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사령관 사진/6대사령관 공정식

제4장 해병대 교육단 부단장 겸 상륙작전처장

머린코341(mc341) 2017. 8. 22. 15:59

제4장 해병대 교육단 부단장 겸 상륙작전처장

 

해병대 교육단 부단장 겸 상륙작전처장 1953.6~1955.3

 

  군인으로서 나는 두 가지를 자랑으로 여긴다.

 

  하나는 적의 남침으로부터 국토를 방위하는 일선에서 전투 경험을 가진 행운이고, 또 하나는 해병대 최초로 두 차례의 유학(상륙전 주니어스쿨 과정, 미 해병 참모대학) 경험을 토대로 우리 해병대 실정에 맞는 한국형 상륙작전 교리를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이 모두가 나를 믿고 아우처럼 이끌어 주었던 신현준 김성은 두 선배의 배려 때문이었다.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한창이던 1952년 8월나는 진해 해병대 교육단으로 전속됐다. 단장으로 있던 김성은 선배가 부른 것이었다.

 

  해병대사령부는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해병대 교육기관 관티코(Quantico) 상륙전학교 주니어 스쿨에 유학 보낼 최초의 요원으로 나를 지목했다. 당시 한국 해병대 수석고문관으로 있던 에드워드 포니(E. Forney) 대령을 통해 유학생 선발방침이 통보돼 있었다. 포니 대령은 상부에서 한국 해병대 요원들에게 체계적으로 상륙전 교육계획을 통보해 왔음을 알리고 적임자 선발을 요청한 것이 었다.

 

  나는 이 교육을 받고 돌아와 한국 실정에 맞는 한국 해병대의 자주적인 작전교리를 연구해훈련에 적용시킨 것을 큰 보람으로 여긴다. 7개월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교육 실무에 종사하다 1957년도에도 중령과 대령급을 상대로 하는 미해병 참모대학 9개월 과정에 최초로 유학 가게됐다. 두 차례의 교육을 통해 여러 가지 일을 많이했지만, 해병대 신병훈련에 팀워크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1차 유학 당시 목격한 것인데, 미 해병대에서는 신병훈련에 팀워크 정신을 유달리 강조한다. 강인한 체력단련과 정신훈련은 기본중의 기본이지만, 자기 희생과 상호 의존과 인내심을 통한 협동심이 없으면,그 힘은 분산돼 쓸모없는 힘이 되고 만다는 것을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가령 훈련시간 사이 휴식시간에 70여 명의 훈련병이 5개의 화장실만을 사용하도록 제한하는 식이다. 짧은 시간에 70명이 골고루 용변을 보려면 번개같이 일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좀 불편하더라도 됫사람을 위해 '급한 불'만 끄는 훈련을 쌓아 생리로 굳어지게 하는 것이 이 교육의 목적이었다.

 

  나는 이를 목욕 시에도 적용해 큰 효과를 봤다. 1953년 재편성된 해병대 교육단 교수부장겸 신설 상륙작전처 초대 처장으로 일할 때였다. 신병훈련소에 1개 중대원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목욕실을 만들어 자동샤워 시설을 설치했다. 천장에 배관한 수도 파이프에서 동시에 물줄기가 분사되도록 하고, 목욕시간을 2분으로 제한했다. 처음에는 난리였다. 머리에 비누칠만 하고 헹구지 못하고 나오는 훈련병이 많았다. 동작이 뜬 사람은 몸에 물을 묻혀 보지도 못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내무반으로 돌아갈 수밖에. 2분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 1분을 더 줬다. 그럭저럭 굴러가는 것 같았다. 남에 대한 배려와 인내심은 그렇게 길러지는 것이다.

 

 

한국 해병대 장교 최초로 미국 버지니아 주 관티코에 소재한 미 해병 상륙전 스쿨에 유학할 당시의 필자. 오른쪽은 필자와 함께 유학한 조봉식 대위. 1952. 10

 

미 해병대 상륙전 주니어 스쿨 수료 직전 교관과 함께. 주니어 스쿨 이수는 상륙전의 교리를 습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왼쪽부터 필자, 상륙전 교관, 조봉식 대위. 1953. 2

 

필자가 교육단 부단장 겸 상륙작전처장 재직 시 해병대 교육단장인 김성은 준장 그리고 미 고문단들과 함께. 1954. 9

 

 

해병대 창설 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진해 해병대 교육단 연병장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의 열병식. 왼쪽부터 이승만 대통령, 제병지휘관인 필자, 김석범 제2대 해병대사령관. 1954. 4. 15

 

김성은 교육단장과 교육 현안을 토의하고 일는 필자. 1954. 11

 

교육단 교관들과 함께. 왼쪽부터 두 번째는 필자의 동기생인 이맹기 해군 대령(후에 해군참모총장). 1954. 10

 

미 고문단장인 포니 해병 대령이 거제도에서 실시한 한국군 최초의 단독 대대급 상륙작전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에게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해병대 최초로 미 해병대 상륙전 주니어 스쿨에 유학하여 배운 교리를 한국 실정에 맞게 응용, 훈련을 계획, 실시하였다. 포니 고문단장 뒤 오른쪽 필자. 수석고문관 포니 대령은 필자에게 많은 미 해병대의 산지식을 전수한 전우이며 오늘날 해병1사단이 포항에 주둔할 수 있도록 애쓴 장본인이다. 철도·항만·비행장을 갖춘 천혜의 요새인 포항에서 철수하게 된 미 해병3항공사단 자리에 미8군과 미5전술공군이 서로 주둔하려 했으나, 포니 대령은 미 국무성에, 해병대사령부는 한국 정부에 강력히 요청한 결과 한국 해병1사단이 주인이 된 것이다. 1954. 10

 

미 제7함대사령관 초청으로 오키나와에 있는 미 해병제3사단이 이오지마에서 실시하는 상륙작전 훈련에 김두찬 대령과 함께 참관했다. 뒤편에 보이는 미 해군 함재기로 항공모함에 직접 착륙했다. 1954. 11

 

이오지마 미 해병대 승전탑에서 김두찬 대령과 함께. 1954. 11

 

연합참모본부 작전부 차장(대령) 재직 시 연합참모본부 의장 이형근 육군 대장(왼쪽에서 세 번째)과 연합참모본부 군수부장 김영철 해군 소장(왼쪽에서 두 번째)과 함께. 뒷줄 가운데가 필자. 1954. 12

 

자료 출처 : 해사1기, 예비역 해병대중장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님 사진첩 "바다의 사나이 영원한 해병"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