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264기 박동규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8)

머린코341(mc341) 2015. 1. 6. 04:53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8)

6. 배 고픔을 넘어


(사령관도 내 밀빵을 먹었다)


진해훈련소에서의 기본교육을 몇주 받은 후, 눈물고개를 넘어 상남으로 이동을 했는데
그 곳에서의 훈련도 매일 뛰고, 구르고, 얻어 터지고, 철조망 통과하고, 가끔 가다가 빤스바람 선착순하고...
뭐, 그런 거였습니다.

상남훈련소는 막사 주변에 철조망이 삥 둘러처져 있었는데, 진해훈련소의 담장보다는
다소 여유(?)가 있어서, "10분간 쉬어!" 시간이나 순검 전의 청소시간 등에는
밀빵 아줌마들이 그 철조망에 붙어서 가슴에 품고 온 밀빵들을 팔았습니다.

그 빵은 요즘의 호빵 비슷한 형태로, 그냥 밀가루만을 부풀려서 찐 빵이었는데
주로 40~50대 아줌마들이 그걸 집에서 쩌다 팔았습니다.
개중에 좀 극성스런 아줌마는 야외 훈련장까지 따라 다니며 팔기도 했는데
굶주린 훈련병들이 한꺼번에 여럿이서 달라 붙을 때면
그 아줌마들이 미처 감당을 못해, 돈 한 푼 못 받고 몽땅 털린 적도 많았을 겁니다.

이 밀빵 아줌마들과 관련되어 생각나는 것은 여럿 있으나,
그 중에서도 "야! 니네 사령관도 이 빵 먹었다!!"는 어느 아줌마의 외침입니다.
아마도 이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은, 교관이나 조교들이 그 아줌마들의 접근을 막으려 하자 나온 것 같은데,
그만큼 장교 후보생이나, 하후생, 병 할 것 없이 그 당시 훈련 중엔 배가 고팠다는 얘기로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시 상남훈련장을 거쳐 간 모든 해병들은
그 아줌마들의 품에서 나온 밀빵을 먹고 자란 "밀빵 동문"이기도 합니다.

(필터 안 달린 화랑담배)


75년까지는 필터가 안 달린 화랑담배가 보금품으로 나오다가, 그 후에야 필터가 달린 게
보급된 것으로 기억을 하는데, 하긴 그때 달린 필터라고 해 봐야
요즘의 것들과는 달리, 기껏 종이를 둘둘 말아 필터라고 만든 것이었습니다.
하여간 후반기 교육때부터 담배가 지급된 것 같은데, '10분간 휴식'시간에 한 대 피우는 맛은
나름대로 크나 큰 즐거움이자, 달콤함 그 자체였습니다.

실무에서는 졸병들에겐 아무래도 "정량보급"이 되질 않아서,
선임수병들이 피우다 말고 내던진 꽁초를 주워 피우기도 했는데
동기 중에 구제*이란 골초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이틀에 한갑 나오는 담배를 가지고는 그 量을 채울 수 없어서, 고심 끝에 한가지 꾀를 냈는데
그게 뭔고 하니, 보급을 받으면 우선 담배를 반으로 잘라서 그 갯수를 배가(培加)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늘 반똥가리 담배를 피우는 거지요.

나중에 필터가 달린 담배가 나왔을 땐, 우선 반만 피운 후 나중에 꽁초를 피우는 게 그래도 좀 나았지만
필터 없는 담배, 그것도 원래의 길이가 아주 짧은 걸
반만 피우고 두었다가 나머지를 피우려면
한, 두 모금만 빨아도 손가락과 입술이 뜨거워져서 여간 곤란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었으니
그게 뭔지 아십니까?
솔잎 있쟎습니까? 그 솔잎을 두 가지만 남겨두고 떼어 버린 후,
그 사이에 담배를 끼운 다음(마치 젓가락으로 잡듯이) 불을 붙여서 쪽쪽 빨면,
거의 끝까지 입술이나 손을 데지 않고 피울 수가 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좋지도 않은 그걸 왜 그렇게 악착같이 피워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돼지가 목욕한 국물)


제가 현역 생활을 하던 74~76년경에는 도루묵국이 많이 나왔습니다.
동해에서 많이 잡히던 약 20센치 길이의 보잘 것 없는 생선인데,
그 당시엔 아마 이 생선이 제일 쌌었나 봅니다. 허구 헌 날 나온 걸로 봐서...

당시에도 식단은 그럴듯 했는데, 내용은 아주 부실했던 걸로 기억됩니다.
특히 돼지고기가 나오는 날은 살코기라곤 거의 없는, 비계 덩어리만 몇 점씩(그것도 운이 좋아야)
국에 들어 있었는데, 이게 그래도 '꼴에' 고기니까 먹을 땐 그러려니하고 먹는데
정작 힘든 건, 먹고나서 식기를 닦을 때였습니다.

순전히 비계 덩어리라서 국이 식음과 동시에, 금방 응고가 되는데
이걸 닦아내려면 미끄덩거리기만 하고, 잘 닦이지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처럼, 퐁퐁이나 트리오같은 세제나 수세미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빨랫비누를 지푸락에 묻혀 닦자니 그 고생이....

식사는 소대별로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1소대가 먼저 하면, 내일은 2소대가 먼저 하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식사를 빨리 할 수 있도록 당직병이 순서를 정하여 식당에 들여보냈습니다.

배식은 선임기수부터 차례로 받았는데
식사 후에 식기는 고참 선임들의 것은 졸병들이 받아 왔고,
중간급들은 자기 식기를 자기가 가져 왔는데, 설겆이는 졸병들이 도맡아 했습니다.
그러니 요즘같은 겨울철의 졸병들 손은 그야말로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갈라지고 터지고 동상까지 걸려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더운 물 한 방울 없이 그 많은 식기들을 닦아야 했으니, 오죽 했겠습니까?
해서 당시엔 안티푸라민이 최고의 핸드크림이었습니다.

주계 벽에 걸린 식단을 보면 그럴싸한데, 막상 나오는 것이 그렇게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제게는 묻지 마십시오. 전 모릅니다. 절대로 모릅니다.
부식을 수령해 오다가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주계병들이 밤이면 밤마다 돼지 살코기들을 도려내 막걸리 안주 삼아서 구어 먹어 그랬는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비단 저뿐만 아니라,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모두 그런 건 모를 겁니다.
그러니 굳이 알려고도 하지 맙시다.

(후임이 몰래 갖다 준 돼지고기 한 덩어리)


지난 9월, 저와 함께 근무했던 272기 나상* 후임을 만났습니다.
인터넷 사이트를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연락이 되어 만나게 된 건데
그 후임과는 아래와 같은 잊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임은 저와 같은 소대에 근무를 하다가 대대주계로 파견을 나갔는데
어느 날 밤에 이 친구가 찾아 와 잠깐 밖에서 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뭔일인가 하고 따라 나갔더니, 품 안에서 돼지고기 한덩어리를 꺼내어 건네주더라구요.

그래서 남의 눈에 띌세라, 어두컴컴한 곳에 숨어서
허겁지겁 그 한 덩어리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다 뜯어 먹은 적이 있는데
지난 번에 만났을 때, 그 얘기를 했더니 이 친구도 그걸 기억을 하며
제게 고마운 게 있어서서 그랬다더군요.

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같은 소대에 있을 때
제가 집합을 시킬 일이 있었는데, 그 후임만은 그걸 면하게 해주려고
근무일지 순번을 바꿔가며 근무를 내보낸 후,
"내 밑으로"집합을 시킨 적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사실 그 후임이 곧 주계로 갈지도 몰랐고,
돼지고기 한 덩어리를 얻어 먹으려고 그런 건 아닌데 말입니다.

배 고팠던 얘기는 이것으로 마감합니다. "끝"

 

 

출처 : 해병대 인터넷전우회, 박동규선배님 http://www.rokmc.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