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12.12사태

12.12 : 군벌과 군조직 -15-

머린코341(mc341) 2020. 3. 15. 16:28

12.12 : 군벌과 군조직 -15-




12.12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는 노재현 국방장관의 12월 12일~13일간의 행적은 매우 답답하다고 볼 수 있었다.


12일 저녁 7시 경 국방부장관 공관 바로 옆인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총소리가 울리자(그때 허삼수 대령과 우경윤 대령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하고 있었다) 노재현은 즉시 담을 넘어 단국대학교 체육관으로 피신하였다.


그곳에서 전화로 합참 작전국장 이경율 소장을 불러 그의 승용차로 서울 시내를 방황하다 자신의 가족을 여의도의 이경율의 집에 내려주고 다시 출발했다.


쿠데타 발생 시 쿠데타군을 진압할 부대들의 출동의 재가를 담당하는 국방부장관이 지휘통제가 가능한 육군본부 B-2 벙커로 간 것은 사태 발생 후 2시간이나 지난 저녁 9시 10분이었다.


노재현이 서울 시내를 방황하기 직전, 그러니까 연희동에서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헌병감,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과 조홍 수경사 헌병단장이 전두환의 계략에 말려들어 연희동 민마담의 요정에서 식사를 위해 모여 있을 때 쯤 삼청동 총리공관에선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대통령 최규하와 면담중이었다.


사안은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의 박정희 시해사건 연루 혐의 조사 관련 연행 건이었다.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이 동행했다. 미리 연락을 받아두었던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그들을 맞았다. 그의 안내를 받아 집무실까지 들어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말했다.


“제가 이렇게 각하를 뵈러 온 것은 긴급히 재가를 받아야 할 일이 있어서입니다. (중략)저희들이 수사를 해본 결과, 놀랍게도 참모총장님이 사건에 깊이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그래서 부득이 따로 모시고 조사를 좀 해야 할 필요성이(중략).”

“아니, 잠깐, 따로 모시고라고요?”


놀란 대통령은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말을 들어보더니 "왜 절차를 무시하고 연행부터 하였느냐. 재가를 받기 전에 행동을 일으킨 것은 위법이다.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만 듣고 재가해 줄 수는 없다. 사건경위를 다 들어보고 판단해 보고, 또한 책임자의 이야기를 듣는 등의 정식절차를 밟지 않으면 재가를 못하겠다. 국방부장관을 데리고 오라"고 하며 재가를 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모든 주요지휘관에 대해서 수사를 할 때는 육군의 예하부대이면서도 총장이나 장관의 결재를 거치지 않고 전부 대통령에게 직보를 해서 사건처리 하고 장관이나 총장한테는 추후 보고하는 것이 40년 가까이 보안부대의 하나의 특수성이고 관례”라고 주장하며 “보안사가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것은 본인 시절에만 한게 아니라 보안사의 모체인 특무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김창룡 대령이 특무대장 시절일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다.


(주: 김창룡 대령은 이승만 정권 시기의 특무부대장으로 1956년 소장 계급으로 정적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특무부대장 재직 시절 수많은 용공조작사건들이 발생하였다. 그의 암살 배후로 체포된 강문봉 2군사령관은 법정에서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창룡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라고 증언하였다.)


이에 대해 12월 12일부터 13일까지 최규하와 함께 있었던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는“정 총장은 당시에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비상시국에 막중한 업무를 담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범죄에 아무리 연루되었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그를 연행한다는 것은 명백한 불법이라고 생각”한다고 증언하면서, “법치국가에는 엄연히 법적 절차가 있는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없이 마구잡이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구속까지 한다면 법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며, “더욱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전두환 합수부장의 직속상관이었다는 점 에서도 대통령의 사전재가 없이 그를 연행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를 반박하였다.


결국 합수부 측의 1차 재가 요청에서 최규하 대통령은 끝까지 재가를 해 주지 않았고, 저녁 7시 50분 경 이학봉 중령에게서 정승화 총장 연행에는 성공했으나 총격전이 벌어지고 우경윤 대령이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총리공관을 빠져나갔다.


이후 집무실로 들어간 신현확은 이때 최규하가 “전두환 합수부장에 대하여 매우 화를 내고 힐책 하는 듯한 언동”을 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전에 전두환 합수부장이 다녀갔는데, 10.26사건과 관련이 있다는 필의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연행하여 조사하겠다고 하면서 재가하여 달라고 하기에 국방부장관의 결재 없이는 재가할 수 없으니 절차를 밟아오라고 했어요. 무슨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요?“

“잘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중요한 일은 국방부장관 등의 의견을 들으시고 정식 절차를 밟아 신중하게 처리 하셔야 됩니다.“


이후 신현확과 최규하는 다음 날인 12월 13일에 있을 개각을 협의하였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총리공관으로 복귀한 것은 두시간 후인 오후 9시 반 경이었다.


혼자 오지 않았다. 그는 경복궁에 있던 합수부측 장군들, 즉 박희도 1공수여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황영시 1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 그리고 백운택 71방위사단장을 데려와 재가를 독촉한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전투복을 입고 있었으며, 90년대 일부 언론에서는 이 2차 재가 요청에서 전두환 합수부장이 최 대통령에게 권총을 들이대고 협박했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신현확은 이를 부정하며 “몸 속에 휴대하였는지는 몰라도 외관상으로는 권총이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미 신현확 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의 불법 연행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고, 최규하 대통령은 불쾌하고 노여운 표정을 지으며 나아가 그들을 심하게 힐책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었으니 재가를 해 주십시오.”

“왜 절차를 무시하고 연행부터 한 겁니까? 국방부장관을 데려오세요.”


10시 20분경 육군본부에서 미8군 한미연합사 상황실로 자리를 옮긴 노재현 장관은 그곳에서 대통령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에게 노 장관은 군 지휘체계상 혼란시 생겼으니 곧 보고하러 갈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유학성 중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전화를 넘겨받아 급히 공관으로 와주시라고 말했고, 노재현은 그에게 국방부로 돌아오라고 지시하였다(유학성은 복귀하지 않았다) 국방장관은 끝내 공관에 출두하지 않았고, 최규하 대통령은 이번에도 재가를 내 주지 않았다. 결국 여섯 장성들은 성과 없이 경복궁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한편 10시 30분 경 노재현은 연합사 상황실에서 1군사령관 김학원 중장과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에게 “장관 명령 없이는 병력출동을 하지 않도록 예하부대를 철저히 통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노재현 국방장관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정승화 총장 연행 문제에 고나하여 직접 와서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으나 오히려 전두환 소장은 “보안사에 와서 보고를 받으라”며 거절하였다.


“국방부로 가겠으니 그곳에서 결재를 받으라”고 지시하였으나 전 보안사령관은 그마저도 불복하였다. 계속해서 연합사 상황실에 머무르고 있던 노 장관은 23시 55분 경 국방장관은 수기사와 26사단에 출동대기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하였고, 그에 따라 류병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장관을 대리하여 지시한다. 수기사와 26사단에 출동준비명령을 내리라”고 지시하였으나 결국 그의 출동명령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재현이 국방부로 돌아간 것은 13일 새벽 1시 25분 경이었다. 장관실에 있던 국방부차관 김용휴, 합참의장 김종환 등과 얘기를 하고 있었으나 문제는 김포 주둔지에서 출발한 박희도 1공수여단장의 병력이 국방부로 총을 쏘아대며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총소리를 들은 그는 즉시 전속부관 배명기 소령 한 사람만을 데리고 지하 상황실로 피신하였다.


새벽 3시 경 노재현은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상황을 종료시킬 것을 명령하였으며, 이후 지하 1층 계단 밑에 배 소령과 함께 숨어있다가 1공수 5대대(장 박덕화 중령) 병력에 의해 발견되었다. 노 장관은 3시 30분 경 국방부에 도착한 신현확 국무총리와 만났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

“대통령이 급히 찾고 있는데 이렇게 있으면 어쩝니까!”


호통을 친 신 총리와 이희성 중장정보부장 서리 그리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차량에 탑승해 총리공관으로 향했다. 신현확 총리와 이희성 중정부장 서리가 같은 차를 타고, 노재현 국방장관이 그의 차로 출발했으나 신 총리가 총리공관에 돌아온 새벽 4시 경 뒤에 있어야 할 노재현 장관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신 총리는 노 장관이 화장실이라도 가서 늦는 줄 알고 있었으나, 실은 경복궁 옆의 보안사 앞을 지나갈 때 보안사 직원들이 장관의 차를 가로막고 노 장관을 하차시킨 것이다.


이후 그들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있는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전두환 소장과 합수부 측 장성들의 강권을 받고 결국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안을 재가했다. 그가 총리공관에 도착한 것은 13일 새벽 4시 15분 경이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노 장관을 찾은지 10시간만에 그를 볼 수 있었다.


“당신을 그렇게 찾았는데 이렇게 늦게 오면 어떻게 합니까? 정 총장 연행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건 각하께서 재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이미 사태가 전부 끝난 일이니 더 큰 혼란을 예방하고 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재가를 하여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노재현은 결국 굴복했다.


한참 생각을 하던 최규하 대통령이 마침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연행 재가안에 서명하였다. 서명을 한 최 대통령은 이레 밑에 12.13 05:10이라는 재가시간을 기록하였다.


이에 대해 신현확은 “그 이유에 대하여는 제가 국무총리로 재직 시에는 물론이고 12.12사건 이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 여러 차례 최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최대통령께서는 그 당시 사전 재가없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하였고 12.13 새벽에 더 큰 혼란과 희생을 방지하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재가는 하게 되었지만, 사후에 재가를 하였다는 점 , 국방부장관의 결재 등 정식결재 절차를 거쳤다는 점, 장시간 동안의 고민 끝에 어쩔수 없이 결재 하였다는 점 등을 서류상 명백히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재가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 진술하였다.


마침내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불법연행이 대통령의 재가를 얻고 합법적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 12.12는 종결되었다.

[뻘글 집합소] 2015.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