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사진/6대사령관 공정식

제2장 - 바다의 사나이가 되다

머린코341(mc341) 2017. 8. 17. 09:51

제2장 - 바다의 사나이가 되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 1946. 1~1946. 12

 

1.해군사관학교 1기생으로 해군 장교 임관
 
  내가 해군 및 해병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역적 영향이다. 군항도시 진해 가까운 곳에서 학교를 다닌 탓에 자연히 해군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나는 1925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며, 마산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마산은 진해와 이웃한 해양도시다. 연안항로의 중요 거점이고 큰 어항을 가진 이 지역 사람들의 관심사는 주로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학생들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업이 어업 해운업 등 바다와 관련된 일이었다. 농촌 출신인 나도 그런 환경 때문에 자연히 바다에 관심을 갖게 뤘다.


  1944년 정초에 부산에서 일자리를 찾고 있을때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창설한 손원일 제독이해군병학교 학생을 모집한다는 신문 광고가 났다. 되찾은 내 나라 바다를 지키는 임무도 근사한데 장교가 되면 미국 유학도 보내 준다니 이런 고마운 일이 있나 싶었다. 즉각 원서를 내고 시험을 치러 갔다. 시험은 서울·부산에서 동시에 시행됐는데 전국에서 900여 명이 지원했다고 했다. 합격자는 90명이었다. 우리는 재학 중 미 해군 구축함에서 실습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제를 즉시 몸에 익혔다. 우리 1기생은 구축함 실습 중 임관돼 임관기념 사진이 없다. 그 이유는 1946년 9월 1일 국방경비대 군사영어학교(육사 전신) 일부 재학생과 졸업생 22명이 해방병단으로 전과해 진해로 내려왔다. 해군에도 영어에 능통한 요원이 있어야 한다는 군정청 방침에 따라 해군사관학교가 1개월 남짓 그들에게 해군 기본교육 실시한 후 파벌의식을 없애려고 해사생도 1기생과 같이 임관시켰기 때문이다.

 

2.해병대 창설 주장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나는 첫 보직인 모교훈육관 근무를 마치고 1948년 JMS 302(통영)정정장으로 근무하던 10월 20일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다음 날인 21일에 임시정대를 편성해 진압작전에 참가하라는 손 제독의 명령이 하달되었으나 이는 실행되지 않고 302정 단독으로 해상작전을 수행하였다. 반란군의 해상탈출 저지도 중요한 임무였다. 302정에는 37밀리 포가 장착돼 있었다. 그때는 포가 부족해 작전에 나가는 배에만 달아 줬다. 이 포는 철갑탄이어서 목표물에 맞아도 폭발하지 않고 관통하기만 하는 대전차포다. 이 작전에서 해군은 해상으로 도주하는 적은 격퇴할 수 있었으나 해군에 저지를 받고 육상으로 도주하는 적을 보면서도 추격하지 못했다. 따라서 작전이 끝난 뒤 나는 전투 경과를 보고하면서 해상전투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이지만, 이번과 같은 사태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해병대가 꼭 있어야겠다고 건의했다. 보고를 받은 손원일 제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줬다.

 

3. 백두산함 및 지리산함(704함) 인수


  해군은 전투함을 가져야 진정한 해군이다. 전투 수단을 갖지 못한 군대를 어찌 군대라 하겠는가. 따라서 건국초기 해군의 가장 큰 염원은 전투함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영광스럽게도 미국에 출장을 가서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 백두산함(PC 701)을 인수해 오는 역사적인 임무를 수행했다.

 

4. 통영상륙작전과 인천상륙작전의 함포지원


  두 번째로 미국에 가서 PC 704를 인수해 막 돌아온 나는 여장을 풀 겨를도 없이 통영상륙작전에 동원됐다.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합동으로 펼친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통영상륙작전은 해군과 해병대 간에 합의된 양동작전 계획에 따라 해군은 바다에서 통영 남쪽 해안에 함포사격을 퍼부어 통영에 상륙하는 양 속여 적을 해안으로 끌어들이는 사이, 해병대는 통영 뒷산 매일봉을 탈환한 작전이다. 나는 통영상륙작전에서 704함정의 부장으로서 함포사격 지원임무를 수행하였다. 통영작전이 끝난 뒤 나는 서해를 지키기 위해 전북 군산, 황해도 해주와 몽금포, 백령도 앞바다에서 초계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훗날 안 일이지만 전북 군산 앞바다에서 육지에 함포를 쏘아댄 것은 양동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속이기 위해 군산에 상륙할 것처럼 행동한 기만전술이었던 것이다. 또한 나는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참여할 수 있는 큰 행운을 가졌다. 그때 내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6·25 때까지 나는 월미도 해군 인천기지 관사에서 살았다. 그러나 내가 미국으로 출장 가 있던 중에 아내가 만삭의 몸으로 혼자 살다가 부산으로 피란 내려가서 가재도구가 남아있는 내 보금자리는 잿더미로 변했다. 내색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군인이 사사로운 일로 잡념에 사로 잡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곳은 적의 수중에 떨어져 서울의 관문을 막아버린 곳이 아닌가. 그곳을 과녁으로 삼아 유엔 각국 전함의 함포들이 불을 뿜어대고, 함재기들이 융단폭격을 가했다. 나도 PC 704함을 지휘해 3인치 포를 퍼부었다.


해군과 해병대를 창설한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 겸 초대 해군사관학교 교장. 손 총장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애국자이며 유창한 영어 실력을가진 국제 신사이다. 여순반란사건 직후 전투상보를 통해 필자가 해병대의 필요성을 보고하자 신현준 참오장에게 해병대 창설을 지시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 인수 시 함께 도미하여 인수단장인 손 총장을 곁에서 수행 보필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성은 대령이필자를 해병대 대대장으로 요청하자 즉각 수락하는 한편 도솔산 및 장단∼사천 지구 전투 시 직접 내왕하여 필자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은 존경하는 상관이었고, 스승이었으며, 인생의 선배였다 1945. 11. 11


해군사관학교 1기생이 교육받았던 일본군이 남기고 간 건물. 현재, 통제부 사령부 자리 1946. 2

 

현재의 해군사관학교 교정

 

미 제7함대 구축함 실습 중 해군 소위로 임관한 필자. 1946년 12



미 제7함대 구축함 실습을 통해 학교에서 배운 이론과 실기를 몸에 익혔다. 1946. 12

 

1948년 10월 20일, 반란군에게 체포되었다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최초로 여순반란사건을 해군 본부에 타전하고JMS 302 정장으로 반란진압작전에 참가한 후 신현준 임시정대 사령관과 손원일 참모총장에게 해병대의 필요성과 창설을 전투상보를 통해 보고했다. 1948. 10


■ 전투상보 내용

1. 방어무기가 불충분하여 근접 교전에 불리하였음

2. 공격무기가 빈약하여 적을 철저하게 제압하기가 어려웠음

3. 통신 연락 시 해군 본부와 기지 함정의 주파수가 동일하여 상호 통신에 지장이 있었음.

4. 해군은 해상작전이 주목적 이지만 이번과 같은 사태에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해병대 창설이 절실히 요청됨.


해군 소령 302 정장 시절의 필자


302정에 장착된 37밀리 대전차포의 모습. 당시에는 포가 부족하여 작전에 나가는 함정에만 장착했다. 여순반란사건 진압 이듬해 302 정장으로서 황해도 소재 몽금포 작전에 참가해 적 경비정을 나포하는 한편 적 5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1949. 8. 16


박옥규 함장과 필자가 도미, 미국으로부터 인수한 한국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701함). 백두산함은 1950년 6월 26일 한국전쟁 당시 부산 앞바다로 상륙하려는 북한군이 탑승한 북한 수송선을 격침시키는 개가를 올렸다.


미국 뉴욕 항에서 가진 백두산호 명명식. 손원일 참모총장과 박옥규 함장 그리고 등지고 있는 장면 주미 대사와 조병옥 박사와 교민들이 참석했다. 1949. 10



백두산함 퇴역 후 해군사관학교 교정에 옮겨 세워진 백두산함 마스트와 표지석. 1966. 8


백두산함에 이어 인수한 704함.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샌프란시스코 항을 떠나 한국으로 항해 중이다. 가운데는 필자와 정원삼 소위. 1950. 6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했을 때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진동리전투와 통영상륙작전으로 임시수도 부산과 진해항을 지켜냄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의 발판을 만들었다. 필자는 704함 부장으로 통영상륙작전에 참가해 함포사격으로 양동작전을 지원했다. 1950. 8. 17


거제도를 거쳐 마산, 진해, 부산을 포위 공격하기 위하여 통영을 점령한 북한군을 한국군 단독 상륙작전으로 통영에 상륙하여 북한군을 전멸시켜 '귀신 잡는 해병대·의 전통을 수립한 통영상륙작전 상황도. 1950. 8


김성은 부대의 진동리전투와 통영상륙작전을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표제하에 외신에 타전한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의 마거리트 히긴스 종군기자. 1950. 8


인천상륙작전 항공사진. 인천상륙작전에 704함 부장으로서 참가한 필자는 월미도에 근접하여 3인치 포를 퍼부었다. 1950. 9. 15


수도 서울을 탈환한 한국 해병대가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있다. 1950. 9. 26


704함의 최후. 인천상륙작전과 원산상륙작전이 끝난 직후 진해 통제부에서 발령 대기 중이던 필자는 김성은 대령의 권유로 곧바로 해병대 전과 후 해병대1연대 1대대장으로 발령받았다. 704함은 필자가 하선한 지 두 달 후 원산 앞바다에서 인민군 해군이 부설한 기뢰에 접촉되면서 필자의 동기인 이태영 소령을 비룻한 승조원 70여 명이 모두 전사했다.


통영상륙작전 및 인천상륙작전의 공로로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금성을지무공훈장. 1950. 10


자료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대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사진첩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