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일기/해병264기 박동규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10)-최종회

머린코341(mc341) 2015. 1. 6. 05:06

춥고 배 고프고 졸립던 시절을 회상하며(10)-최종회

8. 하사관과 병

 

(해병대에서의 사병관계)


군대에서의 하사관과 병과의 관계는 몇마디의 말이나 짧은 글로 표현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사관들은 병들보다 한 단계 높은 계급을 달고,그 직책상 병들을 지휘, 통솔해야 하는 입장이고
병들은 사실 자기들보다 더 잘날 것도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같은 또래의 하사관들로부터
일일히 이래라,저래라하는 간섭과 지시를 받아야 하니, 다소 삐그덕 소리를 내는 것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다들 한창 팔팔한 나이에 서로들 만났으니...

그러나 해병대는 좀 다르지요.
앞서 말한 껄끄러운 알력관계는 내부에서만의 문제이고, 일단 밖에 나가면
한 식구가 되어 똘똘 뭉치는 특성이 있습니다.
저도 영내에서는, 특히 저보다 짬밥이 적은 하사관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기어 붙기도"했지만,
휴가 때등,밖에서 만나면 해병대 하사 계급을 달고 있는 그 누구에게라도
깍듯이 경례를 했습니다. -짬밥 따지지 않고.

이것은 우리 해병대만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자랑이라고 지금도 생각하는데
앞으로도 이런 아름다운 전통은 계승,발전되어야 할 것 입니다.

(고생하는 하사관들)


70년대 중반의 하사관 기본교육은 6개월이었으니 병들의 3개월보다 배나 긴 것이었습니다.
그 긴 훈련을 마치고 실무에 올 땐, 그래도 훈련소보다야 낫겠지하고 생각들을 했을 겁니다만
사실은 그때부터가 고생길입니다.
병들도 이와 다를 바 별로 없지만....

병들을 제대로 못 다룬다는 등의 이유로 밤이면 밤마다 하사관 침실(하침)에서 집합 당하고
그나마 병들 보다는 좀 더 봉급을 받는다고,그 돈 다 털어서 선임 하사관들 술 사주고...
아무튼 정신 없습니다.

그렇다고 소속 소대에 가면,병장들이 고분고분 말을 듣기나 합니까?
고참 하사관들 보는 앞에서야 병장들도 어쩔 수 없이(?) 말을 듣는 척 하지만
나중엔 그들만의 갖가지 방법으로 보복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가운데 "낑겨서" 고생들을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단기 하사관들은
더 힘들었습니다.
하침에서 집합을 시켜도, 장기 하사관들은 좀 봐주고,
단기 하사관들은 더 혹독하게 다루는 것이 우리 병들 눈에도 확연히 구별이 됐으니까요.

제가 근무하던 때, 우리 중대의 하사관들은 중사 1명을 제외하곤
모두가 하사들이었는데그 중엔 7호봉 이상되는 하사들도 많았습니다.
74년도까지, 하사는 호봉에 관계없이 영외거주가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영외거주가 안 되는 고참 하사들에게 사실 무슨 樂이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그 긴긴 밤에...

그러니 만만한 게 홀아비 *이라고,
술 마시고 졸병 하사들 기합 들인다는 미명하에 두들겨 패는 수 밖에요.

그러다가 그들도 한 2년쯤 지나면, 나름대로 관록도 붙고
병들도 자연스레 통솔이 되면서
해병대 하사관으로서의 틀이 잡혀 갔습니다.

("앙거!"의 申하사관)


무릇 군대의 구성원들이 전국 각지에서 다 모이다 보니, 다양한 각 지방의 사투리 때문에 일어나는
재미난 일들이 많은데, 저희 중대에 저보다 고참인 申씨 성을 가진 하사관이 한 명 있었습니다.
고향이 여수, 여천 쪽이었을텐데, 사투리가 심했습니다.

어느 날,이 申하사가 중대 병력을 지휘하던 모습을 그려 보겠습니다.
병들이 4열종대 대형으로 오와 열을 맞춰 이동을 하고
이 申하사는 그 대열의 중간쯤, 왼쪽 밖에 서서 걸으며 구령을 붙입니다.

"하나 둘,하나 둘 제 자리에 섯!"대열은 제자리에 섰습니다.
곧이어 "우향 우!"
이렇게 하여 병들의 대열을 자기 쪽으로 돌려 놓은 다음,
"앙거!"라는 다음 구령을 붙였는데
대열 중에 그 말을 알아들은 몇명만 앉고, 나머지는 멀뚱히 서 있었습니다.

이"앙거"라는 말은 짐작들 하신대로 "앉아!"의 전라도 사투리인데
대열 중에 일부만 알아들은 겁니다.
대부분이 뻣뻣이들 서 있자 또다시 "앙거!"구령을 붙였으나, 그래도 안 '통하니까'
"이 띠벌 놈들, 앙그래니까!...."
하여튼 그날 많이 웃었습니다.

(구전으로 내려온 어느 선하 이야기)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제가 직접 체험한 것은 아니고, 당시에 전해 내려오던 얘긴데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 사람을 부리는 지혜가 엿보이는 얘기라, 한번 적어 보겠습니다.

어느 선임하사(중사)가 있었는데 속된 말로 가방 끈이 아주 짧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어떻게 중대선하의 직책을 맡았는데
암만 별 것 아닌 군대 행정이라고는 하나, 업무 수행에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그래서 소위 "먹물이 많이 든" 행정병을 뽑아 그럭저럭 업무를 처리해 나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상급부대에서 중요한 문서의 기안(起案)을 이 선하에게 지시했나 봅니다.
이제 껏 그래왔던 것처럼, 당연히 행정병을 불러 재차 지시를 내렸겠지요.
"이건 아주 중요한 거니까, 잘 해야 돼!"

지시를 받은 행정병은 선하가 중요한 것이라고 몇번씩 강조를 한 거라
열심히,정성을 다 해서 문서를 작성한 다음,선하에게 들고 갔는데,
그 문서를 받아 든 선하, 한 두장 슬쩍 넘겨 보는 척 하더니
다짜고짜로 행정병의 아구통을 돌리며
"이 개시키!!, 이렇게 밖에 못해?"하며 호통을 쳤답니다.

중요한 문서라고 해서 나름대로 잘 만든다고 만든 건데, 도대체 뭐가 잘 못 됐을까?하고
얼얼한 아구통을 쓰다듬어가며, 이 행정병은 또다시 문서를 정성껏 작성했습니다.
아까 것보다 훨씬 더 열과 성을 다 해서.

두번째 문서를 들고 온 걸 대충 보고는, "야!너 이 띠발 놈, 아직도 이렇게 밖에 못해?"하며
또다시 질책을 하면서도 먼젓번처럼 심하게 때리지는 않습니다.

두 번씩이나 "빠꾸"를 맞은 이 행정병,
진짜 이번에는 죽을 힘을 다 해서 다듬고 또 다듬어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수준의 문서를 들고 조심스레 선하에게 갔습니다.

그 문서를 역시 대충 훑어본 척한 선하가 이번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음 됐어. 짜~식 진작 이렇게 해 오지..."하면서 어깨도 툭툭 처주며
"너 오늘 밤에 외박이나 나가라"하고 외박증을 한장 척 끊어 주더랍니다.

사실, 그 선임하사는 애초부터 그 문서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 줄도 몰랐던 겁니다.
겨우 읽기는 하겠지만 그 말의 뜻이 뭔지도 모르겠던 거고...
그래서 두 번씩이나 무조건 퇴짜를 놨던 겁니다.

그러나 세번 째 들고 온 문서는, 굳이 안 읽어봐도
어련히 잘 했으리란 걸 간파했던 겁니다.
그 행정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조저서 최대한 잘 하도록 하되,
더 이상 조저봤자 나올 것이 없을 때는, 외박증이란 상을 줌으로써
다음에 또 잘 부려 먹겠다. 뭐, 이런 얘깁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용인술(用人術)이 아주 돋보이는 얘기 아닙니까?
하기야 그게 군대니까 가능했겠지만...

위의 하사관 얘기는 제 얘기가 아니고,전해 들은 것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하사관 출신들께서
못마땅한 점이 있더라도 양해 바랍니다.

끝으로,이 시간에도 포항과 김포 그리고 서해 5도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국토방위의 제일선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을
해병대 하사관들의 복지와 처우가, 지금보다 훨씬 향상되기를 기원합니다.

9. 마치면서


(20년 동안 또 입대하는 꿈을 꾸다)


저는 잠을 자다가 꿈을 많이 꾸는 편인데, 여러가지 꿈을 꾸지만
그 중에 군대에 관한 꿈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 꿈속에서, 저는 또 군대를 가는 꿈을 꿉니다.
용감무쌍한 해병대를 이미 갖다 왔는데 또 군대를 가다니.

하여튼 또 군대엘 갑니다.
그런데 꿈 속에선 육군을 갑니다.
그 꿈 속에서도 "어? 난 분명히 무적해병을 제대했는데, 왜 내가 또..."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잠이 깼을 때 눈이 아리곤 했습니다.

이런 꿈은 근 20년을 되풀이해서 꿨는데 요즘은 꾸지 않습니다만
생각해보니 이젠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젊은 날의 충격적인 기억도
차츰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데
이제는 그것마저도 꿈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보면, 30년 전에 지나간 저의 해병생활,
그것이 정녕 꿈은 아니겠지요?

<우리 인생은 항상 "선택"을 하며 삽니다>"끝"

 

 

출처 : 해병대 인터넷전우회, 박동규선배님 http://www.rokmc.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