 사람들 역시 인사상 불이익을 받았다. 육사 11기로 전두환과 동기이자 육사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교수부에서 근무한 서우인 대령은 5.16 쿠데타에 반대하였고 군내 사조직 하나회에 맞서 ‘군인의 길을 걷자’는 청죽회를 조직,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며 79년에는 서강대 학군단장으로 재직 중 12.12를 맞자 이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었다.


직후 그는 6사단 부사단장으로 발령되었고 그곳에서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전역하였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6사단 부사단장 시절 사단 구역 안에 있던 백담사에 이후 대통령에서 물러난 전두환이 은거했다는 것이었다.


하나회였지만 역시 12.12에 반대한 김복동 청와대 작전차장보 또한 10.26 당시의 도의적 책임과 맞물려 3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되었다. 그는 이후 그의 매제인 노태우 수경사령관의 도움을 받아 중장으로 진급한 후 육사교장을 지낸 후 예편하였다.


12.12에서 반란군측에 가담하여 병력을 서울로 출동시키거나 그에 협력한 자들은 대부분 이후 군의 요직을 차지하게 된다. 9사단은 이후 별의 사단이 되었다.


9사단장 노태우는 수경사령관을 거쳐 대장으로 전역했고, 9사단 29연대장 이필섭 또한 합참의장까지 올랐으나 이후 숙군 과정에서 예편되었다. 안병호 중령은 중장까지 올라 수방사령관 재직 도중 김영삼의 당선 이후 행해진 하나회 숙청에서 예편되었다.


표순배 중령 또한 소장까지 올랐으나 하나회 숙청으로 한직을 매돌다 전역하였다, 30연대장으로 전방을 비우게 되는 서울 출동 전에 직속상관인 3군사령관에게 명령을 확인받고자 전화를 했던 김봉규 연대장은 85년 별을 달지 못하고 대령으로 전역하였다.


공수여단장들도 별을 달고 올라갔다. 12.12의 주역이자 1공수여단장인 박희도 준장은 특전사령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3공수여단장 최세창은 국방장관을 지냈고 5공수여단장 장기오는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제2한강교에 갇혀있다 수경사 장교에게 체포된 후 풀려난 이기룡 1공수여단 부여단장은 소장까지 올라가 제2훈련소장을 마지막으로 예편하였다. 특전사령관을 연행하려다 김오랑 소령의 총에 맞은 나영조 대위는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진압군측 지휘관들의 연행에 큰 역할을 한 헌병들 또한 수없이 진급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을 담당한 우경윤 범죄수사단장은 총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장까지 진급하여 예편하였으며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은 준장으로 예편하여 청와대 경호실차장을 지냈다.


최석립 33헌병대장 또한 준장으로 예편하였으며 육본 헌병대장 이종민 중령은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또한 별을 달고 예편하였으며 부단장 신윤희는 헌병감을 지내고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3군사령관직에 오른 유학성 중장은 이후 초대 안기부장으로 임명되었다가 장영자 사건 이후 물러나 국회의원직에 올랐다. 그는 12.12-5.18 재판이 이뤄지던 1997년 사망하였다.


황영시 1군단장은 육참차장을 지낸 후 이희성 총장의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대장으로 전역하였다. 차규헌 수도군단장은 육사교장과 2군사령관을 지낸 후 예편하였다.


박준병 20사단장은 보안사령관을 지낸 후 대장으로 전역하였고, 특전사령관에 오른 정호용 대장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후 내무부장관과 전두환 정권의 마지막 국방장관을 지냈다.


6인 위원회에는 있었지만 12.12에 직접적인 참가를 하지 않은 유일한 장성이던 김윤호 육군보병학교장은 합참의장을 지내고 예편하였다.


청와대경호실에서 대통령과 총리가 있는 총리공관을 포위한 정동호 청와대 경호실장 직무대리는 중장까지 올라 육군참모차장으로 이후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될 것이 매우 명백해 보였으나 1986년 국방위 회식사건으로 강제전역당했다.


고명승 대령은 3군사령관에 임명되어 대장까지 올랐으나 전두환-노태우 정권 교체 후 전두환 군맥에 대한 정리 차원에서 예편되었다. 그들에게 무장해제당한 총리공관 경비대장 구정길 중령은 이후 중령으로 예편되어 군인공제회 감사과장을 지냈다.


자신도 모르는 새 총리공관 안에서 외부와 단절되었던 최규하 대통령은 이후 신군부 측에 이용당하다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의 후임은 어느새 전역한 예비역 육군대장이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 전두환이었다. 그는 12.12-5.18 재판 등에서 증언을 거부한 그는 2006년 사망했다. 신현확 총리는 그보다 세달 전인 1980년 5월 18일 신군부 측의 5.17 쿠데타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는 2007년 사망했다.


노태우는 수경사령관에 오른 후 다시 보안사령관으로 갔다가 대장으로 전역하였다. 그의 밑에 있던 김기택 참모장은 소장으로 진급하여 25사단장을 지내고 전역하였고, 반란의 주요 참가자인 장세동 30경비단장은 3공수여단장을 지내고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중장까지 지내다 예편한 후 안기부장을 지냈다.


김진영 33경비단장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지내던 1993년 김영삼의 하나회 숙청 당시 가장 먼저 보직해임되어 전역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여 5월 광주에서 광주시민을 상대로 살육을 벌이고 대통령으로 집권하였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수많은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으며 88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날때까지 그러한 행위는 계속되었다. 그는 그의 친구였던 노태우에 의해 철저히 배신당한 후 백담사 유배, 구속, 사형선고등을 받았고 이후 사면되어 아직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한편 그의 비서실장 허화평과 인사처장 허삼수는 준장으로 예편하여 청와대에 들어갔으나 장영자 사건 이후 청와대에서 물러났다. 대공처장 이학봉 중령은 준장으로 예편한 후 청와대 민정수석, 안기부 2차장등을 지냈다.


한편 12,12애 대해 모르고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도권 지휘관들을 끌어모으는 미끼 역할을 수행하게 된 참모장 우국일 준장은 12월 14일 국방부로 전출되었다. 그는 더 이상의 진급 없이 준장으로 전역하였다.


[뻘글 집합소] 201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