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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정변 비화록 - 혁명동지회에서 제명을 당한 최창선 중령

머린코341(mc341) 2016. 8. 23. 08:38

5.16 군사정변 비화록 - 혁명동지회에서 제명을 당한 최창선 중령


  1959년 3월 중순경 해병 제1사단이 금촌(파주군)지구로부터 동해안의 현 기지로 이동한 후 사단장 김동하 소장은 당시의 항공관측대장 최창선 소령이 조종하는 L-20기를 타고 간혹(주로 주말에)부산과 대구. 안동 등지로 가서 긴밀한 유대를 맺고 있던 만주 신경(新京)군관학교 출신 동지들과 혁명을 모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부산에는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있었고, 대구에는 2군사령부 참모장 이주일(李周一) 장군. 안동에는 예비사단장 윤태일(尹泰一) 장군이 있었다.


  그리고 1942년 함경남도 연포(連浦)에 있는 일본육군항공기술교육대를 수료한 최창선 소령은 일제 말기 중국 남경에 있는 일본군의 항공기지에서 복무하다가 8.15 해방을 맞이했고, 귀국하는 과정에서 베이징(北京)에서 편성된 광복군에 입대(3지대 1대대)한 바 있었으므로 그 1대대(장, 신현준 대위)의 중대장이었던 박정희(중위) 장군과 이주일, 윤태일 장군들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한편 5.16 거사 당일 사단에서 여단으로 배속이 된 유일한 항공대의 대장이었던 최창선 소령은 거사에 참가한 여단장(김윤근 준장)의 지시에 따라 서울 시가지를 초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정찰과 전차부대에 대한 유도 임무를 수행했고, 그 후 해병대의 전반적인 행정지원 비행과 청와대와 해군본부의 행정지원 비행도 함께 함으로써 김성은 사령관으로부터 "최창선이가 그렇게 반역을 할 줄은 몰랐다"는 말을 들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러한 그가 혁명동지회로부터 제명을 당하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연유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첫 번째 연유는 구데타가 성공한 후 국영기업체의 사장이 된 여단본부의 모 참모(특과부서)가 갑자기 시내 요지에 점포도 사고 주택을 매입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그의 부인이 다이아몬드를 자랑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유언비어가 아니라 사실이란 것을 확인하고 "굶주림과 배를 채우기 위해 혁명을 했는가! 군이 계속해서 신악(新惡)을 조성한다면 먼저 이양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신랄하게 비판을 했고, 쿠데타가 성공한 후 여단 인사참모로 거사에 참가했던 C모 소령(해간 5기, ·5.16 후 해병대사령부 방칩대장 역임)과 전창주 소령(해간 5기)이 서울지구에 근무하는 해간 4기와 5기 출신 장교들을 서울지구해군헌병대장(임경섭 소령·해간 4기)실로 불러 모아 해간 4기 출신인 문회석 문교장관도 참석) 해병대에도 육사 5기와 8기 같은 혁명주체기(革命主?期)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해간 4기와 5기를 합치자고 주장했을 때, 최용관 소령이 한 그 주장을 군의 위계질서를 파괴하는 오만불손한 정치성 발언으로 단정했던 최창선 소령은 훗날 4기생들이 후배들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그것이 두려웠던 나머지 장내에 흐르고 있는 무거운 침묵을 깨고 "4기와 5기가 합친다면 그 호칭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이번 혁명은 어디까지나 군의 전체적인 지지로 성사된 것으로 아는데 장교단을 모두 주최로 하는 방법도 혁명과업 완수를 위해 좋지 않겠는가"하고 자신의 강한 개성이 투영된 직설적인 발언을 하는 바람에 그 모임이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산회되고 말았고, 그런 일이 있은 후 포항과 진해를 비행했을 때마다 최 소령은 동기생들을 불러 모아 그런 이야기를 하며 훗날 욕먹을 짓을 해선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을 뿐 아니라 거사가 성공한 후 원대복귀를 하지 않는 출동부대원들은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말을 했고, 또 혁명동지회에서 지급한 지환(반지)과 유인물의 배포에 대해 군 내부의 차별화로 군의 명맥(命脈)이나 다를 바 없는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위라고 규탄했던 언동이 그들(혁명주체)로 하여금 적대감을 갖게 했던지 어느 하루는 사령부 상전과장 서광호 소령(해간 4기)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상전과에 가 보았더니 그들(주체) 중의 누군가가 인사국에 보낸 혁명동지회 제명통지서를 내 놓기에 "누가 언제 넣어 달라고 했나, 저희들 마음대로 넣고 뺀 것인데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닌가"하며 일축을 했다고 한다.


  5.16 군사쿠데타가 성공한 후 신악으로 인한 부패와 주체들의 권력적인 횡포에 염증을 느꼈던 최창선 중령은 1966년 6월 30일 예편과 동시 브라질로 이민을 가서 농업항공의 길을 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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