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 참전수기/해병158기 이장원

첫 전투 - 판랑 까두산

머린코341(mc341) 2015. 10. 17. 14:24

첫 전투 - 판랑 까두산

 

조국을 떠난 지 2달.


캄란만 동바틴  해변 안전지대에서 월남전 적응훈련을 받으며 언제 실전에 투입될 지 늘 긴장하며 지내던 11월.


주월 미군 사령부에서 우리에게 가벼운 실전 경험의 작전을 주어 첫 전투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사이공 쪽으로 내려가는 중간에 “판랑” 이란 도시가 있습니다.


이 곳의 까두산이 라는 고지에 은거한 베트콩이 판랑 비행장을 자주 습격한다는 정보를 주면서 비행장을 경비하면서 까두산의 베트콩을 소탕하라는 작전입니다.



이 고지는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에서 호치민의 독립군에 의해 대패하고 월남 식민지를 포기하고 돌아가던 그 전쟁 때에 프랑스 군이 8차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끝내 실패한 고지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 까투산 전투에는 2대대만 투입되었는데 내가 마침 2대대 소속이라 이 전투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2대대가 판랑으로 이동하고 1965년 11월 4일, 드디어 첫 전투를 해 보게 되었습니다. 


(까두산 전투 당시 지휘부의 사진입니다.)

 

올려다 보이는 까두산은 크고 작은 바위로 뒤덮여 프랑스 군대가 대패할 만큼 요새로 보였습니다. 


6중대(중대장 장순규 대위-해간 26)와 7중대(중대장 이규태 대위-해간)는 판랑 비행장을 경비하면서 5중대(중대장 강인수 대위-해사)가 단독으로 “백경 작전”이란 이름으로 수행한 작전이었습니다.



월남전 참전이래 최초의 전투 작전이라 전 한국군의 사기에 미칠 영향으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으로 오윤진 대대장 이하 전 장병이 과연 어떤 전투가 전개될까 고심하고 준비하여 산 아래로부터 긴장된 가운데 신중하게 훈련한대로 고지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출전에 앞서 오윤진 대대장은
-- 지금까지 단련된 대한 해병대의 위상을 세계에 알릴 첫 전투에
-- 여러분과 참전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 는 요지의 출전 독려사를 하는 듯 했으나

솔직히 실탄과 수류탄 등 연습용이 아닌 실전 무기를 받아 든 전쟁터의 졸병의 머리 속은 긴장 속에 정리와 질서를 잊고 포격이 시작되고 전투기의 포격과 헬리콥터가 나는 가운데 대열이 움직이는 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전의 중대병력은 배속 부대까지 합쳐 인원이 많기도 하려니와 긴장 속에서 소대장과 선임하사관도 보이질 않고 분대장의 신호에 따라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낮은 포복과 엄폐 은폐물을 잘도 찾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전진을 하였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
나중에 다른 전우들의 영웅담은 밤새는 줄 몰랐지만 우리의 작전으로 사전에 모두 도망을 갔거나 이동을 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베트콩은 구경도 못하고 중간에 있는 절에서 승려 몇 만 만났는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무전을 치는 등 첫 경험은 그렇게 우려보다 쉽게 끝났고 고지를 점령한 뒤에는 마치 미 해병대가 이오지마 전투 후에 한 것과 같이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도 부른 뒤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내려 와 다시 주둔지 동바틴으로 돌아왔습니다.

 

(43년 만에 까두산 앞에 다시 섰습니다.)

 

-- 판랑 동북쪽 6키로 까두산(319 M)은
-- 프랑스의 대 부대가 8차례나 대 공격을 하였으나 실패 하였고
-- 월남군의 수 차례 공격도 실패했던 험한 돌산으로
-- 18년 동안이나 베트콩의 요새였던 까두산은 해병대에 의해 간단히 탈환되었다 -- 는 기록을 나중에 보았습니다.


주월 미군사령부와 월남군이 주는 정보에 의거 작전지역을 베트콩 점령 비율로 “적화 80%” 또는  50%, 30% 또는 베트콩 부대의 규모 화력 등등으로 표시했는데 이런 전투 작전을 통하여 그 정보의  정확도를 확인합니다.


이곳은 아마도 정보의 예상보다는 베트콩의 규모가 좀 작았던 곳이 아니었나 생각되었습니다.

 

(청룡 전우님들과 후청룡 들께서 까두산을 소개한 뒤로 - 까두산 앞을 지나는 한인들이 잠시 머문다하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아군에 대한 미군 전투기의 오폭으로 이 작전에서도 1명이 전사하고 4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해병대를 시험해 본 - 주월 미군 야전군 사령부는 드디어 - 시련의 땅 - 투이호아 평정 작전을 던져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