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역사/해병대 전통·비화

해외 출전<1편> - 한국군의 월남 파병

머린코341(mc341) 2016. 8. 27. 06:52

해외 출전<1편> - 한국군의 월남 파병
 

  휴전 후 국가전략기동예비대로서의 막중한 사명 완수를 위해 매진하고 있던 해병대는 정부의 파병결정에 따라 1965년 9월 20일 '청룡부대'로 명명된 제2여단을 편성하여 10월 3일 월남 전선으로 출동시키는 역사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다음과 같은 배경을 지니고 있다.


  즉 1964년 7월 30일 대한민국 국회는 정부에서 상정시킨 '국군 해외 파견에 관한 안건'을 의결함으로써 국방부에서는 그 해 9월 11일 1개 이동외과병원(장교 10명 사병 95명)과 태권도교관단(장교10명)을 파월하게 되었고, 1965년 3월 10일에는 1월 26일에 국회에서 통과시킨 '한국 군사원조단(약 2000명의 비전투원)의 파월 결의안'에 따라 1개 육군경비대대와 공병대대, 수송자동차중대, 해병 제1공병중대 등으로 편성된 건설공병단(비둘기부대)을 파월했다.


  그리고 그 후에 이루어진 전투부대의 파월에 앞서 국방부에서는 1965년 9월 15일 제100군수사령부(십자성부대)를 파월한데 이어 9월 25일에는 주월 한국군부대를 통합지휘할 주월 한국군사령부(육군 88명, 해군 13명, 해병대 25명, 공군 15명)를 파월했고, 1965년 8월 13일에는 국회에서 전투사단의 파월을 의결함에 따라 10월 3일 청룡부대로 명명된 해병 제2여단과 맹호부대로 명명된 수도사단의 제1진(2·3진은 10월 16일까지 파월)을 파월했고, 1966년 9월에는 백마부대(9사단)를 추가로 파월하여 미국을 비롯한 여러 우방국의 지원부대와 함께 월남정부의 평정(平定) 사업을 지원했는데, 우리 정부의 그와 같은 정치적 군사적인 노력은 공산침략에 직면하여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자유월남공화국과 우리의 맹방인 미국정부의 간곡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전투부대의 파월에 따르는 국가안전보장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뒷받침이 강구되는 가운데 이루어진 한국군의 월남 파병은 6.25전쟁 때 우리나라가 자유우방국가들로부터 입은 은혜에 보답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가운데 동남아와 동북아 및 세계의 평화 안전에 이바지 한다는 것이 그 파병의 명분과 의의(意義)로 표방되고 있었다.(물론 전투역량의 축적과 경제적인 이익의 추구 및 국력의 신장 등 부수적인 목적도 내포되어 있었지만)


  그렇다면 월남전쟁은 어떤 배경을 지니고 있었고, 그 당시의 정세상황은 어떠했는지? 그 배경과 정세상황에 관해 간략하게 언급해 둔다.


  2차세계대전 중 일본군에게 점령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印度支那)에는 전후(戰後)에 호지명(胡志明)이 이끄는 독릴연맹을 중심으로 하는 베트남민주공화국(월맹)이 성립되어 1946년 3월 프랑스 연합내에서의 독립을 협정하계 되었으나 그 해 12월 하노이에서 완전독립을 바라는 월맹과 프랑스 간에 일어난 무장충돌이 확산되자 프랑스는 1948년 6월 전(前) 안남왕(安南王) 바오다이를 내세워 별도로 베트남공화국을 만들어 프랑스 연합 내에서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두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프랑스에 대해, 소련과 중공은 월맹에 대해 원조를 함으로써 분쟁이 더욱 격화되어 결국 1954년 5월 8일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프요새의 함락으로 26개 국이 참가한 제네바회의(1954.4.26~7.21)의 결정에 따라 7월 10일 휴전이 조인되고 1956년에 실시된 통일선거때까지 북위 17°선을 경계로 북의 월맹, 남의 베트남공화국으로 양분이 되고 라오스 캄보디아와 함께 프랑스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 후 프랑스의 동의로 미국이 베트남공화국을 지원, 1956년 10월 고딘 디엠 수상이 국민투표에 의해 바오다이를 퇴위시키고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강력한 반공정책을 시행하자 월맹의 조종을 받은 남부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과 고딘 디엠에 반대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은 1957년 후반기부터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1960년 12월 30일 월맹의 주도 하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결성되자 반정부 게릴라전은 더욱 활기 있게 전개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1962년 2월 사이공에 미 군사원조사령부(UNCV)를 설치하여 베트콩 진압과 전략촌의 건설에 나섰고, 1953년 11칠 1일 고딘 디엠 대통령이 군사쿠데타에 의해 살해되고 쿠데타의 악순환으로 전국의 혼란이 가중되자 인도차이나 3국의 운명이 동남아 전체의 운명에 미치게 될 영향과 세계평화에 미칠 영향을 중시하고 1964년 8~9월에 발생한 3차에 걸친 통킹만 피격사건을 계기로 북폭을 단행하는 가운데 본격적인 군사지원작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을 주도하자 미국과 함께 동남아조약(SEATO) 가맹국인 필리핀,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도 파병을 하게 되고, 그러한 정세상황 속에 한국군의 파병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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