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사진/6대사령관 공정식

제3장 - 해병대로 가다 (1)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머린코341(mc341) 2017. 8. 17. 10:06

제3장 - 해병대로 가다 (1)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장

 

해병대 제1연대 1대대장 1950.12-1951.9

 

1. 해병대 제1대대장


  원산 함흥 지구 철수 이후 해병대 재정비 기간에 나는 해군에서 해병대로 소속이 바꿔었다. 미리 그렇게 정해져 있던 운명의 날이 다가온 것이다.


  "어이! 공소령 아니오? 잘만났소.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연락하려던 참이 었는데‥‥‥"


  1950년 11월 말이었다. 진해 해군통제부 영내로 들어가는데, 지나가던 지프가 내 옆에 멈췄다. 차 문이 열리면서 김성은 해병대참모장이 내렸다.


  "아, 참모장님 이 여긴 웬일이십니까."


  오랜만에 존경하는 선배를 만나 존경심에서 우러난 경례를 붙였다. 김성은 대령은 반갑다고 내 손을 잡고 흔들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새로 해병대 연대를 창설하는데 해병대에서 같이 싸우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해병대로 가서 참모장닝을 모시고 함께 싸우겠습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즉석에서 흔쾌히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오랜 함상생활에 지친 나는 육상근무 발령을 기다리면서 달콤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 휴식을 마다하고 해병대행을 결심한 것이었다. 김성은 참모장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지프에 올라갈 길을 갔다. 나도 통제부에 들어가 볼일을 봤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새로 창설된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해병대를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여순반란사건 당시 전투상보를 통해 해병대 창설을 건의한 사람이다. 그때 손원일 총장이 "공 대위 말이 맞소"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해병대가 창설되었으니 기가 막히는 인연이 아닌가!

 

2.해병대 전장으로 출동, 첫 전투 승리로 장식


  새로 탄생한 해병대 제1연대 제1대대 지휘관으로서 나는 바짝 긴장했다. 낮에는 훈련하고 밤에는 전투교범을 연구하는 '주경야독' 생활이었다. 1,2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지상전투에 투입될 날을 대비하려면 촌음도 허투루 쓸 새가 없었다. 경험이 없는 나에게 선임대대장 중책을 맡긴 김성은 연대장을 실망시키지나 않을까 걱정도 됐다. 열심히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몸을 던져 모범을 보이기로 결심했다.


  해병대 지휘관으로서 처음 출동 명령을 받은 것은 1951년 1월 하순이었다. 1·4 후퇴 직후 공산군의 대공세에 밀려 원주~오산 선까지 위협당하는 때였다. 경북 영덕 청송 지역의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게릴라 활동을 하던 인민군 10사단 잔류 부대를 소탕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3척의 미 해군 LST편으로 진해를 떠난 것은 한창 춥던 1월 25, 26일이었다.


  2월 5일 영덕에 상륙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져 있었다. 포항에서 대구·안동을 거쳐 북상해온 미 해병1사단의 소탕작전에 쫓겨 적이 강원도 내륙 쪽으로 퇴각한 것이었다. 묵호에 상륙해 태백산맥을 넘어 내륙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묵호에 주둔했던 육군수도사단은 미 해군의 강력한 함포 지원을 받아 해안지방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백두대간 서쪽 정선(9사단)·평창(7사단)·영월(7사단) 지역을 맡고 있던 육군3군단이 위협을 당하고 있었다. 묵호에서 영서지역 남쪽으로 가려면 울진으로 내려가 불영계곡을 따라 경북 봉화군을 넘어 춘양에서 북상하는 길을 택해야 한다. 500리 험준한 산길을 헤쳐가지 않으면 안 되는 루트였다.


  눈 쌓인 태백준령 좁은 도로를 차량으로 대부대가 이동하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다. 트럭이 눈길에 미끄러지면 대원들이 뛰어내려 밀고 끌어야 했다. 추위와도 싸워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전투였다. 악조건에 수천 리를 달려온 우리 해병1대대에게 육군3군단장 유재흥 장군은 영월읍 봉래산 737고지를 탈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육군의 기대에 부응하고 신생 해병1연대의 용맹을 보여주고자 치열한 공방전 끝에 목표 고지를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이웃 신병산과 능암덕산까지 점령했다. 영월 마차리 북방에서 고전하던 육군7사단은 활로가 트이면서 영월 지구를 방어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때 육상전투 경험이 없는 대대장에게 불안을 느낄 참모들과 해병들에게 최일선까지 가서, 소총 소대원들의 어깨를 도닥여 주고 솔선수범하면서 물렁한 대대장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3.화천전투


  영월 지구 수복 임무를 수행한 해병1연대는 춘천으로 이동해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큰 전공을 세운 데 대한 '보너스'였다. 1951년 4월 8일 휴식이 끝나고 9일부터 캔자스 라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라인은 동해안 남애리(양양군)에서 화천을 거쳐 임진강 하구에 이르는 수복목표 선이었다. 우리와 대치한 적은 중공군 39군 예하 115·116·117사단이었다.


  화천전투는 해병대가 중공군 인해전술에 맞서 수행한 치열한 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의 105밀리 포 54문과 155밀리 포 18문, 우리 해병1연대가 배속된 미 육군9군단 소속 200밀리 포와 155밀리 장거리 포들이 지원하여 깊은 산속이 천둥 같은 굉음으로 지축을 흔들었다.


  아닌 밤중에 집중포격을 받은 중공군 진지는 금세 쑥밭으로 변했다. 중공군 전사자만 2,700명으로 기록된 전투였다. 다음 날 아침 미 해병1사단 부사단장 풀러 준장이 헬기를 타고 연대지휘소에 날아왔다.


  "한국 해병대가 이렇게 강한 군대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한국 해병대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군요."


  눈밭에 즐비하게 흩어져 있는 중공군 시체를 바라보면서, 그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리고 김성은 연대장에게 미국 정부 훈장을 상신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갔다. 훗날 이 전승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해병대 장병들의 피와 땀으로 되찾은 화천댐을 파로호(破虜湖)로 부르도록 지시했다.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이다.

 

4.도솔산전투


  한반도의 허리를 동강 낸 휴전선은 동고서저(東高西低) 형상이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당시의 전선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동쪽은 38도선 훨씬 북쪽으로 밀고 올라간 반면, 서쪽에서는 전쟁 전 우리 땅이던 개성과 옹진반도를 내줘 오늘의 모습이 됐다.


  중동부전선이 38선을 넘어 멀찌감치 밀고 올라간 것은 도솔산 지구를 탈환한 해병대를 필두로, 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월등히 우세했기 때문이다. 경기 연천 지역과 강원 철원~화천~양구~인제~고성 라인 미 수복지구를 되찾는데 큰 몫을 한 도솔산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한 것을 나는 필생의 보람으로 간직하고 있다.


  적은 도솔산 봉우리와 이어진 앞뒤 좌우 능선의 요소마다 철벽같은 방어선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미 해병대1사단이 도솔산을 확보하기 위해 공격했는데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작전은 번번이 좌절됐다. 24개의 목표고지 가운데 제일 남쪽 한 봉우리를 점령하는 전투에서만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 해병대가 그렇게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지뢰 때문이었다.


  고지 공격을 위해 능선에 올라서려면 가파른 비탈이 맞닿은 계곡과 화전(火田)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은 길목마다 촘촘히 대인지뢰를 묻어 뒀다. 그해 6월 한 달동안 미 해병1연대 전상자 1,111명, 거의 전원이 지뢰에 의한 부상이었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미 해병대는 공격 라인 중앙을 담당한 미 해병5연대를 빼고 한국 해병대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1951년 6월 3일 작전명령을 받은 한국 해병1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큰일 났다"는 혼잣말 소리도 들렸다. 김성은 대령과 연대장 임무를 교대한 지 10여 일밖에 되지 않아 아직 부대 파악도 안 됐던 때다. 그러나 그는 어렵다고 망설일 사람이 아니었다. 수도탈환작전 때 용맹을 날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베스트를 다하는 지장이고 덕장이었다.


"이 과업은 우리가 해내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미 해병대가 못한 일을 우리가 기필코 해냄으로써 한국 해병의 기개를 보여주자! 끝까지 인내하고 감투하는 자만이 최후의 승리를 얻게될 것이다."

 
김대식 연대장은 이런 요지의 훈시로 휘하 장병들의 결의를 강조했다. 나는 선임대대인 제1대대장으로서 연대장을 충실히 보좌할 결심을 굳혔다.

 
영월 지구 전투 이후 용맹성과 협동심으로 똘똘 뭉쳐진 이서근·김환수·임병윤 이재원 중위등이 내 휘하 중대장으로 건재했고, 이근식 소위 같은 믿음직한 소대장들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해병1연대에 주어진 임무는 캔자스 라인너머 펀치볼 오른쪽 봉우리인 도솔산을 포함해 24개의 봉우리를 차례로 공격해 점령하는 것이였는데 우리 1대대는 공격 목표물이 제일 많은 좌일선 공격 라인을 담당하여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5. 대통령으로부터 생일 케이크를 받다
 

도솔산 작전을 마치고 우리 부대는 작전지역을 미 육군에게 넘겨주고 홍천으로 이동했다. 부대를 재편성하고 무기와 장비를 보충하면서 다음 임무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부대 시찰을 온다는 통보가 왔다. "도솔산의 영응들을 직접 만나 격려하겠다"는 뜻이라고 해서 우리들은 한껏 마음이 들떴다. 대통령께서 우리의 전공을 알아 주시다니‥‥참모총장이 다녀간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영광인데, 대통령까지 오시다니‥‥ 우리 모두는 이런 기분이었다. 그날은 내 생일이어서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1951년 8월 19일 헬기를 타고 이 대통령이 부대 연병장에 도착했다. 토머스 미 해병1사단장과 함께였다.
 
헬기의 프로펠러 바람에 흰머리를 날리며 연대본부에 도착한 노 대통령의 모습은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만면에 웃음을 띤 대통령은 전 연대 병력이 도열한 가운데 김대식 연대장에게 직접 표창장을 주었다.

  "·.·백절불굴의 인내력으로 쟁취된 그 승리의 결정체는 실로 구국의 정화가 아닐 수 없다." 표창장 문구 가운데 이 부분만은 지금도 기억한다.

 
수여식이 끝날 무렵이었다.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던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 경위(뒤에 경무대 경찰서장)가 대통령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 같았다. 대통령이 옆에 있던 토머스 장군에게 또 무어라 말하는 모습이 보였다.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곽 경위가 대통령에게 "오늘이 공정식 1대대장 생일이라고 합니다" 하고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대통령은 토머스 장군에게 생일 케이크를 공수해 올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고 했다.

 
식이 끝난 뒤에 헬기 소리가 들리더니, 케이크가 실려 왔다. 이 대통령은 태극기와 성조기로 장식된 생일축하 케이크를 나에게 직접 전달해 주었다. 그 케이크를 먹으면서 나는 감격에 겨워 울고 말았다. 같이 나눠 먹은 지휘관과 참모들도 숙연한 표정들이었다.

 
그런 영광의 주인공이 될 줄은 몰랐다. 대통령에게서 케이크를 받는 장면을 담은 사진은 뒤에 경무대에서 보내왔다. 나는 그 사진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영광'의 증표로 간직하고 있다

 

6.김 일성 ·모택동 고지 전투
 
홍천에서 부대 재정비와 훈련으로 1951년 여름 혹서기를 보낸 해병1연대는 8월 27일 펀치볼 북쪽 924고지(김일성 고지)와 1026고지 (모택동고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다시 중동부전선으로 행군했다.

 
피와 땀으로 빼앗은 캔자스 라인을 지키고, 한 치 한 뼘이라도 더 전선을 밀어 올림으로써 장차 닥쳐올지 모를 정전, 휴전협정에 대비하려는 것이 었다.


해병대 제1대대장으로 1,2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 해군 LST 3척에 탑승, 영덕으로 출동했다. 1951. 1


강원도 험준한 산길을 헤쳐 나가는 부대 이동. 그 자체가 전쟁이었다. 이때 육군 3군단에 배치받아 영월 봉래산 탈환 작전에 투입, 1대대장으로 부임 후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51. 2


화천 지구 전투 후 백년전우이자 선배 해병인 김성은(오른쪽) 해병대1연대장과 제1대대장인 필자가 승리를 기념하며 사진 촬영을 했다. 1951. 5
 

작전 구상 중인 필자. 1951. 7


도솔산 전적지를 시찰하는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 옆으로 김대식 연대장, 손원일 참모총장. 1951. 6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도솔산 전황을 보고하는 필자. 1951. 6


이승만 대통령이 도솔산전투의 전과를 치하하고자 '무적해병' 휘호를 해병대에 보내왔다. 1951. 7


도솔산을 방문한 미 해병대 제1사단장 토머스 소장을 영접하는 필자. 1951. 7


도솔산전투의 승리를 축하하고자 홍천 1대대 본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필자의 생일인 것을 듣고 토머스 미 해병대 제1사단장에게 부탁해 생일 케이크를 헬기로 공수, 축하해 주었다. 왼쪽의 두 번째 곽영주 경무대 경무관이 미소 짓고 있다. 1951. 8. 19
 

도솔산전투 공로로 미국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미국 전투 동성무공훈장. 1951. 8


도솔산전투 공로로 한국 정부로부터 수여받은 금성을지무공훈장. 1951. 9


도솔산전투가 끝나고 필자는 해병대 제1연대 부연대장 보직을 명받았다. 1951. 8


펀치볼 전투 시 김동하 연대장과 함께. 10월에 내린 폭설로 인해 부연대장인 필자는 계속되는 전투와 격무로 수염을 깎지 못한 채 임무 수행에 여념이 없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5·16혁명 시 김포 해병제1여단장으로 긴급 임명되었다. 1951. 10
 

도솔산에서 1952년 새해를 맞는 필자. 1952. 1


치열한 전투 후 여흥을 즐기는 해병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 철모를 쓴 이가 필자. 1952. 2


1951년 여름 혹서기를 보내고 8월 27일부터 펀치볼 북쪽 924고지(김일성 고지), 1025고지(모택동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해병대의 전투상황도. 1951. 8
 

도솔산 전투 후 최전방인 대대 전투지휘소로 이동 중 필자가 탄 지프차가 대전차 지뢰에 접촉해 대퇴부 부상을 입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걸어가고 있다. 이때 운전병과 전령은 순직했다. 1951. 10
 
자료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사진첩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