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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출전<1편> - 여단장의 중대 결심

머린코341(mc341) 2016. 8. 28. 03:21

해외 출전<1편> - 여단장의 중대 결심


  투이호아지구에서 수행한 청룡부대의 최초의 작전은 청룡1호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3단계에 걸쳐 수행되었다. 1단계 작전은 베트콩의 해상보급기지인 붕로반도와 다비아산 일대의 적 군사시설 파괴와 나트랑과 퀴논을 연결하는 1번 도로의 개척을 목표로 했고, 2단계 작전은 투이호아 남방의 1번 도로의 탐색, 그리고 3단계 작전은 총공격에 의한 은폐지역 소탕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1966년 1월 1일을 기해 전개한 3단계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서 여단장 이봉출 준장은 다음과 같은 난처한 일을 겪었다.


  즉 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여단본부에서는 미 야전군사령부 민사심리전부대의 지원을 받아 작전지역에 거주하는 무고한 양민들의 피해 예방을 도모하기 위해 항공기에 의한 전단 살포와 대민방송을통해 주민들로 하여금 백기를 들고 포병대대 진지 앞으로 나있는 도로를 따라 피난할 것을 종용했는데. 그 결과 남부여대한 수천 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정해 준 도로로 쇄도해 오자 그 현장에 나와작전에 헙조해 주고 있던 지방행정관과 월남군 당무자가 필시 그 인파 속에 피난민을 가장한 베트콩이나 베트콩 용의자들이 섞여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여단장에게 무조건 포격을 가하라며 종용을 하는 바람에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대로 두었다간 큰 화근이 될 것이란 성급한 주장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 할진대 청룡부대의 단 하나밖에 없는 포병대대 진지는 순식간에 절단이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릴 경우 아군 작전에는 중대한 영향이 미칠 것이 뻔한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된 포병대대 진지에서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즉각적인 조치로서 모든 포에 포탄을 장진해 놀고 진지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는 가운데 여단장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참모장 정태석 대령을 비롯한 여단본부 참모들도 절박해지고 있는 상황을 의식하며 지휘관의 최종적인 결심을 안타까이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때 중대한 결심을 강요당하고 있던 여단장의 마음은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괴롭고 답답했다. 포격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그러한 상황의식 속에서 그는 한참동안 남모르는 고민의 심연에 빠져 있었으나 도저히 결심을 굳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병들에게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던 그는 자신의 처소인 몽고형 천막 속으로 들어가 경건한 자세로 무릎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런 끝에 여단장은 자신의 결심을 굳히고야 말았다. 그 결심은 즉시 명령이 되어 하달되었다. 포격을 가하지 말고 피난민들의 몸을 수색하여 피난민들을 안전지대로 피난시키라는 엄명이었다.


  여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병대대 근처에 배치돼 있던 1개 중대의 병력이 즉각 행동을 개시하여 피난민들의 검색과 경계에 임했는데, 그 결과 그 수천 명의 피난민들 가운데 무기를 소지한 단 한 명의 베트콩도 없었다. 그런 일을 겪었던 이봉출 장군은 후일 "만약에 그 때 발포명령을 내렸더라면 천추에 용서받지 못할 중죄를 지었을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한편 그 3단계 작전에서 청룡부대는 적 사살 470, 용의자 590, 포로 18, 동굴파괴 170, 선박파괴 16척, 월맹지폐 14만 5천여 피아스타를 노획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거둔 반면 아군측도 150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출처 : 해병대 특과장교 2기, 예비역 해병중령 정채호 선배님의 저서 '海兵隊의 傳統과 秘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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